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모르겠어. 몰라. 이건 생각의 씨앗이 심겨 삽시간에 자라나 이리저리 번지고 엉킨 생각덩굴을 끊어내는 말이다. 내게는 주문 같은. 그 말을 내뱉고 나는 빠르게 다른 생각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모르겠다는 말로 떠넘긴 생각들은 없어지지 않고 고스란히 부채로 남는다. 종종 머리를 무겁게 만드는 부채감은 생각을 제대로 파고들어 종결시키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라. 내 안에 무슨 연유로든 심긴 어떤 생각들은 정리되기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유수의 철학책들을 보면 주제에 대한 사유가 끝나는 게 가능한 거냐고 묻고 싶어져. 내 머릿속은 얕은 생각덩굴이 지천에 널려있는 모양새인데 여기서 무언가를 캐내는 깊은 사유가 가능할까? 모르겠다.
모르겠다고 말하는 건 내 말버릇으로 번져서 때때로 핀잔을 듣기도 하는데 정말 모르겠어서 억울하기도 해. 생각이 안 끝나서 나도 모르는 일이에요. 왜 모르냐고 누군가 집요하게 묻는다면 사실 어떤 걸 모른다고 하는 이유는 우치다 타츠루 선생에 의하면 대개 하나뿐이다. 알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생각을 하면서도 그것 만을 피해서 생각해야 하니까 이건 부단한 노력의 결과인 것도 맞다. 그래서 가끔 나는 무엇을 모르고 싶은지 생각하면 민낯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괴로웠다. 내가 알고 싶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과정은 유쾌한 일도 아니다. 혼자서 지루한 숨바꼭질을 해야 하므로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 거라고.
지지난 밤에는 사랑을 나눴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볼 때
어제까지 나는 인간이 확실했었으나
오늘은 잘 모르겠어
그래서 심보선의 시 「오늘은 잘 모르겠어」 를 발견했을 때 기뻤다. 불확실의 결론이어도 괜찮다는 메시지로 읽혔기 때문이다. '어제까지 나는 인간이 확실했었으나'라는 구절이 앞에 나와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감정에 매몰되어 있던 어제의 내가 낯설게 느껴지는 기분을 잘 알겠기 때문에. 나도 내가 낯설어서 내가 인간인지도 의심되어 잘 모르겠는 상황인데 그럼 나와 사랑을 나눴던 너는? 너도 아마 똑같지 않을까. 그렇게 화자는 너에 대한 의심과 불안을 충분히 피울 수도 있는데 오늘은 잘 모르겠다고 불확실을 수용했다. 너도 나처럼 그럴지 모르겠다는 불안을 지느니 내일은 알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게 너를 믿는 방식이기 때문이야. 이건 불안보다 불확실을 선택한 거라고 생각해. 나쁜 가능성을 예측하고 감정에 휘말리기보다 지금 당장 모든 답을 알 필요가 없다는 여유를 남겨둔 것이다.
모르고 싶은 건 피해야 마땅하니까 저택에서 오래 안 쓰는 가구를 흰 천으로 덮어두는 이미지 트레이닝도 빌려 오는데 꼭 그렇게 덮어서 꽁꽁 싸매고 이건 뭐게 묻는 작품들도 있다. 나는 크리스토와 클로드 부부의 덮어 싸는(wrapped) 작품들을 매우 좋아했다. 이들은 초기에는 소포나 구두 같은 작은 물건들을 덮기 시작해 점차 사람, 계단, 바닥을 감싸더니 나중엔 베를린 국회의사당, 파리 개선문 같은 대형 건축물까지 흰 천으로 덮고 동여맸다. 심지어 호주의 한 해안절벽을 덮었고, 마이애미의 11개 섬 주변을 핑크색 천으로 감싸 낯선 스펙터클을 만들어냈다. 크리스토는 2006년에 우리나라에 와서 불국사를 싸버리고 싶다는 말도 했다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불국사는 석조도 아닌데 되겠냐고요..
크리스토는 분명히 그 자리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은폐함으로써 본질을 감춘다. 이 간단한 방법을 일관적으로 작품에 적용한 게 좋았다. 눈앞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모순을 마주한 우리는 그 사물과 풍경의 진짜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고 가늠하게 된다. 더욱이 이 은폐 방식은 매어둔 끈을 풀고 덮은 것을 들춰내기만 하면 되는 잠정적 중단일 뿐이다. 한시적으로 이 은폐를 즐기고 언제든 본질로 복귀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모르겠다는 말로 순간을 모면하면서도 재탐색할 기회를 남겨두는 것과 비슷하다. 보이지 않아도, 일부를 모르고, 하물며 알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도 본질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렇다는 걸 알고 있으면 얼마든지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나갈 수 있으니까.
어쩌면 불확실과 모호함 속에서만 서로를 느끼고 어루만질 수 있는지도 모른다. 마그리트의 <연인들>에서 두 사람의 얼굴은 천으로 가려져 서로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단절된 상태이지만, 그들은 기꺼이 밀착해 포옹과 키스를 나눈다. 내 앞의 상대를 완전히 알 수 없지만 서로를 확인하고 관계를 지속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그래서 이 그림은 사랑의 속성과 한계를 보여주는 거 같기도 해. 그도 그럴 것이 '모르다'의 반대말은 '알다'인데 사랑을, 감정을, 사람을, 나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몰이해를 안다고 할 수는 없어서 모른다의 귀결이 안전하다고 느낄 때도 더러 있는 것 같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제목을 짓고도 신형철은 정확한 사랑이 뭐냐는 질문에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던 것을 또다시 위안으로 삼는다. 어쨌든 나는 오늘도 잘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