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에 약한 고래

아직 춤을 추진 못 하지만

by cosmic dust

발레 수업 첫날. 오랜만에 느껴보는 두근거림을 진정시키며 연습실에 들어갔다. 결제하면서 발레연습복도 학원 측에서 연계한 곳에 주문을 넣어 두었지만, 수업 당 일에는 아직 도착 전이라 그냥 집에 있던 레깅스랑 가벼운 티를 입은 채였다. 나는 회원 사이를 비집고 어색함을 이겨내며 자리를 잡았다.

뭐.. 첫날인데 내가 가진 역량으로 발레를 할 수 있겠어? 그래도 요가나 필라테스 수업을 따라갈 정도의 유연함이면 어찌어찌 되겠지.. 내가 첫날이라는 걸 선생님도 아실 거야. 조금은 배려해 주시겠지?


나는 부끄럽지만(이라 쓰고 '자랑 좀 하자면'이라 읽자) 몸이 유연하다. 어릴 적엔 남들보다 특히 유연한 줄 모르고 자라왔으나 비교하게 된 시점부터 나는 내가 유연한 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아무리 마흔이 넘었어도 뻣뻣한 20대보다는 유연하니 나름 발레를 '잘'하진 못해도 '흉내'는 낼 줄 알았다. 하지만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은.. 뭐랄까.. 수치스럽다고 해야 할까? 정돈되지 않은 군살과 짧은 팔다리. 피곤에 쩔은 얼굴과 푸석한 머리. 불뚝 솟은 승모근. 옆에 아가씨들은 왜 이렇게 상큼하고, 그 와중에 선생님은 어쩜 저리 우아하고 아름다운 건지?



뭐.. 요정이야?

네. 발레 선생님들은 요정이십니다.



다리 찢기는 되었으나 코어힘이 없어 자꾸 흔들리고폴드브라(팔 동작)는 지시대로 한다고 했는데 선생님과 모양이 다르고, 그저 바를 손으로 잡으면 되는 건데 바를 잡은 손 모양마저 달랐다. 그래도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마음을 달래준 덕분에 나는 거울 속 나를 눈에 익히기 시작했다. 아.. 원래 저렇게 생겼었지.


하지만 더 충격적이었던 건... 선생님이 시범을 보여주시면 바로 동작을 외워서 따라 해야 하는데.. 하....외워지지가 않는 이 늙어가는 대가리.. 진짜.. 1번 플리에~ 드미 한 번, 업! 드미 두 번 업! 그랑플리에, 드미 거쳐서 업! 발란스! 2번 플리에 4번 5번 다 똑같아요. 참 쉽죠? 어깨 내리고 목 길게~ 갈비뼈 벌어지지 않게! 턴 아웃 좀 더 신경 쓰기! 탄듀 앞으로 3번 발끝 포인! 1번 돌아와서 플리에 기다렸다가 사이드 3번~


.....뭐야..

한 번만 듣고 다 기억하시는 건가요?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옆의 회원들을 흘끔 대면서 내적 탄식을 이어가는데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회원님, 이전에 발레 해보셨어요? 자세가 좋으시네요. 발등의 고도 있으시네요.




난생처음 듣는 말이다. 자세 좋다는 말도 생소했지만, 발등의 고는 정말 처음 듣는 단어였다.

그날 저녁 남편은 나의 우쭐거림에 "거기 영업 잘하는 구만!"이라며 일축해 버렸지만, 사실 나도 동감하는 바. ㅋㅋㅋ 칭찬을 쥐어짜주신 요정 같은 우리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그래도 검색해 보았다. 발등의 고가 뭐람? 아하! 발등의 뼈가 살짝 톡 나와있는 거였다. 이게 있어야 발끝 포인할 때 더 예쁘고 다리도 길어 보인다는 거다. 실제로 포탈에 검색해보니 전공생들 중에 그 발등의고 때문에 고민인 학생들도 더러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런 게 왜 내 몸뚱이에 붙어있었을까.. 40여 년 동안 하등 쓸모가 없었는데?



그런데 신기한 일이 생겼다. 그 별거 아닌 칭찬에 갑자기 내 발등이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솔직히 발등의 고 따위는 나의 생계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발등의 고 따위가 있으려면 나는 긴 목도, 가는 골격도 작은 얼굴도 다 갖추었어야 했다. 이것은 발레리나에게만 필요한 신체조건이니까... 주변인들에게 자랑도 소용없었다. 발레리나가 아닌 일반인들은 이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가치를 알 수 없었다. 알 필요가 없었다. 마치 수집가들 사이에서만 소장가치가 있는 포켓몬카드 레어템 같은 느낌이랄까? 사실 발등의 고는 그런 희귀템도 아닌데 설레어하는 내 모습이 킹 받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게 초큼 슬프지만 ㅠ) 그렇지만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동하게 하는 것은 알고 보면 별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정갈한 손톱에 눈길이 가다가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는 것처럼...



그래도 칭찬은 고래를 아직 춤추게 하지는 못했다. 왜냐면 나는 9개월 차 발레 수강생으로서, 아직 춤의 영역에 진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추는 것은 아직 춤이 아니라, 그.. 뭐냐... 뭐라고 할까.. 그냥 몸짓이라고 할까? 칭찬이 춤추게는 못했지만 춤추고 싶은 마음이 들게는 해 주었다. 그래서 한다. 오늘도. 언젠가 진짜 춤을 추게 될 그날을 위해. 나의 발등의 고를 뽐내는 날을 위해.


발등 뼈 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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