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우정과 경쟁 / 잭 플램
<세기의 우정과 경쟁> 이 책은 20세기 미술의 두 거장인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책이다. 미술사의 숨은 이야기로 잘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는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가 라이벌 관계였다는 것이다.
20세기말에 접어들면서 한때 모더니즘 혁신의 내러티브 속에서 극과 극으로 여겨졌던 위대한 화가인 피카소와 마티스는 점점 더 마음이 맞는 창조적 동반자처럼 보였다. 둘의 삶과 경력, 심지어 국적에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현장에서 남겨진 이야기는 동등하게 그들의 정열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마티스와 피카소의 개인적 관계는 우리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특정 시기의 작품들 간의 관계를 주목해야 한다.
20세기 미술의 두 거장인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의 관계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지에 대해 저자는 설명하고자 한다.
두 화가 사후인 지금까지도 피카소와 마티스는 미술계의 큰 거장이며, 최근 점점 더 그들을 직접 비교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고 종종 어쩔 수 없이 둘 중 하나가 ‘더 위대한’ 화가라고 판단해야만 하는 상황이 생긴다. 하지만 그들이 이룩해 놓은 일의 성격이 매우 다른 점을 생각하면 그 꼬리표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근거로 그런 판단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바다.
따라서 나는 피카소와 마티스가 누가 더 훌륭한 화가인지, 두 화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파악하기보다는 두 화가의 “관계성”을 통해 마티스와 피카소가 각자의 작품에 유기적으로 영향을 받은 누드화 삶의 환희, 아비뇽의 아가씨들 작품들을 분석해 그들이 어떠한 영향을 받고 지금의 작품을 제작하였는지 소개하는 글을 작성하려 한다. 12살의 나이 차이가 있지만, 비슷한 시기에 같은 나라에서 활동한 마티스와 피카소가 서로에게 어떤 식으로 영감과 자극을 주었는지 그 방법들을 탐색하고, 서로의 작품에 대한 반응이 각자의 예술에 어떻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 영향에는 그들의 후원자인 스타인가가 항상 중심에 있었다. 먼저 스타인가가 바라본 두 화가의 특징을 통해 마티스와 피카소에 대해 알아보고, 마티스와 피카소의 누드 작품 속 경향을 알아보며 그들의 대표 작품을 유기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이 글의 작은 목표이다.
후원자 스타인가를 통해 보는 마티스와 피카소
마티스와 피카소 만남의 시작점
직접적이고 서사적인 피카소의 작품에 비해, 마티스의 그림은 단순한 형상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심원하고 난해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마티스는 흔히 평범한 주제들을 다루지만 그의 기법은 작품들을 형이상학적인 단계로 끌어올린다. 마티스는 사적인 모습과 공적인 모습 간에 차이가 거의 없었으며, 그 결과 그의 예술은 사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에 대한 것은 마티스와 피카소의 생활환경과 외모 등 다양한 모습으로 알 수 있다.
1905년 가을, 거트루드는 <모자를 쓴 여인> 그림이 "색채나 해부학적인 구조면에서 매우 이상하다"라고 묘사했다. 특히 그녀는 풍부한 형상 언어가 상당히 진부한 주제를 신선하고 새롭게 만들 수 있다는 점과 독창적인 이미지 표현 방식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당시까지 잘 알지 못했던 화가인 앙리 마티스의 이 작품을 연구하면서 스타인가 사람들은 예술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추함이 아름다움을 대신하고 있는 듯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심미적인 판단의 본질은 변하고 있는 듯했으며, 또 철저히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개념이, 탁월함의 기준을 아름다움에 두는 전통적인 관념보다 훨씬 더 중요해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1905년 살롱 도톤에서 피카소는 마티스의 작품을 처음으로 눈여겨본 듯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스타인가 사람들이 마티스를 발견한 곳이 바로 살롱도 톤 전시회였다.
지난 수년간 마티스는 세잔의 후기 그림들이 갖는 막대한 함축적 의미들, 예를 들어 파편화된 작품들, 채 끝나지 않은 마무리 손질, 과도하게 형이상학적인 야심과 같은 문제들과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따라서, 피카소의 관심은 자연스레 <모자를 쓴 여인>에게 끌렸을 것이고, 모자를 쓴 여인이야말로 마티스의 대담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었으며 같은 살롱 도톤에서 본 마네와 세잔의 그림들 역시 그 점을 더 잘 납득시켰을 것이다.
<모자를 쓴 여인>을 구매한 스타인가의 리오는 두 번째로 피카소의 <꽃바구니를 든 소녀>를 구매하였는데, 마티스의 그림이 현대성의 최첨단에 있는 것처럼 보였던 반면, 그가 흥미를 가진 피카소의 작품들은 상당히 투박했으며 여전히 19세기말의 상징주의적 언어와 감수성을 띠고 있다고 느꼈다. 마티스와 피카소는 외모와 화실의 분위기에서부터 시작해 거의 모든 점이 서로 상반되는 예술가들이었다.
