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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을라 Jul 24. 2024

씨줄과 날줄로서의 철학ㆍ사회과학(제2편)

「쉬움(easiness)」 개념에 관하여:‘뚱딴지’와 ‘진정쌍떡잎식물군’

    곧바로 선악론부터 논하려 하였으나, 이번 글에서도 순전히 제 생각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대가들의 사상을 소개하고, 그것에 색다른 주석을 붙이겠다는 원래 동기에 반합니다만, 이번 글은 분명 글과 글 사이를 잇는 사잇문 역할을 훌륭히 할 것입니다.      




1. 「쉬움」이란?:글을 쉽게 쓰는 방법


    ‘쉽다’‘쉬움’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또 더 나아가 ‘쉬운 글’의 정체성과 그 성립 요건은 무엇일까요. 더 나아가, “글은 (마땅히) 쉬워야 한다.”라는 일종의 당위성도 존재할 수 있을지요?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과 그것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 개념은 아주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께 누군가가 “세상에 난해한 것이 없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에는 난해한 것이 많습니다. 인간의 지식은 많은 경우 누적식으로, 켜켜이 쌓이면서 발전해 왔고,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변증법이 전하는 가치처럼, 정­반­합을 반복하며 변모해 왔습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사회 각 분야가 눈부신 고도화를 이룬 때에는 평생을 공부해도 깨닫기 힘든 지식이며, 경지가 많습니다.     


    따라서 요즈음에는 “어려운 글은 잘못된 글쓰기의 산물이다.”라는 기류가 있고, 또 적지 않은 작가들이 이런 기류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글쓰기가 담고 있는 일련의 과정이, 글감의 선택과 지식의 창조ㆍ가공ㆍ전달 등에 있음을 생각해 보면, 이 기류는 자못 되새겨 볼 바가 있습니다.     


    먼저 ‘쉬움’이란 것에 대한 개념 정의에는 사람마다 다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일상 속에서도 무언가의 본질을 캐물어 볼수록, 우리 스키마의 한계를 쉽게 겪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질에 다가가려는 시도를 여기서는 일관되게 「깊이(depth)」라 표현하겠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점차 후술하겠습니다. 이것은 제가 단순히 사회과학도가 아니라, 컴퓨터공학까지 공부하는 입장에서, 후에 알고리즘(algorithm) 개념과도 연결 짓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면, ‘열쇠’‘키(key)’를 생각해 봅시다. 둘은 이제 완벽히 일상적으로 쓰여 서로 차이가 없는 말처럼 우리에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어떤 어린아이가 우리에게 “왜 차키는 차키라 하고, 「차­열쇠」라고 부르지 않나요?”라고 묻는다면, 이에 대한 대답은 쉬울까요? 아마 다각도에서 조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예도 있습니다. ‘보랏빛’이라는 단어와 ‘소(牛)’라는 단어는 10살 미만의 꼬마도 알 것입니다. 하지만 “보랏빛과 소를 비교해 주세요.”라는 요청은 단순ㆍ복잡의 문제를 아득히 떠나,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2. 「쉬움」-「어려움」 경계:작가의 기술


    다시 한 번, ‘쉬움’, 특히 ‘언어적 지식의 쉬움’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은 사람 저마다 생각이 있겠습니다. 어떤 추상적인 것이 마냥 ‘쉽다’라고 부를 때, 그것은 자연히 「특정되지 않은 미지의 개인들을 상대로, 그중 최대한 많은 이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으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불특정다수 중 최대다수의 이해를 돕는다고 할 수 있겠네요.     


    제 생각에, 그것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은 이렇습니다. 첫 번째는 「가능한 일상어 위주로 전달될 것」입니다.     


    일상어는 평범한 사람의 지적 발달 과정 중, 인생의 이른 시기에 이해되고 사용되는 것들을 말합니다. 일상어들은 고급스럽고 현학적인 말씨에 비해서, 일반적으로 ‘얕은 깊이’를 가집니다. 극단적인 예시를 들어 봅시다. 사람이 「엄마(ʌmmɐ)」라는 말을 먼저 활용할까요, 아니면 건축ㆍ정치ㆍ존재이성(raison­d'être)이라는 말들을 먼저 활용할까요?


