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그런 곳
나는 낭만이 넘쳤던 파리를 뒤로하고 스위로 가는 기차 TGV를 타기 위해 이른 아침 리옹역으로 향했다. 1달 유럽 여행인 나는 유레일패스를 사 왔고 이 패스를 처음 개시할 때는 역 창구에서 사인이 필요하다기에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1시간 정도의 여유를 두고 일찍 리옹역에 갔다. 리옹역에서 도착하여 역 창구를 찾기 위해 빠르게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한국과 다른 프랑스의 기차역은 너무 낯설었고 평소 방향감각이 전혀 없는 나는 당황한 나머지 역 창구를 찾는데 꽤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그리고 기차가 출발하기까지 30분이 남은 시점에 나는 드디어 한 층 아래 지하에서 티켓 오피스를 찾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디든 티켓 오피스는 메인 입구에, 기차 타러 들어가는 입구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리옹역의 티켓 오피스가 기차 타는 곳과는 전혀 관계없는 지하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겨우 도착한 티켓 오피스 앞에는 대기가 그다지 길지는 않았지만 직원은 단 2명이었고 마음이 너무 조급했다. 그렇게 조급한 마음을 안고 기다리던 와중에 예상치 못하게 티켓 오피스 앞에서 4,5명 정도의 젊은 한국인 여행자들과 창구 직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고 그 실랑이는 제법 길어졌다. 내용인즉슨, 그 한국인 무리는 열차를 놓쳤고 가격이 워낙 비싼 티켓이다 보니 티켓을 환불받거나 다음 열차로 교환하고 싶었던 것이다. 말이 되지 않는 억지였고 역시나 프렌치스러운 그 직원은 시크하게 무시했다. 나에게는 시간이 15분도 남지 않은 상황에 내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고 발을 동동 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본 내 앞에 외국인이 감사하게도 순서를 바꿔주었지만 결국 나는 그 실랑이하는 무리 덕에 미리 예약한 TVG를 놓치게 되었다. 새로 티켓을 사야 했는데 7월에 성수기였던 터라 티켓은 아주 비쌌고 심지어 1등석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88유로를 주고 기차표를 다시 샀으며 완벽했다고 생각했던 파리의 여행의 끝을 망친 것 같아 너무 화가 났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풍요롭지 않은 당시 나의 유럽여행 중에 88유로는 너무나 큰돈이었다. 그렇게 화가 난 채로 나는 스위스로 가는 기차를 타게 되었다.
기차에 탄 뒤에 나는 심호흡을 하며 긍정적으로 생각을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생각해보면 파리에서 소매치기 한 번 안 당하고 크게 나쁜 일 격지 않았고 단지 88유로를 잃음으로써 앞으로의 여행을 더 조심하고 긴장할 수 있게 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또한 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여행에서는 여유시간으로 1시간은 부족한 시간임을 깨닫게 된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그렇게 스스로의 감정을 컨트롤하며 몇 시간을 달리니 스위스에 점점 가까워졌고 기차 창밖의 풍경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어느 도시를 지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처음 본 스위스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을 보니 리옹역에서의 일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마음에 힐링이 찾아왔다. 이미 벌어진 안 좋은 일 그리고 이미 지난 일, 그 지난 일의 안 좋은 생각 때문에 내 지금의 여행과 앞으로의 여행을 망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너무 편안해졌다. 마음이 편해지니 나는 풍경 감상에 젖었다. 창밖에 보이는 알프스 산맥과 에메랄드 빛 호수를 보니 내 마음은 이미 행복으로 넘치고 있었고 스위스 여행의 기대감으로 물들었다. 놓쳤던 기차와 88유로를 넘치게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정말 아름다웠던 스위스와의 첫 만남. 스위스의 풍경은 나에게 선물이었다.
그렇게 우여곡절과 스위스의 힐링을 받으며 드디어 나의 두 번째 목적지 인터라켄에 도착했다. 내가 인터라켄을 여행지로 정하게 된 것은 정말 단순하게 도시 이름 때문이었다. 인터라켄은 'Interlaken 말 그대로 호수 사이에 있는 곳'이라는 뜻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호수 사이에 있다는 그 이름이 매력적이었고 그런 이유로 스위스의 여행지로 선택하게 되었다. 툰과 브리엔츠 호수 사이에 위치한 인터라켄은 시내에 에메랄드그린 빛의 아레강이 쭉 흐르는데 이 풍경이 인터라켄의 진정한 매력인 것 같았다. 나는 인터라켄 동역에 바로 위치한 인터라켄 호스텔에 숙소를 잡았는데 역시 스위스는 독일의 영향인지 아주 깨끗하고 깔끔했으며 알프스에서 내려오는 아레강이 바로 보이는 좋은 곳이었다.
