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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방에 조금씩 스며드는 법

by 느긋

뜨개방에 다닌 지 벌써 두 달째다. 카디건 한 벌 뜨는데 이렇게 많은 시간과 돈과 정성이 들어가는 걸 아는 사람은 함부로 옷을 떠주라는 말은 못 할 거다. 지루함과 조급함 대신에 느림의 미학인 뜨개질의 즐거움을 알아가고 있고, 더디지만 옷이 완성되어가고 있는 기쁨과 설렘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다. 집안일을 끝낸 후 넷플릭스 드라마를 켜고 뜨개질을 하는 밤시간이 요즘 최고의 힐링 순간이다. 뜨개질의 매력을 더 느낄 수 있는 찬바람이 부는 계절까지 뜨개질하기에 완벽한 나날들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뜨개방에 가고 있다. 주로 퇴근길에 들르고 주말 일정이 한가하면 토요일 오전에 가기도 한다. 뜨개방에 가면 조용히 뜨개질만 하고 뜨개 선생님에게 뜨개에 관한 질문만 할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다른 분들이 신나게 수다를 떠는 것을 라디오처럼 들으며 뜨개질을 하면 더 재밌어 이 시간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 대한 관심과 질문도 많아져 말하고 싶지 않은 신상이 털리기도 하지만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어르신들이라 젊은 댁(새댁이라 불리기도 한다)이 궁금한 게 이해가 간다. 내 나이와 결혼여부, 아이여부, 아이의 나이, 사는 곳까지 밝혀졌다. 직장이 동네라 직업만큼은 말하고 싶지 않은데 제발 묻지 않길 바랄 뿐이다.


내가 다니고 있는 뜨개방은 요즘 인스타에 나오는 핫트렌드 감성이 아닌 동네의 아주 오래되고 평범한 사랑방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다. 회원 중 40대 중반인 내가 가장 어리고 50대에서 80대까지 다양한 작품을 뜨고 계신다. 90대 할머니도 2분이나 계신다. 다들 돋보기를 쓰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옷을 뜨는 이 분위기가 좋다.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사돈의 팔촌 사연까지 다 알게 되는데 정말 다양하고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 김치 맛있게 담그는 법, 동네 병원 정보 등 생활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도 끊이질 않는다.


토요일 오전 여느 때처럼 신나게 뜨개방에서 카디건 오른쪽 소매를 뜨고 있는데 오전 11시 20분쯤 되니 선생님이 자연스럽게 압력밥솥에 쌀을 안치신다. 시간이 지나자 밥솥의 칙칙 소리가 들려온다. 회원 한분이 이제 막 밭에서 따온 여린 상추들을 씻고 선생님이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반찬을 내오는 소리가 들린다. 뜨개방 한쪽에 있는 작은 주방과 평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리다. 옛날 할머니 집에서 볼 법한 예스러운 쟁반에 반찬이 순식간에 준비되었고 '밥 먹어라'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동장님'이라고 불리는 아주 쾌활한 회원분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동네 동장님으로 퇴직하신 분이었다.


"어이, 새댁! 새댁도 와서 밥 먹어!"

"아, 저도 먹어도 돼요?"

"아~ 그럼! 어서 와!"


배가 아주 많이 고팠던 터라 단숨에 평상 앞으로 달려갔다. 회원분들도 자연스럽게 평상 앞에 모인다. 옆에서 선생님이 이제 막 한 밥을 그릇에 뜨고 계셔서 나르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밥그릇의 크기가 어마무시하다. 냉면그릇이다! 스케일이 다르다. 상추, 묵은지 지짐, 두부, 간장, 김치, 생선젓갈이 있었다. 막 한 밥에 묵은지를 올려먹으니 어찌나 맛이 있던지 감동 그 자체였다. 맛있는 리액션이 절로 나왔다.


"와, 너무 맛있어요!"

"맛있어요? 많이 먹어요! 배부르면 남겨도 돼."

"진짜 맛있어요!"


정말 맛있었다.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정말 맛있었다. 상추에 밥과 쌈장을 올려 한쌈 야무지게 먹으니 입안 가득 정겨움이 퍼졌다. 특히 묵은지 지짐이 너무 맛있었다. 묵은지를 씻어 별다른 재료를 넣지 않고 지지기만 한 것 같은데 어쩜 이렇게 감칠맛이 폭발할 수 있는 건지 참으로 대단하다.


