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내 인생에서 ‘인생 책’이라는 개념이 사라졌다. 오히려 책을 읽기 시작한 초반에는 괜찮은 책을 만났다 싶으면 ‘이건 내 인생 책이다’ 하는 생각과 확신에 가득 찼던 것 같다. 그런데 책을 오래 읽다 보니 초반에 느꼈던 ‘확신’같은 것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왜 이런 확신의 감정이 사라졌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책을 읽는 동안 그리고 다 읽고 나서 ‘와 이건 인생 책이다’ 싶은 감정이 들었을 때의 공통점은 ‘사고의 확장’을 열어줬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사고의 확장이라는 느낌은 시간이 지날수록 변화하는 개념이었다. 왜냐하면 서른 살에 어떤 책을 읽고 사고의 확장과 같은 느낌을 경험했다면 이 책을 서른네 살에 다시 읽었을 때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같은 책을 읽었지만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거나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는 성숙된 사고가 주는 자극을 느낄지 언정, 사고의 확장이 주는 신선한 충격의 느낌은 다시 경험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역량을 향상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한 번 향상된 역량은 떨어지기 어려운 것처럼 사고의 확장도 비슷하다. 사고를 확장시켜나가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이미 확장된 영역 내에서 똑같은 책이나 비슷한 책을 계속 읽게 되면 처음 느꼈던 확장의 자극을 또 느끼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사고 확장의 자극을 받기 위해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거나 책의 난이도를 올리는 등 계속해서 독서 방식의 변주를 주었기에 어느 순간부터 내 인생에서 ‘인생 책’이라는 확정적인 말을 내뱉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며칠 전 단톡방을 통해 공유된 알라딘 인생 책 이벤트를 재미 삼아 참여해 보면서 인생 책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게 되었다. 친구들과 별생각 없이 인생 네 컷 사진을 찍는 것처럼 그냥 템플릿 안에 나의 인생 책을 검색해서 넣으면 되는 그런 간단한 이벤트임에도 어떤 책을 넣어야 하나 한참을 망설이는 나를 발견하고, 이참에 ‘인생 책’의 정의부터 다시 내려보자고 생각한 것이다.
사물도 사람도 그리고 자연마저도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모든 것은 변화하기에 무언가를 고정적으로 세워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사람의 마음과 생각은 가장 변화무쌍하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쉽게 말해 ‘고인물’ 요즘 말로는 ‘꼰대’가 되기 십상이다.
가장 변화무쌍한 것이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라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생각들도 존재한다. 아니,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 계속해서 지키고 싶은 생각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이걸 ‘가치관’이라 말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가치관이라는 것도 결국 ‘생각’이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변화할 수도 있고, 유연하게 진화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지키고 싶은 가치관’이 있는데 그걸 오직 나의 머릿속에서 나온 언어들로만 표현하기 보다 오히려 책으로서 표현하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인생 책’이라는 것을 ‘지키고 싶은 가치관을 닮은 책’으로 정의하기로 했다. 책 소개, 도서 리뷰를 지겹게 해온 나지만, 오히려 나의 인생 책에 대한 리뷰만큼은 제대로 해본 적이 없고, 제대로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이 글을 적기 위해 내가 인생 책이라 선정한 책들을 다시 한번 펼쳐보고, 훑어보았지만 이 모든 내용들은 다 담을 수는 없을 것 같아 책의 내용은 모두 생략하고, 책 속에서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관을 가장 많이 닮은 단, 두 단락만 건져올려 아주 담백하게 기록해 보고자 한다.
1.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일단 의미를 찾는 데 성공하면, 그것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힘도 준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中
이 책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태도가 상황을 바꾼다’라고 정의하고 싶다. 사람이 처한 상황은 모두 달라서 타인의 입장에서 이 상황에서 이래라저래라 함부로 이야기할 수도 없다. 또한 상황이라는 것은 내가 통제할 수도 없는 요소다.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쩌면 ‘상황 탓’을 하는 것이 가장 쉬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나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신이다. 말은 쉽지만 행동은 그리 쉽지 않다.
이 책에서는 유대인 수용소라는 아주 극한의 상황에서 ‘의미와 태도’에 대해 설명하기 때문에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크게 와닿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사소한 나의 일상에 늘 이 가치관을 떠올리려고 한다. 왜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해야 하는 거야? 대신 ‘이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는 무엇일까?’로 말이다.
2.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계속하는 것,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기만 하면, 그 뒤는 어떻게든 풀려나간다.