천부적 재능을 갖추고 있으면서 기질과 강점이 이처럼 다른 두 사람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스타인가 사람들이 처음 그들의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두 화가는 서로를 경쟁자로 여겼을 것이다.
두 예술가의 작품 속 관계성. 고전적 누드의 상징
앙리 마티스는 색점을 사용한 신인상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 짧거나 긴 대담한 선,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삭면이 섞인 화면을 그렸다.
1905~6년에 제작된 <삶의 환희>에서 선과 색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윤곽선을 사용하고, 이를 아라베스크처럼 리듬감 넘치는 원색과 함께 배치하여 대담한 화면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대비되는 원색의 선의 사용은 산발적인 붓터치를 통해 생동감 있게 대상을 묘사함과 동시에 주체적인 색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윤곽선으로 색채를 분배하였지만 이로 인해 윤곽선 자체의 색채가 변하면서 그 주변의 삭면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었다.
마티스는 전통적 예술 양식들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이를 뒤섞어 그 만의 생소한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그의 혼합적 양식은 동시대 아르누보 장식을 비롯해 선사시대의 암각화에서부터 앵그르, 세잔의 구성까지 암시하고 있다. 이렇듯 <삶의 환희>에서 혼합된 양식들의 과감한 시도는 모호하거나 풍자적으로 과거의 예술을 드러내던 피카소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표면상으로 <삶의 환희>는 세속적인 기쁨의 정원이라는 르네상스의 목가적인 주제를 표현하고 있지만, 이를 원시적인 색의 효과와 양식들의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표현을 통해 이를 근원에 대한 몽상으로 바꾸어 표현하였다.
이는 해당 그림의 문학적 출처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에로틱한 몽상을 표현한 말라르메의 시처럼 <삶의 환희>는 전체적으로 꿈에서의 관능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중앙에서 팔을 괴고 누워있는 두 여성은 말라르메의 시에서 “당신의 터무니없는 욕망의 백일몽”으로 표현된 두 님프를 떠올리게 한다. 긴장과 대조를 이루는 보색의 특징은 이 두 인물에게서도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또한, 앞을 향한 오른쪽 인물은 고대의 아리아드네 이야기에 근거를 두었다는 점에서 육욕과 연결되는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고전적 누드의 상징은 일종의 자기도취적인 에로티시즘을 상징하게 되고, ‘욕망의 꿈’을 표현한 여성의 누드는 향후 마티스의 작품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중요한 주제가 된다. 이는 이후 피카소가 경의 하는 지점임과 동시에 공격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피카소는 마티스와는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작품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따라서 이 시기는 피카소의 발전에서 하나의 중요한 단계를 형성한다. 그 예시로 피카소가 그린 스타인의 초상화가 있다. 이 초상화는 매우 다른 두 가지 양식을 구현하고 있다. 첫 번째로는 세잔의 방식에 따라 옷의 주름과 배경, 인물의 표정과 자세를 표현한 것이다. 두 번째로는 마티스가 삶의 환희에서 양식들을 뒤섞어 사용한 방식을 피카소가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초상화 속 두꺼운 눈썹이 강조된 마스크식의 얼굴 표현은 아프리카 조각 미술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격조 있게 표현된 의상과 대조되는 고풍스러운 얼굴과 손의 양식은 외형적으로 보이는 관습과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그녀의 강한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초상화를 통해 마티스의 방식과 전적으로 다른 피카소의 양식상 대립의 차이는 이 작품의 의미를 다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따라서 이 그림은 피카소의 발전에서 하나의 중요한 단계를 형성한다.
1906년 가을 마티스와 피카소는 원시적으로 보이는 형상들에 몰두하게 된다.
피카소는 앞서 마티스가 가져온 아프리카 조각을 본 일과 트로카데로 민족지학 박물관에 방문했던 것 이외에도 마티스의 <푸른 누드>로 인해 아프리카 미술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푸른 누드>는 원근법이 전혀 사용되지 않은 배경에 원색을 사용하여 스케치풍으로 그려냈다는 특징을 지닌다. 또한, 작품 속 인물은 <삶의 환희>에서의 중앙의 오른쪽 여성과 유사한 자세를 취하며, 보다 과장된 형태로 표현되었다. 이는 ‘욕망의 꿈’과 관련된 여인을 의미하며 <푸른 누드>가 환상 속 관능적인 이미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여성 누드를 원시적 미술의 영향이 더해진 거칠고 그로테스크적 기법과 세잔 풍의 푸른 색조를 사용해 의도적으로 서툴게 묘사하였다.
