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접 이야기(2)_토론면접과 팀장면접
다른 회사들은 채용 면접을 어떻게 구성하는지 모르겠다. 라떼만 하더라도 PT면접, 합숙면접, 토론면접 등 상당히 다양한 면접형태가 있었으나 (특히 SK가 다양한 면접을 진행하기로 유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회사 같은 경우 최근에는 모두 간소화하고 크게는 AI면접, 인간면접 1,2차만 진행하고 있다.
나의 경우에는 인적성 후 토론면접, 1차 팀장면접, 2차 임원면접 총 3단계의 면접을 거쳤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입사 이후에는 지원 당시의 면접 질문이나 내용 따위 기억하지 못한 채 오랜 기간 일에 치이며 살아왔었다. 입사를 한 이상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가 뭐가 중요한가. 한 번 열고 지나온 문은 다시 열어볼 일이 없다. 신입사원들의 경우에도, 지원자/인턴 신분일 때와 입사 후의 정직원이 과연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시간이 흘러 약 4년 반 전 지금의 부서로 발령을 받게 되었고, 지금의 부서에서는 채용 관련해서는 퇴사자나 탈락자에 관한 것만 제외하면 거의 모든 데이터에 접근이 가능했다. 문득 내가 입사할 때의 기록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의 지리멸렬한 시도 끝에 찾아냈다. 당시 면접관들이 누구였고, 뭐라고 평가했는지에 대한 적나라한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 기재된 내용은 면접단계가 진행될수록(즉 면접관의 직급이 높아질수록) 점점 빈약해졌지만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기에는 충분했다.
먼저 토론면접의 주제는 '공인인증서 폐지에 대한 찬반 토론'이었다. 이는 그즈음 매우 흔하게 주어졌던 아젠다 중 하나였다. 토론면접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솔직하게 논쟁하는 100분 토론이 아니다. 사전에 약 1~20분 정도의 조별 준비시간이 주어지고, 진행자와 찬/반 사이드를 임의로 결정, 주어진 순서에 따라 미리 준비한 개인의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이었다. 시간 관계상 대본으로 준비한 공식적 발언기회는 1~2회에 불과했고, 합의된 연극이 끝난 이후에야 자율 토론 (서로의 논리를 물어뜯는) 기회가 주어졌었다.
토론면접은 한정된 시간 내에 매우 많은 지원자(8~10명)들이 자웅을 겨루다 보니, 다들 어떻게든 발언기회를 확보하여 면접관의 뇌리에 한 마디라도 남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나 역시 그러했다. 침을 흘리며(수사적 의미다) 물어뜯을 대상을 찾던 중 상대측의 누군가가 비약이 심한 논리를 전개했고, 이를 놓칠세라 허점을 파고들었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그 자리에서 서로의 논리를 적나라하게 비판하거나 공격하지는 않는다. 다만 고개를 갸우뚱하며 동의하지 않음을 표현할 뿐이다. 상대방 발언의 논리를 재차 확인하며 '일단 알겠습니다' 정도로 마무리했던 것 같다.
추후에 그날의 면접 기록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면접관으로 기재된 2명의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2명 다 입사 후 나와 알고 지내는 인사팀 선배들이었다. 그들이 내 면접관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부장급으로 나보다 한참 선배이고, 그들 또한 그들이 나의 면접관이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어쨌든 토론면접은 무난히 통과했고 내게는 이런 평이 남겨져 있었다.
토론면접을 무난히 통과한 나는 그룹채용 주관부서(지금의 내가 속한 팀)로부터 예상치 못했던 연락을 받게 된다. 합격을 하긴 했는데 내가 지원한 백화점 부문이 아닌 홈쇼핑 지원자로 전형을 진행하게 될 거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토론면접이 끝날 무렵, 면접관 중 하나가 이런 질문을 했었다.
