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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hovah Sep 01. 2021

불운을 지나고 만난 선물, 소렌토

09 - 낡은 사철을 타고 비로소 만나는 이탈리아 남부의 보석


나의 유럽 배낭여행 중 잠시의 쉼을 위해 스위스에 들렀었고 너무나 아름다웠던 인터라켄과 라우터브루넨에  아쉬움을 가득 남기며 다음 목적지인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떠날 준비를 했다. 정확하게는 이탈리아 남부로 가기 위해 밀라노를 들리는 여정이었다. 이탈리아로 출발하기 전날 밤 나는 엄청난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이번에는 기차를 잘못 예약했던 것이다. 국제선 기차는 출발하는 나라의 기관에서 기차를 예약해야 하고 나는 스위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가야 하니 스위스 기관에서 예약해야 하는데 그만 이탈리아 기관에서 열차를 예약한 것이다. 고로 내가 한국에서 예약해온 스위스-이탈리아행 티켓은 이탈리아에 가야만 출력이 가능한… 말하자면 말이 안 되는, 찾을 수 없는 그런 티켓을 예약한 것이다. 늦은 저녁 너무 당황한 나머지 독일에 사시는 지인분께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새까매졌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지인분은 이리저리 알아보시더니 유레일 패스로 갈 수 있는, 별도 예약이 필요하지 않은 지역 열차 루트를 찾아주셨고 그렇게 나는 지인분의 도움으로 한국에서 예약해온 직행 열차 대신 몇 시간을 훨씬 돌아서 가는 지역 열차를 타고 밀라노에 가게 되었다. 그 순간 나 자신이 얼마나 싫고 화가 나던지 내 허벅지를 마구 꼬집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런 남의 속도 모르고 같은 숙소에 있는 어떤 여행객이 다 자는 밤에 전화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냐며 제발 조용히 좀 해달라고 나에게 짜증을 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행이 서툰 나는 이 모든 상황이 너무 서러워 울면서 겨우 잠에 들었다. 한국 외에 다른 나라는 모든 게 처음이었고 무엇보다 이렇게 완전한 혼자는 처음인 나에게 이따금씩 찾아오는, 온통 혼자서 이겨내야만 하는 크고 작은 역경들이 조금 버겁기도 하다. 아마 모든 게 처음이기 때문이겠지.



내가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밀라노역에 도착한 시각은 대략 오후 5,6시 즈음이었다. 여름날 오후 5,6시 즈음에 처음 만난 이탈리아의 밀라노. 첫인상은 매우 최악이었다. 스위스를 막 다녀와서 그런지 처음 맡아보는 냄새와 깨끗하지 않은 느낌, 그리고 거리는 알 수 없는 무서움이 있었다. 더 늦어지면 훨씬 무서울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와 나는 부지런이 밀라노에 예약한 숙소를 찾으러 움직였다. 한국에서 지도를 보고 예약할 때는 분명 역에 아주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했고, 내 나름은 보다 안전하고 깨끗한데 묵고 싶어서 다른 곳에 비해 다소 무리해서 비싼 호텔을 예약했었다. 밀라노역에서 만난 이탈리아의 첫인상은 좋진 않았지만 숙소는 잘 예약했을 거라는 희망으로 호텔을 찾아가는데 나의 희망은 무참하게 짓밟혔다. 머릿속에 서울의 그랜드 하얏트 같은 호텔의 입구를 그리며 길을 찾아가는데, 지도는 나를 점점 더 음침하고 깊은 골목으로 인도했고 나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졌다. 너무 다 비슷하게 생긴 건물들 사이에서 같은 장소를 뱅글뱅글 돌며 한참을 헤매다가 똑같이 생긴 베이지색 건물 중에 아주 작게 쓰인, 내가 예약한 호텔의 이름을 발견했다. 심지어 건물 전체가 호텔이 아니라 그중 4층만 호텔이란다. 그 호텔의 간판을 본 순간 내 머릿속에 ‘아 이탈리아에 괜히 왔다.’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꽉 채웠다. 이건 호텔이 아니라 여관이 자나? 그러나 실망만 한다고 상황이 바뀌진 않으니 우선 용기를 내어 건물의 벨을 눌러서 들어갔다.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고 말이다.