숙소에 들어가 체크인을 하고 짐을 정리한 뒤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한적한 마을에 기찻길과 그 옆에 에메랄드 빛 아레강이 흐르는 풍경이 그야말로 힐링이었다. 그냥 보기만 해도 혹은 걷기만 해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 있다. 사람들은 보통 힐링을 하기 위에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데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힐링이라는 말. 그 말에 딱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이번 숙소에서도 나처럼 유럽여행 중인 한국인 두 친구와 방을 함께 쓰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서로 어디 사는지 나이, 학교 이런 것들을 하나도 몰라도 먼 유럽 땅에서 모두 여행을 하고 있다는 공통점 하나만으로도 친구가 된다. 서로 다녀온 여행지 정보를 나누고 느꼈던 감정과 감성을 나눈다. 타지에서 누군가를 만나서 사귄다는 것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며 이게 바로 여행의 묘미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터라켄에 도착한 첫날, 같이 방을 쓰는 친구들과 각자 가져온 식량을 저녁으로 먹었다. 스위스는 음식이 유명하지 않고 비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한 한국인 친구와 저녁 산책을 나가기 위해 잠시 방에 들렸는데 새로운 룸메이트가 왔다. 아주 유쾌하고 재미있는 중국인 친구였다. 한국말을 아주 잘하고 한국 프로그램에 관심이 아주 많은 친구였는데 특히 런닝맨을 좋아한다는 말에 우리는 박장대소를 했다. 내 또래 정도로 보였는데 박사 과정을 위해 영국에서 공부 중이고 지금은 여행 중이라며 이야기하는데 왠지 모르게 정말 멋있었다. 사람에게는 모두 똑같은 시간이 주어지지만 사람마다 그 시간을 다르게 사용하는 것 같았다. 넓은 세상에 나오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 기분 좋은 생각을 하며 나는 한국 친구와 산책을 나갔다. 낯선 유럽에서의 밤은 다소 무섭기도 하지만 둘이나 셋이면 거뜬했다.
알프스 산에서 내려오는 예쁜 에메랄드 물길을 따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마치 꿈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여름에 만나는 저 멀리 알프스 산 위의 흰 눈, 가까이에는 에메랄드 빛 호수와 ‘여긴 스위스야!’라고 말하는 듯한 빨간 깃발과 빨간 의자가 있는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렇게 새로 사귄 친구와 재미있게 이야기하며 풍경 속에 빠져있다 보니 어느새 어둑어둑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인터라켄의 밤은 낮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유럽은 정말 주경과 야경이 각각 매우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무드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나에게는 또 다른 유럽여행의 재미였다.
한참을 걷다 보니 약간의 번화가 같은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레강 주변으로 하나둘 불빛이 켜지고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인터라켄은 아기자기한 유럽스러움과 독일의 모던함이 섞인 듯한데 그런 느낌이 파리와 다른 또 매력이었다. 캐리어가 없어도 여행자인 게 티가 나는지 손을 흔들며 반겨주는 동네 주민들과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 인터라켄은 볼 수록 매력적인 곳이었다.
마을을 지나 조금 더 번화가로 나가니 시내인 듯한 곳이 나왔다. 아주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인 줄 만 알았는데 저녁이 되니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오는 듯 가게에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음악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한국에서는 내가 그다지 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유럽에 오니 내 안에, 일상 속에서 가둬둔 내 모습이 자유를 찾은 듯 생각나는 데로 행동하고 흥이 나면 흥이 나는 데로 나는 자유롭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생각이 많은 나도, 아무 생각이 없는 나도 그리고 흥이 많은 나조차 그냥 나인 게 좋아지는 그런 곳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잠깐이지만 인터라켄 산책을 만끽하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방향을 돌렸다. 같은 길로 돌아가는데도 올 때와는 달라진 무드가 좋아서 맘껏 저녁의 아레강 길을 걸으며 사진도 찍고 풍경을 감상하며 갔다. 에메랄드 빛 아레강, 예쁜 초록의 가로수와 곳곳의 빨간 꽃 그리고 조용한 소리들은 잊지 못할 색의 산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