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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쓰는 자의 운명

밭을 가는 소의 걸음걸이로,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문단에 이름 석자를 올려놓은 지도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문학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오랜 시간의 검증을 거치고도 석탑처럼 우뚝 서 있을 수 있는 작품 하나 가지기를 언제나 꿈꾸지만, 문학은 야속한 님처럼 언제나 말이 없고, 난 짝사랑으로 온 몸이 파랗게 타 들어가곤 한다. 늘 얼음 위에서 자는 사람처럼 불편한 잠 속에서도 님을 만나듯 문학을 만난다.


  글만 써서 호구가 해결 되지 않아 다른 공부를 하러 갈 때 가슴이 몹시 아팠다. 문학에게 버림받은 느낌이 명치를 꽉 메우고 있어 오래도록 불행했고, 오래도록 침묵했다. 불행한 자는 침묵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나는 침묵서원을 한 수도자처럼 말없이 지냈다. 눈을 아래로 할 수조차 없었다. 눈을 아래로 했다가는 눈물이 굴러 떨어져 내 발등을 사정없이 찍을 것 같아서였다. 


  쉬어갈 나무 한 그루 없고 길을 물을 ‘여우’조차 없는 바람 부는 문학이라는 사막을 불을 지고 걷는 소처럼 타박타박 걸어 오다보니, 너무 멀리 걸어와 버려 이젠 돌아갈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이렇게 멀리 걸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누구와도 마주친 적이 없어 여전히 무명인 처지가 서럽기도 하지만, 이젠 무명인 존재가 얼마나 편안한지 모른다. 아직도 내 등에는 불씨가 남아 있고, 포기한 적이 없으니 실패하지도 않았다. 


  내가 문학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 떨려하는데 반해 이 시대는 문학을 도외시한다. e 메일조차 문장이 길어 읽기 귀찮은 디지털 세대들은 휴대폰 메시지로 편지를 대신하는 세상이 되었다. 또한 영상매체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문학작품에서나 느낄 수 있었던 감동적이고, 문학적이고, 철학적이고, 인간적이며 오락적인 잘 만든 영화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세계 영화제에서 우리나라 감독들의 수상 소식은 이젠 놀랄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니 누가 홀로 골방에 틀어박혀 냄새나는 소설을 돈을 주고 사서 홀로 외롭게 책을 보겠는가. 독서는 자신을 성찰하는 기능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보는데 인색하다. 책을 사지 않고 읽지 않는 그들이 너무나 이해가 잘 되어 오히려 글을 쓰는 직업인 내가 미안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또한 문학이란 ‘인간의 감성이 잠들지 못하도록 계속 잽을 날리는 행위’이다. 감성이 깨어 있다는 것은 첫 번째로 모든 미물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살아있다는 말인데, 책을 읽지 않는 요즘 세상은 날로 이기적이고, 포악하고, 잔인해지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문화예술(영화, 연극, 오페라, 뮤지컬, 애니메이션, 모바일 게임 등)의 기본은 서사구조(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서사구조의 원형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소설이다. 이렇게 소설가를 홀대 했다가 나중에 아무도 소설을 쓰지 않게 되면 우리의 모든 문화예술이 깡그리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 아직도 글 쓰세요?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은 내게 그런 질문을 가끔 한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쓸쓸하고 외로워진다. 물론 소설가는 언제나 다음 작품을 쓰지 않는 한 이번 작품이 묘비명이 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한번 소설가는 영원한 소설가이다. 소설을 쓰지 않을 때조차 소설가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십대 초반, 내가 가지고 있는 잣대에 세계가 맞지 않는다고 분노하고, 적의를 드러냈다. 그러나 세계는 누구의 잣대에도 맞지 않는다는 것, 자신이 가진 그 잣대만큼 세계를 바라볼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는 미욱하게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젠 분노를 담은 발톱을 감출 줄도 알게 되었다. 분노와 적의를 드러내던 시절, 난 어리석게도 문학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맹신했었다. 그러나 문학은 사회를 절대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문학은 사회에 아무것도 기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을 약간 변화시킬 수는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 변화란 것도 쓸데없이 번뇌에 휩싸이게 만들고 질문하게 한다. 