 
이런... 아직 시련이 끝나지 않았네. 건물에 들어가니 엘리베이터가 더 가관이었다. 미국 범죄 영화에 나올 법한 철창으로 된 엘리베이터에 수동으로 닫는 문. 4층에 도착하니 인포메이션 데스크에는 손님을 반기지 않는 직원이 체크인을 하려는 나를 인사도 없이 쳐다본다. 애써 웃으며 체크인을 하고 직원에게 호텔 이용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방으로 이동했고 나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잠갔다. 낡은 침대와 책상 그리고 깨끗하지 않은 세면대... 다시 또 울고 싶어지는 밤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너무 부끄러운 일이지만 밀라노에서 나는 여행 중 처음으로 가장 큰 두려움을 느꼈고 밀라노의 그 숙소에서 문을 잠근 뒤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우울하고 두려운 밀라노의 밤에, 아직 나의 배낭여행이 끝나지 않았지만 이곳이 아마 가장 최악의 여행지가 되지 않을까 라는 일기를 쓴 뒤 내일은 제발 행복한 여행이 되기를 기도하며 잠들었다.



암울했던 밀라노의 밤이 지나고 나는 이 여행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목적지인 이탈리아 남부로 가기 위해 밀라노역에서 나폴리행 기차를 탔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비로소 정상적으로 잘 예약한 티켓을 가지고 기차를 타게 되니 무척이나 감격스러웠다. 이탈리아는 내가 여행 책자에서 작게 보던 지도와 달리 아주 커다란 나라였고, 이탈리아 북쪽인 밀라노와 가장 남쪽인 나폴리 까지는 꽤 오랜 시간 기차로 이동해야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 밀라노에서의 두려움에 이어서 나는 나폴리가 두배는 더 무서웠던 것 같다. 나폴리는 이름은 아주 유명하지만 이탈리아에서 치안이 가장 열악한 곳이었고, 조금 웃길 수 도 있지만 당시에 나는 정말로 마피아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갈 것 같은 두려움에 꼭 먹고 싶었던 나폴리 피자를 포기하고 소렌토로 향하였다.


나폴리에서 소렌토로 가려면 나폴리 중앙역 옆에 있는 가리발디 역으로 가서 사철을 타야만 한다. 가리발디 역 사철은 유레일을 이용할 수 없는 곳이었고 역 안은 아주 음산했으며 어떤 범죄가 일어나도 아무도 쳐다도 안 볼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게 나에게 이탈리아는 점점 더 최악의 이미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내 마음 안에서의 껄끄러움과 두려움 때문에 굉장히 우울한 상태에서 소렌토행 열차를 기다리는데, 내 옆에 밝은 신혼부부를 한 쌍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여기가 소렌토행 열차를 타는 곳인가요?’ 나는 그들에게 나도 여기가 처음이고 잘은 모르지만 나 역시 이곳이 소렌토행 기차를 타는 곳이라고 믿고 서있다고 제발 내가 맞길 바란다고 농담투로 말했다. 그렇게 우연한 만남으로 같이 소렌토행 열차를 기다리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신혼부부는 아일랜드에서 왔고 지난주에 결혼했으며 신혼여행 중이라고 로마에서 5일을 보내고 소렌토에서 5일을 보낼 예정이라며 그들의 일정을 신난 듯 나에게 말했다. 대충 편안한 티셔츠에 청바지를 대학생처럼 입고 낡은 캐리어에 걸터앉아서 매우 행복한 얼굴로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나는 너무 보기 좋았다. 호화로운 신혼여행이 아닌 배낭여행 같은 신혼여행을 하는 이 커플이 너무 멋져 보였다. 아주 우울한 이탈리아 여행의 시작에서 우연히 만난 한 밝은 커플은 감사하게도 스쳐가는 나에게 행복을 선물해줬고 다시 여행의 설렘을 되찾게 해 주었다. 이렇게 행복한 커플이 기대하며 가는 소렌토는 분명 정말 좋은 곳 일거라고 생각이 들면서 다른 사람의 행복 에너지가 얼마나 주변을 밝게 만드는지 새삼 깨달았다.  