극단적으로 비틀린 여성의 몸은 같은 대상에 속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상체는 관객의 눈높이에서 정면을 바라보는 각도로 그려졌지만, 하체는 엎드린 모습을 위에서 보는 것처럼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굵은 곡선으로 강조된 여성의 각 신체의 부분은 주변 경치의 곡선과 함께 반복적인 리듬을 이루며 전체적인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반면, 얼굴과 어깨는 거칠게 처리하여 추하고 남성적인 이미지를 나타내었고, 견고한 입체감을 느끼게 하였다. 극단적인 왜곡과 강한 입체감의 결합은 흐르는 듯한 공간을 만들며 작품에 강렬한 통일감과 긴장감을 부여한다. 마티스는 이 그림에서 주체적인 색의 작용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억제함으로써 대상의 형태에 더 집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렇듯 마티스가 기질적으로 피카소에게 더 적합했던 영역에서 과감한 시도를 선보이자, 1907년 피카소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리며 이에 대응하였다.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처음에 “철학적인 매음굴”이라고 불리며 이에 대한 연작으로 시작되었다. 정면을 바라본 중앙의 두 여성은 비교적 부드러운 선으로 고풍스럽지만 단순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는 초기 단계의 모습이 유지된 것으로, 초기 이베리아 조각에 대한 그의 관심이 반영된 결과였다. 반면, 나머지 세 인물은 아프리카 조각 연구의 영향으로 물감이 짓이기는 듯한 표현과 함께 호전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피카소는 마티스의 <삶의 환희>와 <푸른 누드>에서 큰 영감을 얻기도 하였지만, 특히 <삶의 환희>는 피카소가 마티스와 다른 행보를 보이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주제와 작품의 크기, 색채와 분위기 등 모든 방면에서 <삶의 환희>를 해체하며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통해 비판하기도 하였다.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이 아프리카 조각과 만난 결과라면 그것은 마티스의 푸른 누드가 아프리카 조각이 줄 수 있는 통찰력이 어떻게 세잔의 혁신과 결합될 수 있는지 보여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삶의 환희>가 원색의 밝은 색채와 곡선을 사용해 활기 있는 이미지를 나타내었다면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단색과 거칠고 뾰족한 선으로 긴장감 가득한 화면을 구성하였다. 또한, 꽃과 식물의 배경이 인물과 어우러지게 한 마티스와 달리, 피카소는 여성 누드의 발밑에 드러난 칼날 같은 멜론을 그려 야생적이고 동물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두 팔을 머리 위에 올린 여성은 <삶의 환희>의 인물과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목가적 배경 속에서 관능적인 몽상을 표현한 것과 대조적으로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관람자가 다섯 명의 여성 중 한 명을 골라야 하는 손님의 입장에서 감상하게 만드는 의도도 담겨 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이는 피카소가 현대 도시의 성적 현실을 폭력적으로 묘사하여 삶의 즐거움에 대한 찬사를 조롱하는 모습으로 의도한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피카소는 <삶의 환희>가 과거 전통을 꼬집은 선언적 작품이라고 한 마티스를 전적으로 거부하게 된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종종 최초의 입체주의 작품으로 언급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에는 논쟁의 여지가 많다. 시기적으로 입체주의 초기에 제작되었지만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삶의 환희에 대항해 마티스와 직접 경쟁하는 동시에 푸른 누드의 야만성에 답하여 그린 것이기 때문에, 피카소가 이 시기에 발전시킨 양식이 반 아티스풍을 띠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피카소는 마티스를 연상시키는 유기적인 곡선과 기분을 돋우는 관능성을 완전히 거부하고 엄격하게 색을 절제했다.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통해 그는 아방가르드 화가 중에서 자신이야말로 철저하게 독창적이고 걸출한 존재라는 사실을 선포했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마티스가 시도한 고전적 누드의 욕망의 주제를 본인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작품 속에 나타냈다. 마티스의 이러한 시도는 이후 피카소가 경의 하는 지점임과 동시에 마티스를 향한 공격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거트루드의 초상화를 통해 마티스의 방식과 전적으로 다른 피카소의 양식상 대립의 차이는 피카소 작품의 의미를 다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마티스는 피카소가 그와 다른 행보를 보이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결론적으로 피카소는 주제와 작품의 크기, 색채와 분위기 등 모든 방면에서 <삶의 환희>를 해체하며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통해 비판하기도 하였다.
피카소는 여러 화풍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고 실험적으로 표현해 내는 화가로 유명하다. 피카소는 마티스의 화풍에 영향을 받았지만, 결론적으로 본인만의 해석 능력을 통해 피카소 본인만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마티스와 피카소는 1905년 스타인가의 후원을 놓고 처음 겨루었던 그 순간부터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으며 사후에도 여전히 그런 상태이다. 그들의 경쟁은 때로 그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띠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적도 있었지만 어느 한순간도 그들이 상대방을 염두에 두지 않은 적은 없었다.
마치 두 화가의 작품 삶의 환희와 아비뇽의 아가씨들 작품이 서로에게 연관되어 세상에 나온 것처럼 말이다.
최근 점점 더 그들을 직접 비교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고 종종 어쩔 수 없이 둘 중 하나가 ‘더 위대한’ 화가라고 판단해야만 하는 상황이 생긴다. 하지만 그들이 이룩해 놓은 일의 성격이 매우 다른 점을 생각하면 그 꼬리표가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근거로 그런 판단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