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 '교직생애 주기별 AI 디지털 역량 강화 연수'를 듣기 위해 집을 나섰다. AI와 공존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만큼 관련 연수를 받으며 나름대로 공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어 따라가기 쉽지 않다. 특히 교사로서 미래세대를 이끌어갈 우리 학생들에게 균형 있고 윤리적인 AI 교육을 위해 고민하고 실제 교실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 제미나이와 노트북 LM에 관한 실습을 하며 혁명과 같은 신문물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부족한 실력으로 디지털을 오전 3시간 동안 접하니 아날로그의 끝판왕인 뜨개방에 너무 가고 싶어 집 대신 뜨개방으로 직진했다.
점심 때라 식사가 한창이었다. 누룽지를 드시고 있는 모습에 마무리가 되어가는 듯 보였다.
"새댁, 밥 먹었어?"
이제 막 한 밥과 누룽지가 먹고 싶었지만 점심 끝 무렵이라 시간이 애매하였다. 더욱이 오전 연수에서 간식을 많이 먹은 탓에 배가 고프지 않아 밥을 먹었다고 둘러대고 나 혼자 뜨개질을 시작하였다. 분홍색 카디건을 마무리한 후 주변에서 뜨고 있는 넥워머에 관심이 생겨 뜨고 있는 중이었다. 넥워머 하나를 뜨려면 캐시미어실이 한 개 반 들어간다. 실 한 볼에 30,000원이라 처음에 놀랐지만 만져보니 캐시미어의 부드러움, 가벼움, 따뜻함이 여느 울 실과는 달랐다. 친한 동생과 내 넥워머를 뜨기 위해 베이지색 실 3개를 구입하여 열심히 뜨개를 하였다. 크리스마스 전에는 완성하는 게 나의 목표이다.
내가 다니고 있는 뜨개방의 연령대는 40대 중반인 나를 시작으로 90대 할머니까지 폭이 넓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뜨개를 하면 2-3시간이 훌쩍 지나갈 정도로 재미있다. 디지털 시대에 뜨개가 주는 느림의 매력과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힐링이 상당하여 요즘 내 최애 취미가 되고 있다.
오늘도 역시 다양한 이야기가 나와 손을 바쁘게 움직이면서 귀는 쫑긋 세우며 허리도 한번 곧추 세운다. 의식의 흐름대로 말씀을 많이 하셔서 주제가 이리 저리로 잘 튀기 때문에 잘 들어야 한다. 가끔씩 말씀하시는 분들이 단어가 생각 안 나 말이 막히는 듯하면 내가 그에 맞는 단어를 말해주는 쾌감을 느끼기 위해서라도 집중해서 듣고 있다.
우리 엄마 또래의 70대 회원분이 입을 여셨다.
"요즘에 알부민을 먹으니까 조금 기운이 나는 것 같네."
홈쇼핑에서 많이 광고하는 내용이라 나도 들어 본 기억이 있다. 옆에서 80대 할머니 회원분이 자연스럽게 말을 받아주신다.
"알부민? 나도 먹고 있어. 그거 양이 얼마 안 되든만."
"응~ 양 얼마 안돼. 그래도 먹으니까 좀 효과가 있는 것 같어."
"나는 먹어도 별 소용이 없던디. 우리 딸이 지 아빠 꺼 내 거 두 상자 사줬는디 우리 집 양반은 벌써 다 먹고 내 거 넘보고 있어."
평소 영양제를 잘 챙겨드시는 아빠가 생각나서 피식 웃음이 났다.
"우리 집은 우리 집 아저씨가 영양제도 엄청 잘 챙겨 먹고 옷도 그렇게 많이 사."
평소 옷 욕심이 많은 아빠가 생각나서 또 피식 웃음이 났다. 엄마는 시장표 옷을 좋아하는 반면 아빠는 평생 브랜드 옷을 즐겨 입으셔서 엄마가 진절머리를 친 적이 평소에도 많다.
"옷 욕심 많은 것은 어떻게 해도 못 말려."
"우리 시어머니도 그렇게 옷욕심이 많았는데 우리 집 아저씨가 지 엄마를 닮았어."
80대 할머니 회원분의 진작에 돌아가신 시어머니 흉이 그때부터 시작이 되었다. 내가 뜨개방에서 그동안 쌓은 데이터베이스에 의하면 이 분은 엄한 시집살이를 겪으셨던 것이 분명하다. 80대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 당한 구박과 설움은 아직도 잊히지 않나 보다.
"우리 시어머니도 옷 욕심이 징하게 많았어. 내가 시집가고 처음으로 친정을 다녀왔는데 친정 다녀왔는데도 아무것도 안 해왔다고 온갖 구박을 다 받았어."
"아이고, 너무 했다."
"그 냥반이 난리 때 혼자되셨는데 그때 나이가 서른둘이었어. 그 마을에 일곱, 여덟 남자들이 한꺼번에 끌려갔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나도 입을 열었다.
"무슨 난리요?"
옆에 다른 분이 대신 말씀해 주셨다.
"6.25!"
와, 6.25를 겪으신 분들로 역사의 산증인들이셨다.
"시집가서 첫째와 둘째로 딸을 낳았는디 우리 시어메가 아들도 못 낳는 년이라고 그렇게 나한테 뭐라 했어."
"그때는 왜 그랬을까잉."
안타까운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계속 이어지는 할머니의 시집살이 스토리에 뜨개질 시간은 더 빨리 지나갔다.
"그때는 한 방에서 시어메랑 애기들이랑 다 같이 잤어. 문도 없어가지고 단칸방에서 그렇게 살았어."
이 할머니에게는 2남 2녀의 자제분이 있는걸로 알고 있는데(뜨개방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사돈의 팔촌까지 파악이 된다)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여기저기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막내가 한 건 했네!"
"애를 어떻게 만들었냐고!"
시어머니와 한 방에서 자면서 어떻게 아이를 그렇게 많이 만들 수 있는지 정말 단순하고 원초적인 궁금증이었다. 사랑의 힘이 참으로 대단하다. 시어머니의 갖은 시집살이도 뚫었으니 말이다. 알부민 영양제 이야기에서 아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아주 자연스러운 대화의 흐름에 웃음이 절로 났다. 그 작은 단칸방에서 아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80대 회원분이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다들 공감이 가는 내용이었는지 한참을 그렇게 웃었다.
우리 뜨개방은 엄청 세련되진 않았지만 유행이 있기는 있다. 한분이 떠서 예쁘면 따라서 뜨는 경우도 많지만 10년 20년 동안 입을 수 있는 유행 타지 않은 옷들을 주로 뜨신다. 한코 한코 뜨시면서 풀어내는 이야기에 눈물과 웃음이 섞여있다. 내 또래가 알 수 없는 경험이 많은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역사의 한 장면 같아 소중할 때도 있다. 연륜에서 묻어나는 내용에 출구 없이 빠져들기도 하는 참으로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나는 이곳이 정말 좋다. 뜨개를 통해 느리지만 꾸준히 하면 결국 이뤄낸다는 진리도 몸소 경험할 수 있고, 김장 김치에 갓 지은 쌀밥도 먹을 수 있는 정이 가득한 곳이다. 가끔 토란대나 사과 김 등도 공동구매 할 수도 있다.
우연히 만난 뜨개방이 한없이 따뜻하다.
길고 긴 겨울이 올해는 짧게 느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