  ‘왜?’라고 질문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고뇌에 빠지게 되고, 이윽고 늙은이의 눈으로 변해 세상살이가 시들하게 느껴지는 니힐리스트나 아나키스트로 이끌리게 된다. 그러므로 결국 문학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없고, 따라서 변화시킬 수도 없다. 문학이 수치심을 일깨우고 인간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친다고? 그러기에 인간은 너무 약아 버렸다. 단, 고뇌하는 인간은 스스로 우월감을 가지게 될 뿐이다. 


  그럼, ‘나는 왜 소설가인가?’라고 또 다시 내게 질문을 던져본다. 소설가란 문학으로 이 슬픈 세상을 구원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순례자’인 동시에 삶의 의미를 해석하는 ‘해석자’이기도 하다.


  문학이란 결국 자기 찾아가기이다. 자기 찾아가기란 ‘상처 난 영혼을 치유’하기의 다른 이름이다. 사람들은 그런 문학(혹은 예술)을 보며 자신들의 상처 또한 치유한다. 상처 없는 인간은 없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부터 상처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만남과 이별에 의한 상처의 연속이다. 상처 난 영혼을 치유해 주는 게 문학(혹은 예술)의 몫이다. 


  내 문학의 첫걸음은 상처 난 영혼의 치유를 위한 수단으로 시작되었다. 


  글을 쓰고 있을 때만이 가장 행복했고, 불안하지 않았고, 살아있는 것 같았다. 모두 잠든 밤 홀로 깨어 글을 쓰고 있노라면, 내 몸이 발광체처럼 파랗게 빛을 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삶의 뒷모습을 목도한 자처럼 소설가는 결코 이 생(生)에서 편안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는 존재임을 알았다.


  상처 난 영혼을 복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글쓰기는 이윽고, 목적이 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 문학출세주의라는 욕망에 빠져 시달렸다. 그럴수록 글쓰기는 더욱 힘겨웠다. 비슷하게 출발한 문우들이 저만큼 앞서 가는 걸 지켜보면서 제자리걸음인 것만 같은 자신을 바라보기란 절망에 가까웠다. 스스로 비루하고 누추하여 어느 날 죽어버리고 싶었고, 문학을 작파하고도 싶었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독방 생활을 하는 수인처럼 검은 커튼을 치고, 우황 든 소처럼 펄펄 끓는 열기를 어찌하지 못해 무지 울었다. 그 열기는 문학을 향한 내 사랑이었다. 울고 또 울며 하얗게 밤을 밝힌 날 새벽이면 배가 고팠다. 문학은 돌부처처럼 말이 없고, 난 밥을 먹었다. 


  소설가는 생명의 비의를 쫒고자 하는 자이며, 신(神)의 영역으로 가고자 하는 자이다. 그들이 쓰는 글은 상상과 체험에서 우러나와 후대의 한 영혼에게 파장을 일으켜 변화시킬 수도 있다. 소설가가 어느 한 시간을 묘사하는 것은 이 세상의 한 찰나를 묘사함이며, 그 찰나를 묘사함으로서 세상의 한 찰나는 의미를 지니게 되며,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또한 소설가란 캄캄한 밤길을 걷는 나그네에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묵묵히 서서 밤길을 밝혀 주는 외등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글 쓰는 행위가 그리 만만하고 초라한 일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내 울음을 멈추게 했다.


  또한 스스로를 위로 했다. 아무도 읽지 않는 소설을 쓴다는 걸 죄스러워하지 말자. 이젠 나를 위해 써야겠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면 나를 위해 쓰자고. 그게 쓰는 자의 운명이라면 그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절망의 바닥까지 내려가면 다시 바닥을 차고 올라오는 법. 절망과 극복을 거듭하던 어느 날, 문학은 내 삶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란 생각이 들었다. 또한 문학이란 마라토너처럼 자기와의 싸움인 동시에 끝까지 완주하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는 깨달음이 왔다. 고독한 ‘순례자’처럼 내가 바라본 세상만큼 삶을 해석하며, 밭을 가는 소의 걸음걸이로 이 생(生)을 무사히 횡단하기를 희망하게 되었다.


  그 생각 이후, 시류에 편승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았고,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 평상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가끔 불안이 날 집어 삼키려 으르렁거리곤 한다. 그럴 때면 뼈 속까지 취할 수 있는 독주(毒酒)와 ‘쳇 베이커(Chet Baker)’의 트럼펫곡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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