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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맷 Jun 16. 2024

Concrete - Love - Poetry


정방형 그리드 안에 무질서하게 흩어진 알파벳에서 단어를 찾는 게임이 있다. 제시된 단어를 찾기도 하고, 과일이라는 주제가 있다면 apple, cherry, lemon 등을 찾아내면 된다. 가장 먼저 보이는 단어 세 개가 내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라는 그럴듯한 제목이 붙기도 한다. 나는 love, courage, hope 같은 단어를 먼저 포착해 내길 바라면서 다른 단어들을 찾아놓고도 흐린 눈 하기도 했다. 흐트러진 알파벳 더미에서 차례로 늘어진 l과 o, v와 e를 찾기보다 대문자로 크게 쓰고 말걸.


다행스럽게 그런 게임에 숨어있는 단어를 찾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그리기를 선택한 사람도 있다. 디터 로스는 단어 찾기 게임을 연상시키는 쉼표로 가득 찬 그리드를 만들고 그 사이에 하트를 그렸다.

 

Dieter Roth, Stupidogramm, 1962



콘크리트 포에트리(Concrete Poetry)는 콘크리트같이 삭막하고 딱딱한 시(詩)라고 짐작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단어나 문자 조합으로 그 내용과 시각적인 이미지를 함께 전달해 주는 시 형식을 말한다. 여기서 콘크리트 concrete는 '추상적인 abstract'의 반의어로 '구체적인, 사실적인'이란 뜻으로 쓴다. 시의 내용이 추상적인 의미에 머무르지 않고 시각적으로 실체화된다는 개념이다. 1950년대 독일에서 유행하기 시작해 60년대 말까지 활발하게 쓰였고, 광고 디자인 등에 그 형식이 차용됐다. 침묵을 뜻하는 'silencio'를 줄지어 배치하고 가운데는 공백으로 비워 침묵의 의미를 시각화한 오이겐 곰링어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Eugen Gomringer, silencio, 1954


언어와 시각적인 요소가 동등하게 전달되며, 보는 사람의 감각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된 몇몇 미술가들도 콘크리트 포에트리를 즐겨 썼다. 그중 하나가 디터 로스인데, 로스는 직접 단어와 형태를 결합시킨 시를 쓰기보다 쉼표 그리드가 인쇄된 책을 만들어서 마치 낙서노트처럼 어떤 페이지에는 쉼표 사이로 연필이나 펜으로 주전자를, 나비를, 찻잔 따위를 그리고 일련의 작업 전체에 <Stupidogramm>이라고 이름 붙였다. Stupid / -gram을 합친 말로 바보같이 그리기, 무의미한 쓰기 정도의 유머가 있는 제목이다.


Dieter Roth, Stupidogramm, 1962


보다 더 하트 모양처럼 그렸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부푼 동그라미를 바늘로 쿡 찌른 모양이면 도상적으로 하트니까 나는 이 두 페이지를 하트라고 읽기로 했다. 완벽히 균형이 맞는 하트가 아니라서 더 애정이 가는 것 같다. 쉼표가 내포하는 망설임 같은 침묵 속에서 서투르지만 한 번에 그린 사랑의 기호. 사랑을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탁월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사랑을 보여주기보다 말하기가 어렵고, 말하기보다 보여주기가 어렵기도 해. 돌아보면 대부분 전자를 어려워했다. 아끼는 사람들에게 하트 이모티콘을 말끝마다 붙이는 습관도 그래서인 것 같다. 사랑을 표현하는데 말로 하느냐, 보여주느냐는 난이도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과 상황에 따라 적합성을 따져야 할 문제이겠지만 일단 나는 하트 이모티콘에 숨겨둔 다양한 층위의 사랑을 명료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손실 없이 사랑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낸 사람들이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그대를 여름날에 비견해서, 예이츠는 꿈결로 만든 카펫을 발 밑에 깔아드리겠다고, 브레히트는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므로 빗방울에라도 살해되서는 안되었다고 필사적인 사랑의 말을 남겼다. 이런 말들은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서 널리 인용되면서 살아남아왔다. 내가 느끼는 걸 너도 느꼈으면 좋겠어. 내가 말하는 걸 네가 정확히 알았으면 좋겠어. 콘크리트 포에트리도 마찬가지로 모든 예술의 기원은 이런 마음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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