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금만 May 20. 2024

여순사건

메감씨 왜 그런 다요?

메감씨 왜 그런 다요? (덕충동 콩밭) /116x91cm콘테2024




대전 2연대는 마지막까지 저항한 봉기군을 진압하기위해 현 중앙여고 뒤편을 통해 올라오고 있었다. 학생과 청년으로 구성된 봉기군은 저항하다가 병력과 무기가 밀리자 마래산 초입에 있는 석천사 방향으로 퇴각하였다. 진압군들은 이들이 덕충동으로 숨어들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봉기군은 덕충동을  이미 떠난 상태였다.


덕충동은 본동(작은동네)과 덕충동(큰동내)로 나눠 져있는데 진압군은 중앙여고 뒤편을 거쳐 본동으로 내려왔고 또 한쪽은 마래산을 통해 큰동내로 내려오면서 양쪽에서 진압작전을 폈다. 




전 대원은 들어라! 


우리와 교전했던 좌익 빨갱이들이 이곳 덕충동으로 숨어들었다. 


한 놈이라도 발견하면 즉시 사살하고 모든 주민들을 의심자로 간주한다!


지금부터 덕충동을 수색하며 좌익분자들을 사살한다.


우리가 이곳 여수까지 온 것은 빨갱이를 박멸하러 온 것이다. 


빨갱이로 의심이 가는 자는 남녀노소 구별 없이 즉시 사살하라!


이것이 애국이며 이것은 각하의 지시이다!


산개하여 일부는 본동 논에 주민들을 모이게 하고 반군 가담자를 가려내라! 


나머지는 덕충동 콩밭에서 주민들을 모으고 반란자들을 색출 후 사살하라!


주민들은 모두 집밖으로 불러내고 집에 혹시 누군가 남아있다면 화염방사기로 집과 함께 태워라! 불을 끄려고 시도하는 자도 좌익 반란자로 보고 잡아서 사살하라!




“기..김상병님!”


“금방 태운 초가집 방안에 노인 남아있었는데...”


“중대장님이 다그치는 바람에 발로 밀어 넣고 화염방사기로...”


“최일병 그놈들은 우리 전우에게 총부리를 겨눈 놈들이다!”


“중대장 전달 사항 못 들었나?”


“그들을 하나하나 색출하여 사살하라 라는 지시다!”


“그들은 잠재적으로 빨갱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저..는 오늘 처음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다 그저 죽여야 할 대상이다.” 


“죄책감 갖지 마라!


“최일병 너는 애국자다!”




엄마와 아버지는 어디 갔지? 오전에 종산국민학교로 끌려갔다고 동네 사람들이 그러더니 그 쪽으로 잡혀가셨나? 아니면 저쪽 콩밭에 돌아가신 분들 중에 계신가? 오~메 수산학교 다니는 남호형도 진즉에 죽어서 시신이 되었네. 누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매일 오전부터 술 마시고 온 동네를 휘 젖던 조씨 아저씨도 아무런 말없이 저기 고개를 숙이고 서있다. 그리고 항상 학교 갔다 오면 와상에 앉아 오~~메 우리 학상님 오셨는가? 오늘은 핵교에서 뭘 배웠당가? 하던 병덕이 엄마도 그저 땅만 바라보며 아무런 말이 없다.




“너 거기 교복입은 놈 이리와!”


“왜 근다요?”


“너 손 펴봐라!”


“여그요.”


“손에 못이 박혀있는데 너 총잡았지?”


“아닌디요  낫질하다 생긴건디요.” 


“콩줄거리 베다가 생긴거랑께요.” 


“어끄저께 여그 콩이 여물었다고 엄니 아부지 도와 줬땅께요.”


“메감씨 왜 근다요?” 


“학교 갔다 시방 왔는디 나는 잘못 없당께요?”


“저쪽에 서.”


“군인아저씨 저는 암긋도 모른당께요”  


“오~~메 왜 근데”


“눈감어!”


“지금부터 한마디라도 더 소리를 낸다면 바로 사살한다!”




너희들은 사람이 아니다. 너희들은 여기서 죽어져야 한다!


그리고 너희들은 이제부터 죽었기 때문에 빨갱이다!




대전2연대는 여수에서 이렇게 학살연습을 한 후 1949년 12월 제주 송령이골 의귀국민학교에 80여명의 마을 주민들을 감금했고 이를 구하려고 습격한 무장대 51명을 사살했다. 진압군은 의귀 지역에서만 250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전투가 끝난 후 80여명의 마을 주민들은 총살당했다. 무장대 시신 일부는 마을 주변에 그대로 놓아두고 시신을 손대지 못하게 했다. 마을 주민들은 시신이 썩어가는 것을 보면서 살아가야 했지만 아무도 매장 할 수 없었다.  




여수의 동쪽 가장 가난한 동네 덕충동. 덕충동 콩밭은 어렸을 때 저의 놀이 터였습니다. 마래산으로 갈 수도 있고 만성리 해수욕장으로도 갈 수도 있는 곳이라 항상 다니던 길이였습니다. 그 곳에 지어진 2층집은 친구 집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무참히 세월이 흘러도 아무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같이 놀았던 친구들 형과 누나들은 아무도 이런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가려지고 가려져 주택가가 되고 학교가 되고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바라보면 눈부신 바다와 오동도 그리고 엑스포가 시원하게 보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