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석증을 앓고 난 엄마가 하던 일을 줄이고 이전에 돌보던 쌍둥이 형제 등하원을 다시 하게 되었다 연락이 왔다. 엄마가 쌍둥이 형제를 돌보게 된 인연은 내가 제주도로 이주를 하던 4년 전이었다.
펜데믹으로 많은 것들이 변하던 시기였다. 우리 아이들의 하원을 몇 년간 담당하던 엄마를 남겨두고 섬으로 이주를 하게 되었고, 모두가 떠나간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일은 하원돌보미 일이었다.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선택했는지 알지 못했던 나는 하나도 아닌 둘, 그것도 남자 쌍둥이를 돌보겠다 선언하는 엄마에게 응원은커녕 걱정의 말만 잔뜩 늘어놓고 말았다.
엄마는 본인 스스로 '육아잼뱅'이라 표현할 정도로 살림, 육아와 담을 쌓고 살아온 사람이다. 오빠와 내가 태어났을 때도 너무 겁이 나 고모댁에 우리를 맡기거나 할머니를 서울로 모셔와 함께 살며 육아를 일임하던 엄마가 처음으로 육아의 세계에 발을 디딘 건 나의 첫 아이가 태어나고 1년 후였다.
"엄마, 돌 지난 애가 맨날 창문에 매달려 엄마 오는 시간만 기다린데.. 다른 애들 다 하원했는데 그 애만 혼자 7시까지 어린이 집에 있는 게 너무 불쌍해. 나 좀 제발 도와줘"
아무리 손자라도 본인 손으로 아이를 키우다 실수를 할까 걱정이라며 한사코 사양하던 엄마도 나의 간절한 부탁과 어린 손주의 딱한 사정을 모른 척하기 어려웠는지 돌봄을 허락해 주었다. 처음엔 기저귀 가는 것도 어설퍼 앞뒤를 거꾸로 입히고 젖병과 기저귀와 가제 손수건이 거실 여기저기 굴러 다니는 어지러운 육아였다.
퇴근 후 숨도 돌릴세 없이 집을 정리하며 밥을 손으로 먹은 건지, 가슴팍으로 먹은 건지 분간이 어려울 지경의 꼬질한 아이와 흐트러진 머리로 지쳐있는 엄마를 보는 일이 무척이나 괴롭기도 했다.
'아니 저 작은 애하나 돌보는데 이럴일이야? 엄마는 도대체 뭘 잘하는 거야?'
애 봐주는 공 없으니 절대 손주는 봐주는 거 아니라던 어른들의 우스갯 소리가 진실이었음을 고백한다. 내 아이를 위해 엄마의 시간을 끌어다 쓰면서 그때의 나는 고마움보단 원망이 더 커져있던 게 사실이었다. 시종일관 엄마를 탓했고, 회사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엄마에게 당연하듯 풀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나쁜ㄴ이었다.
딸년이 그러거나 말거나 엄마는 결국 사랑에 빠지고야 말았다. 손자가 하루하루 커나가는 모습을 보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 되어버린 엄마. 의심할 여지없이 엄마는 온 힘을 다해 아이를 사랑해 주었다.
할머니의 사랑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 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할 무렵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첫아이 산후조리를 못해준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던 엄마는 둘째 아이 산후조리를 완벽하게 해 주겠다 자신했다.
엄마는 큰아이와 둘째 아이, 그리고 자신의 딸을 위해 매일같이 음식을 하고 끼니를 챙겼다. 둘째 아이가 100일이 될 무렵 엄마는 조심스레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너무도 서운해 엄마에게 모질게 원망의 말들을 쏟아 내 버리고 말았다.
" 또 도망가려고 하지. 뭐든 하기 싫어지고 귀찮아지면 버리고 도망가는 게 엄마 특기 아니야?"
어린 시절 우리를 두고 홀로 떠난 엄마에 대한 원망에 복받쳐 엉엉 울었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엄마와 인연은 여기 까지라며 참으로 모진 말들을 쏟아 뱉었다. 다시금 나에게 돌아온 엄마가 이번에는 우리 아이들까지 버린다 느껴졌다. 그때의 나는 엄마를 이해해 보고자 하는 마음보단 보상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엄마도 그 당시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몇 주 후 다시 우리 집으로 먼저 발걸음을 한 이유는 다름 아닌 사랑하는 손주들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 너무 보고 싶어서 도저히 안 되겠더라"
엄마와 나 사이에 이제는 끊어질 수 없는 연이 두줄 더 생겨난 사건이었다. 가느다란 부모자식의 연에 내리사랑이라는 연줄이 꽈리를 틀어 더욱 단단한 밧줄이 되어 주었다.
조금은 엉뚱하고 발랄한 할머니의 영향으로 아이들도 밝고 재미나게 자라주었다. 그럼에도 육아가 어설픈 엄마는 커나가는 아이들의 변화에 놀라고 두려워했다.
'갑자기 막 뛰어가는데 잡느라 혼났어' '세상에 어찌나 때를 쓰는지 같이 앉아 울어 버렸지 뭐야'
노란 유치원 버스가 골목길에 들어오길 기다리고 서있는 엄마, 7살 손주와 손을 잡고 단골 빵집에 들어가 커피와 어린이 음료를 사이에 두고 빵을 나눠 먹는 엄마, 망아지처럼 놀이터를 뛰어다니는 세 살짜리 아이를 안절부절 뒤쫓는 엄마, 두툼한 배와 가슴팍에 손자 두 명을 기대 안고 아이처럼 즐겁게 뽀로로를 보는 엄마.
서툰 육아 안에 다정함을 감춘 사람. 본인이 줄 수 있는 건 사랑밖에 없다던 엄마. 그런데 정작 그 속에서 태어난 나는 왜 그 사랑을 믿지 못했던 것일까.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도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을 의심하고 받지 못했다 말하는 나는 영락없는 철부지였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내 나이가 마흔을 넘고, 부모 중 한 명을 잃고 나서야 부모의 사랑을 생각해 본다.
스물넷, 코스모스처럼 수수하고 여리던 여인이 엄마가 되었다. 성인이 되어 한 남자의 아내가 되기 전까지 언니 밑에서 일만 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몰랐다고 했다. 그저 사랑하나 만 믿고 따랐노라고.
모든 걸 다 해줄 거 같던 남자와 20년을 살고 헤어지고, 세상에 빈손으로 다시 섰을 때가 마흔 중반.
그때 엄마의 나이가 되어버린 나는 이제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모든 사람이 다 제 나이에 맞춰 세상을 살아가는 건 아니라고. 홀로서기가 늦었던 엄마는 그만큼 느리지만 천천히 세상을 알아 간 것이라고.
"쌍둥이 데리고 놀이터에서 한바탕 놀고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 먹고 집에 가는 길이지~"
"그 애들도 벌써 7살인데 , 엄마 말 안 듣고 그런 거 아니야? 힘 안 들어?"
"얘~ 나 이래 봬도 애 보는 전문가야, 내 손으로 손자 둘 키우고 쌍둥이 남자애들 키운 베테랑이라고"
"맞다. 우리 엄마 이제는 육아의 달인이지? 프로야 프로"
아직은 따가운 여름의 오후, 엄마와 일상을 주고받는 전화 통화가 좋다. 매사 삶에 감사를 담는 엄마의 언어가 나를 안정시킨다. 귀로 들리는 감사가 어느덧 나의 입으로 흘러나와 삶이 풍성해진다.
'고마워, 딸'
'고마워, 엄마'
이보다 더 빛나는 사랑이 어디 있을까? 이제는 알 수 있다. 엄마는 진정 육아 베테랑이었단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