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조선과 을사늑약을 맺다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1905년 11월 9일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15일 고종에게 한일협약안을 제시하면서 조약 체결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이 무렵, 주(駐)한국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주(駐)한국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가 일본으로부터 증원군을 파송 받아 궁궐 내외에 물샐 틈 없는 경계망을 펴고 포위함으로써 대한제국 황궁은 공포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의 집요한 강요에도 불구하고 조약 승인을 거부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전략을 바꾸어 조정 대신들을 상대로 위협·매수에 나섰다. 하야시 곤스케는 11월 11일 외부대신 박제순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조약 체결을 강박하고, 같은 시간 이토 히로부미는 모든 대신과 원로대신 심상훈(沈相薰)을 그의 숙소로 불러 조약 체결에 찬성하도록 회유와 강압을 되풀이하였다.
이러한 회유와 강압 끝에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된 이토 히로부미와 하야시 곤스케는 마침내 11월 17일 경운궁에서 어전회의를 열도록 했다. 고종은 강압에 의한 조약 체결을 피할 목적으로 의견의 개진 없이 대신들에게 결정을 위임한 상태였다. 어전회의가 5시간이 지나도록 결론에 이르지 않자 초조해진 이토 히로부미는 하세가와 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일본헌병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궐내로 들어가 노골적으로 위협과 공갈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직접 메모용지에 연필을 들고 대신들에게 가부(可否)를 따져 물었다.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만이 무조건 불가(不可)를 썼고,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책임을 고종에게 전가하면서 찬의를 표시하였다. 이 찬성한 다섯 명을 을사오적이라 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각료 8 대신 가운데 5 대신이 찬성하였으니 조약 안건은 가결되었다고 선언하고 궁내대신 이재극을 통해 그날 밤 고종의 칙재(勅裁)를 강요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짜로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간에 이른바 이 협약의 정식 명칭인 ‘한일협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인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완전히 박탈을 당하게 된다. 외국에 인정받지 못하는 나라가 된 대한제국. 이미 이때부터 대한제국은 껍데기만 남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