아무리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어도, 결국은 똑같은 일의 반복인 것이다. 그렇지, 어떤 종류의 프로세스는 아무리 애를 써도 변경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프로세스와 어느 모로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집요한 반복에 의해 자신을 변형시키고, 그 프로세스를 자신의 인격의 일부로서 수용할 수밖에 없다. 아, 힘들다.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中
말보다 실행이 어렵다. 그런데 그 실행보다 더 어려운 것은 실행하지 않을 ‘절제’와 실행을 계속하는 ‘지속력’이다. 아래에서 설명할 명상록은 ‘절제’에 관한 책이고, 이 책은 ‘지속’에 관한 책이다. 시작이 반이면, 지속은 전부다. 그만큼 지속력이라는 것은 쉽게 얻을 수 없는 가치다.
사실 나는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지속력’이라는 가치에 대해 잘 몰랐다.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지루함을 견디고, 지속하는 것이 시작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사람들이 내 눈에는 더 대단하고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중 한 인물이 무라카미 하루키다. 자국인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소설가다.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그의 소설은 거의 읽어 보지 못했다. 나는 그의 소설이 아니라 그 소설을 쓰는 하루키라는 인물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꾸준히 장편 소설을 쓰면서 명성을 잃지 않는 비결은 일상의 리듬감이라 말할 수 있다.
책에서는 그 리듬감의 핵심 요소로 ‘달리기’를 말하고 있지만 하루키는 달리기뿐만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일상의 리듬을 잃지 않는다. 이 책을 처음 읽으면 그저 ‘달리기’에 관한 이야기라고 단정 지을 수도 있지만, 두 번 세 번 읽다 보면 달리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 새롭게 발견된다. 그래서 매력적인 책이다.
불필요한 것에 끌려다니지 않고, 묵묵히 자신만의 리듬을 만들어가는 삶. 계속해서 닮고 싶고, 지켜가고 싶다.
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으면 그 일을 안 할 수 있는 절제력도 함께 가지고 있다.
네게 주어지지 않은 것들을 달라고 비굴하고 무기력하게 신들을 조르는 것보다는 신들이 네게 준 능력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中
무언가를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시작과 실행’이 어렵다고 말하지만, 일단 시작하고 실행하면 그다음 난관에 부딪히는 어려움은 ‘절제와 지속’이다. 많은 사람들이 ‘꾸준한 실행‘을 강조하지만, 사실 꾸준한 실행을 하려면 꾸준하게 실행하기 위해 ‘하지 않을 것’을 버리는 것이 먼저다. 이걸 끊어내지 못하면 영원히 시작하고, 포기하는 것을 반복하기만 한다.
누군가는 이를 변주하여 작심삼일을 매번 반복하라고 말하지만 어떤 일이든 ‘흐름과 리듬’이라는 것이 있다. 작심삼일만 반복하면 리듬감을 통해 에너지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축적이라는 어마 무시한 에너지를 쌓을 수가 없다.
그만큼 ‘지속’이라는 가치에 ‘절제’라는 덕목은 엄청난 지분을 차지한다. ‘절제’는 내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한 인간을 가장 성숙하게 만들어주는 덕목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경험해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스트레스 절정의 상황인 전쟁터에서 그것도 책임이 막중한 황제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해 썼던 ‘명상록’이라는 일기를 통해 성숙한 한 인간의 내면을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다.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리더로서 닮고 싶은 인물이며, 나 또한 궁극적으로 절제를 통해 ‘지속력’과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지켜나가고 싶다.
4. 최진석 <인간이 그리는 무늬>
모든 것은 욕망 다음의 일입니다. 욕망이 없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욕망이 없는 사람은 호기심도 없고 관심도 없으니 어떤 문제의식도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과 자신의 욕망 사이의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사람은 더 헌신적이고 더 창의적일 수 있습니다.
최진석, 인간이 그리는 무늬 中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통해 최진석 교수님의 책을 처음 접했고, 사고를 확장시켜줬던 책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생 책을 선정할 때 둘 중에 어떤 책을 선택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는데 먼저 읽은 순서가 아니라 생각하고 행해야 하는 순서로 선택하자면 고민할 여지없이 <인간이 그리는 무늬>였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이 생각의 수준과 시야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중심이 되는 책이라면 <인간이 그리는 무늬>는 생각과 행동의 시작점은 자신의 욕망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중심이 되는 책이다.
뭐든 내 욕망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 언뜻 들으면 이기적인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이기심’이 지나쳐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잘못이지 내가 나를 알아주는 ‘이기심’ 자체에는 전혀 잘못이 없다.
내가 나를 먼저 이해하고, 알아줘야 궁극적으로 타인과 세상을 이해하며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자신의 진짜 욕망도 모른 채 이타적인 리더가 되겠다고, 그저 세상에 기여하겠다고 달려드는 것은 이타심이라는 개념을 근원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피상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아마 평생 공부해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100% 다 알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뭐든 시작은 '나로부터' ‘나를 아는 것’부터다.
즉, 나는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시작점은 ‘나로부터’ 파생되어 연결하는 가치관만은 지켜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