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고도 없는 베를린에 살러 갔던 첫날, 그 날씨를 아직도 기억한다. 해가 좋았고 기온은 따스했고 플라타너스 씨앗인지 꽃가루인지 모를 것들이 둥둥 떠다녀서 그렇잖아도 낯선 도시가 몽환적으로 느껴졌다. 모처럼 스토리가 탄탄한 꿈을 꾸고 막 깨어서 이 꿈은 꼭 기록해야 한다고 되뇌는 것처럼 공항에서 렌트해 둔 집을 찾아가던 피로한 길에 나는 이 날을 날씨와 함께 오래 머릿속에 박아놔야 한다고 생각했다. 멍한 정신으로 적어둔 꿈 메모를 다시 보면 엉망진창인 것처럼 사실 그날 기억도 뒤죽박죽이야. 그렇지만 내가 대체 여기 왜 왔지 하던 뒤늦은 의문이 그 온화한 날씨 덕분에 여긴 틀림없이 내가 사랑하게 될 거라는 확신으로 바뀌던 순간이 분명 있었다. 로니 혼 Roni Horn이 말했듯이 날씨와 관련된 이야기는 어느 누구라고 갖고 있기 마련이니까 만약에 그 여자가 물어보면 나는 완전한 이방인이 되었던 그날을 꼽을래.
Roni Horn, Weather Reports You, 2007 / republished in 2022
로니 혼은 물이나 날씨와 같은 가변성이 특징인 소재에 천착한 작업들을 많이 했는데, 날씨와 관련된 사적인 이야기를 수집해서 책으로 만들기도 했다. 프로이트가 '날씨에 대해 말하는 건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했던 데서 착안한 <날씨는 당신을 예보한다 Weather Reports You>(2007)라는 아카이브 작업이다. 로니 혼은 아이슬란드의 불안정한 지각 활동으로 급변하는 기후에 매료된 나머지 거기 사는 사람들에게 날씨와 관련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단다. 어떤 애는 맑은 날의 바깥 풍경을 찍은 사진과 함께 '나는 맑은 날이 좋아요. 농구를 할 수 있으니까.'라고 적었고, 험한 바다를 숱하게 겪은 어부는 푸른 바다 사진을 보내며 '나는 해가 좋으면 항상 설레기 시작하고 바로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자신은 현실적인 사람이라 날씨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영하의 차가운 공기보다는 따뜻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날을 좋아합니다.'라고 쓴 사람도 있었다. 모두가 아는 날씨라는 매개를 통해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날씨는 일상과 감정, 기억에 영향을 미치는 걸 넘어서 개인의 삶에 깊숙이 침투하고 정체성을 형성하기도 한다. 그러게 일기장에 날씨를 구태여 기록하고 사람들이 괜히 날씨 얘기로 운을 떼는 게 아니라니까.
그런데 기억하는 베를린 첫날은 종일 날씨가 좋은 몇 안 되는 날 중에 하나였고 사실 베를린 날씨는 변덕스러웠다. 아주 맑다가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갰다가 폭풍같이 바람이 불었다. 날이 맑으면 들뜨고 흐리면 답답하고 비가 오면 울적해. 날씨에 따라 행동반경과 기분의 폭이 달라지는 나에게는 괴로운 날들이었다. 겨울엔 해가 두세 시쯤엔 져버려서 우울감이 더했다. 빨래에 말을 걸고 오븐과 대화하는 빈도가 늘어날 때쯤 이미 알콜릭이 돼서 하루에 와인 한 병을 비웠다. 어떤 날은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에 홀로 사는 노인이 되어버린 내가 사람이 많은 카페에서 동전을 일부러 요란하게 떨어뜨리고 흩어진 걸 주워주는 사람들의 친절에 기대곤 했다는 부분에서 한참 울기도 했다. 그건 겨우 첫 장이었고 가장 슬픈 부분이 당연히 아니고 비약적인 해석이 곁들여졌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야행성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해를 못 보면 사람은 미치겠구나 하는 걸 그때 이해하게 됐다. 날씨는 시시각각 변하는데 겨우 그런 거에 영향을 받아서 어쩌겠다는 거야. 아무튼 요즈음 장마가 힘들다는 얘기다.
