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hovah Aug 18. 2021

넘치는 샘, 스위스의 라우터브루넨

08 - 넘치는 샘 속에서 만났던 선물 같은 하루.


인터라켄에서 라우터브루넨으로 이동하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미리 챙기고 이 전날 숙소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아침을 먹으러 카페테리아에 갔다. 유럽에서의 아침은 거의다 빵과 시리얼이고 무언가 특별할 거 없는데도 숙소마다 새로운 느낌이다. 새로운 숙소에서 맞이하는 아침식사가 매번 설레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건 정말 여행이 주는 축복이다. 더 재밌는 건, 그럼에도 마치 유럽의 아침식사가 익숙해져 가는 느낌도 또 다른 행복감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인터라켄에서 만난 친구들 중에 융프라우에 올라가는 가는 친구들이 있어서 함께 라우터브루넨으로 출발했다. 라우터브루넨은 내가 한국에서 여행 플랜을 세울 때 여행 책자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곳인데 '라우터브루넨'이라는 이름은 'Lauter 넘치는'이라는 뜻과 'brunnen 샘' 이 합쳐져서 ‘Lauterbrunnen 라우터브루넨’ 넘치는 샘이라고 한다. 알프스의 U자 협곡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가운데 알프스 물이 흐르고 양옆의 절벽에서 72개의 폭포가 여기저기 떨어진다. 그래서 이 마을의 이름을 ‘넘치는 샘’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나는 여행 책자에서 이 부분을 읽었을 때,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무리해서 일정에 넣게 되었고 이렇게 나는 여행 책자로 기대하고 상상했던 그곳을 진짜로 가고 있다. 라우터브루넨으로 이동하는 마을 기차를 타고 언덕을 올라가는데 하늘이 너무 예뻐서 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 그 기차에는 나와 일행 그리고 어떤 할머니 한 분이 타고 있었다. 나는 우연히 그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고 싱긋 웃으니 할머니는 우리에게 혹시 ‘융프라우’에 올라가냐고 나와 일행에게 물었다. 나와 친구들은 그렇다고 대답했고 할머니는 우리에게 ‘너희는 정말 럭키걸이야!’라고 말씀하셨다. 들어보니 여기 살다 보면 이렇게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은 드물다고 현지인도 정말 만나기 힘든 날이라고 한다. 이런 날 융프라우에 올라가면 아름다운 만년설과 산이 정말 잘 보인다고 말씀하시며 기분 좋게 우리를 보고 웃으셨다. 비록 나는 파리에서 기차를 놓친 덕에 예산을 초과하여 융프라우에 올라가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조금 속상했지만, 단 하루를 보내는 라우터브루넨에서 아주 예쁜 날씨를 만난 것 자체가 너무 행복했다. 그야말로 '럭키데이' 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스위스 할머니의 ‘럭키걸’이라는 그 말이 여행을 다녀와서도 유럽 여행을 기억할 때마다 아주 오래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우리가 라우터브루넨에서 만난 날씨가 아주 축복이었다는 것을 꼭 알려주고 싶었던 할머니의 마음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게 나는 기분 좋은 느낌을 안고 라우터브루넨에 도착했다. 라우터브루넨은 기차역과 마을 중심이 바로 붙어있는, 어디든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입구부터 벌써 풍경이 영화나 여행 책자에서 보던 아주 전형적인 진짜 ‘스위스’였다. 입구의 빨간색 스위스 깃발과 파스텔톤의 노란 건물, 갈색 건물과 붉은 꽃들 그리고 넓은 들판까지. 숙소까지 걸어가는 길 내내 나는 입가에서 미소가 꺼지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늘 상상해왔던 스위스 클리셰가 바로 ‘라우터브루넨’이었다.





낯선 길이었지만 마을이 작고 건물이 몇 개 없어서 숙소는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나는 방향치에 종이 지도만 보고 다니니 약간의 시간은 걸렸지만 파리에서 숙소를 찾을 때 보다 훨씬 금방 라우터브루넨에 내가 예약한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라우터브루넨의 숙소는 작은 산장 같은 곳이었는데, 실외도 실내도 온통 나무로 되어 비록 눈은 없지만 마치 에베레스트산 중턱에 있는 산장에 온 거 같았다. 체크인 후 나는 주인의 안내를 받아 내가 묶게 될 방에 들어갔는데 그곳은 2층 침대가 2개 있는 4명이 함께 머무는 방이었고, 여기저기 걸린 수건과 흐트러진 캐리어와 짐들이 매우 여행자들의 숙소스러웠다. 깨끗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여행자들의 성지 같았던 그 숙소에서 나는 또 왠지 모를 설렘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숙소에 짐을 놓고 마을을 산책하러 나갔다. 지도 같은 것에 의존하지 않고 그냥 발길이 닿는 대로 걷고 싶었다. 왠지 그게 진짜 라우터브루넨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선은 초행길이니 마을 중심의 큰길을 따라 걸었고 그렇게 걷다가 우연히 언덕 뒤에 작은 폭포를 만났다. 역시 '넘치는 샘' 답게 조금만 걸어도 금방 폭포를 만날 수 있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언덕으로 빠지는 길이 왠지 폭포로 올라가는 길이라는 예감이 들었고 그렇게 나는 호기심을 가득 안으며 폭포로 가는 길이라 믿고 언덕을 올라가 보았다.