"이 중 홈쇼핑으로 합격하더라도 상관없다 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손을 든 건 나뿐만이 아니다. 그 자리의 거의 모두가 손을 들었었다. 손을 안 들 수가 없었다. 회사의 방침이라면 두 말 않고 따르는 충성된 직원으로 보여야 했다. 합격을 할 수만 있다면 백화점이건 홈쇼핑이건 뭐가 중요하겠는가. 또한 당시의 홈쇼핑 업황은 지금처럼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모바일 e커머스의 태동기였으므로 온라인몰 계열사가 훨씬 전도유망하다 보여졌다. 그래서 손을 들었던 것인데...
그런데 정말 회사가 바뀐 것이다. 화장실 가기 전 마음과 다녀온 후 마음은 상당히 다르다. 왜 하필 나지? 결과발표 직후에 1차 면접과 2차 임원면접이 예정되어 있었다. 면접은 코앞으로 닥쳤는데 바뀐 회사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면접을 치러야 할 판이었다. 사실 백화점도 애초에 내 관심 업종이 아니었고, 잘 모르는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홈쇼핑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일정을 확인하니 면접 전 주가 ATT(대대전술훈련) 주간이었다. 훈련 주간에 잡히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면접 전 주가 훈련이면 일정상 면접 준비를 거의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전역을 2달 앞둔 중위라도 대대장의 승진이 달린 ATT를 대충 준비할 수는 없다. 전역 직전에 지휘관의 눈 밖에 나면 그동안 해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분노한 대대장이 면접날 내 연차휴가를 재가하지 않으면 어찌할 것인가. 또 제대하기 직전 태만했던 (일부) 선배들의 모습을 답습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난 거의 아무런 준비를 못한 채 1,2차 면접을 맞이하게 되었다.
1차 면접은 당시의 인사팀장님과, 훗날 나의 팀장이 되시는 모 팀장님 포함 타 부서 팀장 3명이었다. 4명 중 3명이 현직 임원이실 정도로, 당시의 4명 다 유능하다는 평을 듣는 관리자들이셨으니 그야말로 쟁쟁한 라인업이었다.
역량이 우수했던 면접관들에 비해 우리 지원자들의 수준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다들 나처럼 프로세스 중간에 면접 회사가 변경된 사람들이었던 것일까? 방송 MD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PB브랜드의 필요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 지극히 실무적인 질의응답이 오가는 동안 나는 스스로 전혀 준비되지 못한 채 면접을 진행하고 있다(즉, 완전히 망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행인 건 내 옆에 앉은 다른 이 머저리 같은 놈들도 나만큼이나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난 장교였던 시절, 언젠가는 돌아갈 군대 밖 리얼 월드에 대한 감을 잃지 않기 위해 다양한 책과 팟캐스트를 구독했다. 그리고 그게 습관이 되어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매일 아침 라디오 뉴스를 청취한다. '습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당시의 인사팀장님이 내게 일상 루틴에 대한 질문을 했었던 것 같다. 난 자연스럽게 당시 매일 듣던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대해서 언급했고, 그 얘기를 듣던 면접관은 본인도 시선집중의 애청자임을 밝히며 최근에 시선집중에서 다루었던 이슈 중 기억나는 사안이 있는지를 내게 질문했다.
그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아무래도 멘탈이 심하게 망가졌던 모양이다. 분명 그날 아침에도 듣고 왔건만, 출연자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떤 부분이 내 관심을 끌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거짓말 같았다. 뭐라도 떠올려야 한다. 이런 대답조차 제대로 못하면 난 실무와 무관한 아젠다에조차 거짓말로 답한 답도 없는 지원자가 될 것이다. 약 3초의 아주 짧은 정적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 후, 몇 주 전의 이슈를 떠올려 그것에 대해 간신히 대답했다. 망했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에 무슨 내용으로 면접을 보았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귀대한 이후에도 며칠간 자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차피 제대하면 그만인데 그깟 훈련이 뭐가 중요하다고. 짧은 군생활 2년 동안 쌓아 올린 조막만 한 자기 의를 지키고자 남은 인생 전체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극단적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도무지 일과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부대 안의 내 사무실을 떠나 걷고 사색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다 며칠 후 내게 들려온 것은 의외의 합격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