기차 안에서는 또 한 가족을 만났는데, 가족여행을 가는 중인 듯 딸은 들떠서 까불까불 거리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엄마는 그런 딸이 매우 사랑스러운 듯 계속 껴안고 뽀뽀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런 부인과 딸이 너무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아빠가 있었다. 좁고 허름한 기차 안에서 가족 셋이서 껴안고 장난치고 어찌나 행복해 보이는지 나까지 덩달아 미소 지어졌다. 나는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그들에게 사진 한 장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고 그들은 아주 흔쾌히 기분 좋게 허락해주었다. 소렌토행에서 잠깐 만난 밝은 신혼부부와 한 가족에 대한 이 행복한 기억이 지금에도 이탈리아의 기억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추억이다.



그렇게 스위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오는 길 내내 만났던 불운을 지나 어렵게 도착한 이탈리아 남부 소렌토. 낡은 사철을 타고 도착한 소렌토는 정말 아름다웠다. 밝은 햇살이 가득했고 활기와 에너지가 넘치는 아주 매력적인 항구도시였다. 다만, 안타깝게도 소렌토에서 내가 예약한 호스텔은 소렌토 역이 아니라 한 정거장 전인 산타니엘로 역이었고 이제는 그저 어이없는 웃음만 날 정도로 나의 숙소 예약의 실수는 계속 이어졌지만 바다와 가까운 남부 지역은 모든 마을이 작고 아기자기했으며 걷는 모든 길에 남부에서만 볼 수 있는 예쁜 꽃들이 너무 좋아서 모든 불운을 상쇄시키는 듯했다.



산타니엘로 역에 내가 예약한 숙소는 소렌토와 조금 멀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매우 깔끔했고 무엇보다 오전에 밀라노역에서 빵 한 조각 말고는 아무것도 못 먹은, 매우 허기지고 지친 나에게 복숭아를 나눠준 한국 친구를 만났다. 그렇게 잠깐 에너지를 충전하고 나는 숙소에 대충 짐을 넣어둔 뒤에 서둘러 소렌토를 구경하러 나갔다. 1박은 너무 짧았고 파리나 라우터브루넨과는 다른 매우 이국적인 풍경의 소렌토가 나는 무척이나 기대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진짜 소렌토 역에 도착하니 역시 유명한 관광 도시답게 산타니엘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으며 또한 레몬이 유명한 도시답게 아주 분위기가 발랄하고 상큼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소렌토를 다시 떠올리면 마치 레몬 냄새가 나는 듯한 느낌이다. 나는 소렌토 역에서 나눠주는 관광지도를 받아서 펼쳐보았고 지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곳은 마을 한가운데 있는 레몬 농장이었다. 일단 가자! 레몬 농장으로!



7월의 레몬 농장은 주렁주렁 노랗게 레몬이 많이 열린 것은 아니었지만 내 인생에서 처음 만나보는 레몬 농장이라는 것이 그저 좋았고 초록과 노랑의 색감과 레몬향기가 가득한 그곳이 매우 기분 좋았다. 농장 안으로 계속 걸어 들어가면 작은 매대에서 특산물이나 기념품을 파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직원이 나에게 활짝 웃으며 ‘레몬~ 첼로~’라고 무언가 마실 것을 권유했다. 이탈리아어를 잘 몰라서 나는 사라고 권하는 줄 알고 처음엔 괜찮다고 손짓하였으나 옆에 다른 관광객이 와서 즐겁게 마시는 것을 보고 그제야 무료 시식임을 눈치챘다.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매우 목이 탔었던 터라 냉큼 나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주인이 나에게 '레몬 첼로'라는 것을 주고 내가 마시기 시작하자 그제야 주인이 ‘알코올! 알코올!’이라고 뒤늦게 말했다.

웩, 술이었다! 내가 너무 써서 컥컥 거리며 괴로워하자 옆에 있던 외국 관광객 부부와 직원이 엄청 웃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Limoncello’는 레몬 술이었다. 헤롱헤롱 했지만 홀로 여행에서 만나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즐거운 만남, 제법 재밌는 경험이었다.  