짧지만 약간의 경사가 있는 길을 올라가다 보면 길이 폭포 안으로 이어지고 어느새 나는 스위스 라우터브루넨의 작은 폭포 속에 있었다. 나는 폭포 속에서 라우터브루넨 마을을 한참 바라보았다. 물이 떨어지는 사이로 보이는 초록의 넓은 들판, 작은 건물들 그리고 멀리 보이는 맞은 편의 절벽과 더 멀리 보이는 하얀 눈 덮인 산. 폭포에 올라가니 눈앞에 뭔가 굉장한 풍경이 열렸고 이 풍경의 아름다움에 나는 무언가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이 순간 내가 보는 것들을 카메라에 담아보려 했지만 똑같이 담을 수 없었고 글로 표현해보고자 했지만 나는 이 느낌을 풍부하게 담아서 묘사를 할 수가 없을 것 같아 그냥 눈에 열심히 담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한참을 서서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 아름다운 느낌을 기억과 마음에 충분히 담는 것이 나에겐 최선이었다.





폭포에서 충분히 시간을 즐긴 뒤에 언덕을 내려와 이번엔 큰길이 아닌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큰길로 너무 멀리 가면 왠지 해가 지고 돌아올  같은 약간의 무서운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폭포 언덕에서 내려오는 길에 눈앞에 무언가 예쁜 정원 같은 것이 보였고  꽃들의 색감에 끌려서 가보니  정원은 작은 공동묘지였다. 정말 신기하고 재밌던 것은 내가 느끼는 공동묘지의 분위기는 보다 으스스하고 칙칙한 느낌인데 이곳의 공동묘지는 빛나는 작은 정원 같았다. 예쁜 붉은 꽃들과  묘지의 꽃에 물을 주는 스위스 아저씨 그리고 밝은 햇살,  모든 풍경이 나에겐 새로운 문화였다.





새로운 문화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며 나는 초록 들판과  개의 집이 있는 마을 안쪽으로 걸어갔다. 가다 보니 마을 중간에 맑고 작은 시냇물을 발견했는데  시냇물이 사람들이 사는  앞뒤로 가까이 흐르는 것이 정말 재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왠지 맨발로 걷고 싶어 졌다. 그렇게 나는  마음이 끌리는 대로 신발을 벗어서  손에 들고 맨발로 마을 가운데 흐르는 물길을 따라 계속 걸어보았다. 알프스에서 흘러 내려오는 작은 줄기를 끼고 앞집 뒷집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이  귀여웠다. 그리고 나는 어느  하얀 벽과 창가에 붉은 꽃이 있는 작은  뒤에 멈춰서 시냇물에 발을 담가 보았다. 물에 발을 담그고 나니 앉아서 쉬고 싶어져 바지가 젖든 말든 시냇물  잔디에 털썩 앉아보았다. 너무 아름다운 풍경 속을 걷는 행복에 취해 얼마나 걸었는지도   없었고 다리가 아픈 느낌도 전혀 없었는데 발은 꽤나 지쳐있었는지 물에 담그니 발이 드디어 쉼을 얻는 느낌이 들었다.





오후가 되자 꽤나 더워졌고 나는 조금 쉬고 싶어서 마을 가운데 있는 한 교회에 들어갔다. 정말 신기한 건 유럽은 어느 교회를 가도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주 시원하다는 것이다. 건축의 신비함이다.

초록의 예쁜 마을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있는 단아한 하얀 교회. 그리고 아무도 없어 아주 고요했던 교회 안. 더운 열기를 식히며 눈을 감고 잠시 누우니 잠이 솔솔 내려앉는 그런 시원하고 평온한 공간이었다.





그렇게 축복 같은 날씨 속에 짧디 짧은 하루를 라우터브루넨에서 보내며 유럽 여행 중간에 에너지를 꽉 충전한 느낌이었다. 라우터브루넨을 걸어 다니는 내내 이 아름다운 곳에 꼭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와야겠다는 다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혼자만 보기에는 너무 아까운 정말 보석 같은 곳이다. 그리고 나는 교회에서 약간의 낮잠을 자고 나와 숙소 옆에 넓은 하이디의 알프스 언덕처럼 생긴 초록 언덕에서 떼굴떼굴 굴러도 보고 사진도 찍고 누워서 풀냄새도 맡으며 스위스의 라우터브루넨을 맘껏 즐겼다.





관광 명소나 박물관 하나 없이, 예쁜 카페나 식당 하나 없어도 자연 자체가 이렇게 재미난 놀거리가 되고 행복한 기억을 만들어 줄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는 감동. 유럽에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 많지만 라우터브루넨은 자연이 주는 축복을 알게 해 준, 나에게는 그런 곳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에메랄드빛 호수 사이에서 만났던 스위스 인터라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