그래서 서점을 돌아다니다 『대기 불안정과 그 밖의 슬픈 기상 현상들』을 발견했을 때 반가웠다. 날씨와 슬픔을 상관한 제목을 쓰는 소설의 존재만으로 유난하게 날씨를 타는 기질이 위안받는 것 같았다. 해양성 고기압들의 충돌과 정체로 인한 초여름 우기, 열대성 저기압에 의한 태풍, 한랭전선이 만든 적란운에서 비롯한 소나기들을 슬픈 기상현상으로 마땅히 여길 수도 있는 것 같잖아. 소설 내용은 제목만큼 감상적이지만은 않다. 어느 폭풍우가 치던 밤,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 레마가 아니라 똑같은 가짜 레마가 귀가하면서 시작된다. 사랑하는 레마의 모든 모습을 다 알고 있는데, 돌연 나타난 도플갱어는 제법 진짜 같으면서도 어딘가 달랐다. 주인공은 진짜 레마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고 자신이 알지 못했던 레마의 파편들을 수집한다.
현재 날씨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내일 혹은 한 시간 후의 날씨 예측조차 불가능할 수밖에 없음을, 날씨의 불가해성에 인간의 내면과 사랑의 본질을 빗댄 작품이다. 나는 너를 알지만 너를 모르고, 나는 사실 나도 잘 모르기 때문에 너를 더욱 몰라. 그러나 서로를 읽으며 생기는 오류와 왜곡은 반복을 거듭해야만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과학자의 태도를 거듭 강조한다. 이 책에서 자주 언급하는 기상관측 기구인 도플러 레이더의 효용성 측면에서 다시 말하면 '왜곡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보다 정확한 결과에 가까워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감정과 관계는 완벽한 이해를 전제하지 않으며 그 불확실하고 불완전함 속에서 서로를 알아가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작가가 가장 첫 장에 인용해 둔 질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에 의하면 '사랑하는 이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의 가능 세계를 표현하며 …… 그것은 해독되어야 한다'.
실제로 날씨를 표현하는 말은 사람의 성격을 묘사하는 단어와 많이 겹친다고 한다. 그 예측할 수 없음과 끝없이 변화하고 속단하기 쉽다는 성질까지도 유사해. 로니 혼은 아이슬란드의 여름 야외온천에서 한 여자의 얼굴을 연속 촬영해 <당신은 날씨다 You are the Weather>(1994)라고 이름 붙여 전시하기도 했다.
Roni Horn, You are the Weather / part of installation, 1994-96
비슷한 크기로 클로즈업한 초상사진 100장이 벽에 붙는다. 빛과 물그림자, 물안개가 교차하는 여자의 얼굴들은 비슷하지만 다르고 같다고 할 수 없다. 흐린 날 물에 잠긴 여자의 표정들은 슬프거나 섬뜩하게 날서보이고 햇빛 아래에선 맑고 차분해 보인다. 하나의 얼굴을 꼽을 수 없는 너무도 다양한 너는 그래서 날씨라고. 여자의 달라지는 표정을 알아차리며 전시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내가 이 여자의 표정을 바꾸고 있는 건 아닌가 할 거야. 더욱이 미묘하게 변하는 여자의 얼굴이 나를 반영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 작품 제목을 이해하게 될 거다.
오늘은 날이 맑으니까 좋은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다거나 흐려서 우울할까 걱정된다고 종종 적어 보내던 친구가 있었다. 어쩔 줄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에 우리는 각자의 생일과 연말에도 인사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나에게 그렇게 사소하고 다정하게 안부를 물어오는 기상캐스터는 없었어서 가끔 생각이 나. 내가 본 건 변덕스럽고 복잡한 그 애의 일면이었을 텐데. 시간이 해결해 주는 건 그렇게 많이 없다는 걸 아는데도 이런 업보를 청산할 날이 자연스럽게 오게 되면 좋겠다고 바라게 된다. 어떤 날씨에도 무딜 만큼 뭉툭해지면 언젠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