그렇게 레몬 농장을 한 바퀴 돌면 레몬 슬러쉬를 파는 곳이 나오는데 내가 목이 말라서 주변을 맴도니 슬러쉬를 팔던 사람이 나보고 안에 들어와서 구경하라며 손짓했다. 그 직원이 권유한 곳은 레몬 첼로나 레몬 잼 같은 것을 만드는 작은 공장이었다. 그 공장 안에는 한 동양인 직원이 있었는데 그 동양인 직원이 나를 반가워하며 거기 있는 직원들을 소개해주고 농장 주인과 매니저 그리고 귀여운 점박이 농장 강아지도 소개해주었다. 아마 같은 동양인을 만난 자체가 반가웠던 것 같다. 그저 지나가는 관광객이었을 뿐인데 같이 사진도 찍고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서로 깔깔 웃으며 잠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내가 만났던 소렌토의 레몬 농장은 아주 활기가 넘치는 유쾌한 농장이었다. 매우 소렌토스럽게 말이다.



그렇게 나는 레몬 농장을 충분히 즐기고 나와서 작은 소렌토 마을을 여기저기 걸어 다녔다. 나름 큰길처럼 보이는 길을 따라 쭉 걸어가면 비토리아 광장이 나오는데 눈앞에 시원한 쪽빛 바다가 펼쳐지는 광경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시야가 열리는 순간 소름이 돋았었다. 그 와중에 또 재밌는 것은 이제는 유럽에서 광장에 개념에 굉장히 익숙해졌고 대략 보면 표지판이 없어도 어디가 광장인지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제법 유럽 여행을 마스터한 느낌이 괜스레 좋다.



나는 소렌토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복숭아로 달랬던 배가 다시 허기가 지기 시작했고 드디어 이탈리아의 피자를 맛볼 기회가 찾아왔다는 생각에 또 한 껏 들뜨기 시작했다. 어디를 갈까 매우 고민하다가 바다가 보이는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바다가 바로 보이는 자리에 앉아 피자를 주문했다. 이탈리에 남부에 왔다면 당연히 마르게리타 피자를 먹어야 하고 소렌토라면 레몬주스를 먹어야지 라는 클래식한 생각으로 마르게리타 피자와 레몬주스를 시켰고 역시나 소렌토의 바다에서 먹는 그 피자맛이 얼마나 환상이었는지 모른다. 느끼한 이탈리아의 웨이터들이 잠시 잠깐씩 찾아와 말을 걸어오는 것이 약간은 불편했지만 여기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경험이라고 여기며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특등석 레스토랑에 앉아 제법 행복하게 소렌토를 즐겼다.



비록 1박의 여행이지만 다행히도 소렌토는 아주 작은 도시였고 나는 후회 없도록 소렌토 곳곳을 돌아다녔다. 파리나 스위스랑은 또 다른 분위기의 소렌토는 여름과 아주 잘 어울리는 도시였고 거리마다 관광객이 많아서 그런지 사람들이 활기가 넘쳤다.



그리고 역시 이탈리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젤라토!  마지막에 먹은 젤라토 후식은 정말 잊지 못할 것이다. 이탈리아 여행 내내 매일 젤라토 한 컵씩은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포지타노를 가기 위해 여행책자를 뒤지다가 발견하여 큰 기대 없이 가볍게 들리기로 결정한 여행지였는데, 이렇게 매력적인 줄 알았다면 며칠은 더 머물렀을 것이다. 저녁이 가까워졌고 나는 아쉬움을 꾹꾹 누르며 숙소로 돌아가야만 했다.



나의 여행 속에서 많은 불운과 두려움을 거쳐서 만난 레몬빛의 소렌토는 나에게 선물 같은 곳이었다. 소렌토를 만나고 알베르 카뮈가 말한 '여행이 가치 있는 건 두려움을 주기 때문'이라는 말이 비로소 와닿았다. 언젠가 다시 소렌토에 꼭 올 것이며 그때는 소렌토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낡은 사철도 기꺼이 즐기면서 타고 올 것이라고 다짐하며 선물 같은 소렌토의 여행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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