냉면기에 담겨있는 밥 양이 상당히 많았는데 맛있게 다 비웠다. 이어지는 누룽지 타임! 따끈한 누룽지까지 먹으니 입안과 속이 개운해졌다. 역시 한국인의 밥상 마무리는 누룽지가 정답이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돈 안 내고 먹어도 돼요?"

동장님이 웃으신다.

"선생님, 이렇게 맛있는 점심을 어떻게 매번 차리세요? 대단하세요!'

"뭐, 그냥 하는 거지. 맛있게 먹어서 나도 좋네!"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설거지를 하려고 하니 동장님이 하지 마라고 하셔서 버선발로 뛰어가 싱크대 앞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그동안 막내여서 다 했는데 막내가 들어와서 참으로 좋구먼! "


친절하게도 앞치마를 나에게 둘러주시고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셨다.

"밥솥은 물만 담가서 놔두고, 상은 이곳에 두면 돼요."


뜨개방의 시스템에 관해 조금씩 알아갈 수 있었다. 오랜만에 정겨운 시골밥상과 정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다른 회원분들도 내가 한번 스쳐 지나가는 회원이 아닐 거라는 느낌을 받았는지 이것저것 간식도 나눠주시고 인사도 예전보다 더 반갑게 해 주신다.


며칠 후 나의 첫 카디건 작품이 완성되었다. 뒤판, 앞판, 소매를 떠서 선생님께 드리면 이어서 옷으로 만들어 주신다. 잇는 작업까지 내가 혼자 하고 싶었지만 이건 앞으로 차근차근 배우리라 다짐해 본다. 우리 뜨개방의 거래처인 세탁소에서 드라이까지 하고 나면 산 옷처럼 자클(물기나 기름기, 윤기 따위가 많이 흘러서 반지르르하다 - 네이버사전)해진다.


"처음 한 것 치고는 옷이 잘 나왔네! 처음 하면 울퉁불퉁 기둥이 서는데 진짜 잘 떴어."


주변에서도 한 마디씩 거들어 주셔서 기분이 좋아졌다.


"신입이 아닌데~ 진짜 예쁘게 잘 떴네!"

"옷이 자그마해서 더 이쁘네. 진짜 잘 떴구만."


마지막 작업으로 단추만 달면 되는데 이 부분도 꽤나 정성이 많이 들어간다. 다른 분들은 시내 지하상가 단추 가게에 직접 가서 본인의 옷에 어울리는 맞춤형 단추를 다는데 성격이 급한 나는 쿠팡 로켓배송에서 단추를 주문하였다. 옷에 대보지 않고 사진만 보고 단추를 산 거라 좀 걱정이 되었지만 완성된 후 옷을 입어보니 내가 만든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다. 길이와 품까지 완벽한 나만의 맞춤옷이었다.

이 옷이 완성되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단추를 달 때 사용되는 실은 원래 털실에서 뽑아서 쓰면 된다는 팁을 주신 회원분(막내딸이 나와 나이가 같다고 늘 이야기하신다), 항상 예쁘다고 격려해 주시는 회원분, 젊은 댁이 뜨개방에 와서 같이 하니 좋다고 하시는 90대 할머니분, 밥을 같이 먹자고 해주시는 동장님 회원분 등 너무나 감사하다. 코를 빼먹거나 틀린 부분을 바로 수정해 주시는 뜨개방 선생님은 말할 것도 없다.


다음날 직장에 입고 갔더니 다들 감탄을 하며 산 것 같다고 놀라워한다. 물론 산 옷이 더 저렴하고 더 예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직접 뜬 카디건은 의미가 다르다. 나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랄까? 나의 포근한 에너지가 가득한 카디건을 입을 때마다 평생 입을 수 있도록 관리를 잘해보리라 생각해 본다.



처음 뜨개방에 왔을 때 인스타에 올라와 있는 사진을 선생님께 보여드리면 '이건 사진에서나 예쁘고 실제로 보면 안 예뻐요' 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선생님 실력과 센스를 조금 의심하기도 하였다. 완성된 작품을 보고 나니 경력과 노련함은 쉽게 나오지 않음을 깨닫는다.

다음 옷은 지퍼가 달린 품이 좀 넉넉한 카디건이다. 올해가 한 달 남짓밖에 남지 않아 내년에나 입을 수 있겠지만 이게 바로 뜨개질의 묘미라 생각하니 마음도 느긋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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