    사람은 저마다 갖는 개성은 다르지만, 오늘날 가정에서 동료집단으로, 경제활동집단으로 나아가는 순서는 얼핏 비슷합니다. 따라서 많은 일상어의 ‘깊이’도 이러한 순서를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표준국어사전에 등재된 언어든, 친구들끼리의 은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반면 어떤 어휘는 이해 가능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말하기ㆍ글쓰기의 기회를 거의 갖지 못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일상의 언어 세계의 변두리에 위치하거나, 특정 영역에서만 쓰이기 때문일 것이며, 누가 새로 만들었으나 이해는 가능한 말들도 있습니다. 「쉬움­―어려움의 경계」에 있는 개념들로, 약간의 도움만 있으면 곧바로 ‘쉬운 것’이 될 수 있을 대상들입니다. (사실, 논리학적으로 ‘쉬움’의 역은 ‘쉽지 않음’이고, 이는 명백히 ‘어려움’과 다른 개념입니다만, 애초에 위 개념들 자체가 상대적이고 추상적인지라, 집합을 이루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역시 일상어로서 표현했음을 양해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난 1년간 ‘진주아리랑’, ‘화랑곡나방’, ‘브롭딩나그(Brobdingnag)’란 말을 능동적으로 사용한 적이 있는지요. 있다손치더라도, 아마 ‘아침식사’, ‘퇴근’ 등보다 그 빈도는 현저히 떨어질 것입니다. 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접하거나 경험한 것들입니다. 아리랑은 중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서, 화랑곡나방은 쌀을 좋아하는 집 안의 나방으로 봤고, 브롭딩나그는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에 등장하는 거인들의 이름으로 읽었겠지요. 이것들 모두가 우리 일상 언어의 변두리에 위치한 말들입니다. 마냥 쉽다 할 수는 없는 것이어서, 작가의 추가적인 설명이 있으면 더욱 좋겠지요. “아! 그거였어!”라고 일깨움을 받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솜씨 있는 작가라면, 이런 도움의 ‘깊이’에 있어서도 방향을 적당하게 조절할 것입니다. 어떤 개념은 일상어보다 더욱 세밀하게 나아가지만, 도리어 일상어보다 낮은 설명력을 갖게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다음의 예를 봅시다.     



    식물계(Plantae), 속씨식물군(Angiosperm), 진정쌍떡잎식물군(eudicots), 국화군(Asterids), 국화목(Asterales), 국화과(Asteraceae), 해바라기속(Heliantheae)으로 이어지는 이 학문적 분류는 이 ‘존재’가 특정될 수밖에 없게끔 올곧은 방향으로 차근차근 ‘깊이’를 이뤄 나아가고 있습니다.

    근데 이 식물이 과연 무엇일지 저 같은 사람은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생각건대, 이런 전문적인 분류표를 배운 특정인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즉, 이럴 때에는 차라리 ‘돼지감자’, 더 적절히는 ‘뚱딴지’라고 툭 던지는 것이 일반적인 글의 성격상 적당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반대로, 이처럼 전문적으로 정리된 지식은 그 마디마디가 많은 정보를 함축시키는 일종의 거점(locus)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식의 하이퍼링크(hyperlink)가 되는 셈이지요. 어느 극단적인 경우에는, ‘전문적인 사회에서 공인된 명성을 그대로 가져와 나의 상식으로 삼는 일’까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 글을 쓰는 저는 막스 플랑크가 만들어낸 개념이나 그의 활동을 거의 모릅니다. 하지만 막스 플랑크 연구소가 독일에 존재한다는 것은 어느 텍스트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어렴풋이 추측을 합니다. 막스 플랑크라는 인물을 둘러싸고, 과학세계에서 정리되고 인정된 가치를 제가 받아들임으로써, “막스 플랑크에 대해 아예 모르는 제가 막스 플랑크를 천재로 인정하는 작업”이 가능합니다.


3. 「어려움」의 범주:과학도의 소명


    작성 중입니다. 양해 바랍니다. 새벽 감성에 젖어 쓰다 보니 잠이 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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