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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그네 Dec 13. 2024

[역사속의오늘사건] 1545년 12월 13일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을 이단으로 규정하다

중세말기인 16세기. 교회는 이른바 '암흑기'라고 불릴 만큼 곳곳에서 부패한 모습을 드러냈다. 교황마저 보편 교회의 영적 지도자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기보다 때론 세속 군주로 군림하는 모습을 보이자 여기저기서 교회 쇄신에 대한 요청이 쇄도했다.


이에 교회는 1512년 라테란공의회를 개최, 교회 개혁을 논의했으나, 말 그대로 논의로만 그치고 말았다. 더욱이 교황은 막강한 교황권을 과시하기 위해 '성 베드로 대성전' 재건을 위해 대사를 반포하는 등 교회 개혁을 등한시하자 교회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는 극에 달했다.


결국 마르틴 루터(1483∼1546)는 1517년 교회 곳곳의 문제점 95개를 조목조목 지적한 문서를 공개적으로 발표, 교회에 정면 도전한다. 그는 신자들이 대사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망각하고 대사를 마치 '돈으로 구원을 산다'는 식의 '면벌부'로 여겨 남용하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대사 문제를 비롯한 교회의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교회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위험한 것이었다. 그는 '성서만으로(sola scriptura)', '신앙만으로(sola fidei)', '은총만으로(sola gratia)'라는 전제 아래 "하느님 계시의 원천은 성서뿐이며 선행없이 믿음만으로 구원될 수 있고, 나아가 성사의 도움없이 은총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교회는 그를 파문하고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루터의 추종세력은 급속도로 확산, 마침내 유럽 전역은 종교적, 정치적으로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항거자라는 뜻)' 개혁파로 양분되게 된다.


해결책은 교회 쇄신뿐이었다. 이에 교황 바오로 3세(재위 1534∼1549)는 이탈리아 북부 트리엔트(현 트렌토)에서 교회 개혁을 위한 세계공의회를 개최한다. 이것이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다.

교황 바오로 3세의 이어 율리오 3세(재위 1550∼1555), 비오4세(재위 1559∼1565)를 거치면서 중간에 10년간 중단되기도 하는 우여곡절 끝에 무려 무려 18년간 지속된 공의회는 가톨릭 신앙과 규율의 핵심 문제를 재정비한 가장 중요한 공의회 중 하나다.

공의회 교부들은 성서만을 하느님 계시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루터의 주장에 맞서, 성서와 함께 성전(거룩한 전통)도 같은 계시의 원천으로 똑같이 존중돼야 함을 분명히 했다. 또 오로지 믿음만으로 구원된다는 루터의 주장에 대해 믿음이 구원의 시작이요 기초이지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과 함께 선행이 따라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울러 하느님 은총만으로 강조해 성사를 부인한 루터에 맞서 교회의 7성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원을 두고 있음을 명확히 했다.

공의회는 특히 성체성사와 관련, 미사 성 변화 때 빵과 포도주가 모양은 그대로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제로 변화된다는 '실체변화' 교리를 채택하고, 고해성사에서의 비밀고백과 보속 등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확정했다. 이 밖에 연옥, 대사, 성인과 유해공경, 성화상 공경 등 그간 논란의 여지로 남아 있던 여러 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도 체계화했다.

결국 트리엔트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 개혁 운동으로 흔들리던 교회의 정통 교리를 공고히하고, 교회 생활의 여러 규범을 명확히함으로써 오랜 세월 누적돼 온 교회내 여러 폐단을 바로잡고, 교회가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교회학자들은 트리엔트공의회가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대한 교회의 최고의 응답이라고 평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리엔트 공의회가 미친 교회 내/외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그다지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어렵다. 이미 ‘반종교개혁’적 신념에서 출발한 교회의 방어적 세계관은 교회 안팎으로 ‘반세속주의’ 또는 ‘반세계주의’적 태도로 일관하였다. 교회 내적으로 트리엔트 공의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는 대조적으로 교회 내의 개혁에 있어서 화해와 재결합의 의미가 아니라 종교 개혁에 반대하는 투쟁적 기능에만 충실했다. 또한 교회 외적으로 본다면, 당시에 태동하던 모든 새로운 사상과 문화는 모두 단죄의 대상으로 삼고 말았고, 이런 결과적으로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사회의 모든 사회과학적 학문으로부터 동떨어질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자기중심적 세계관에 자기 스스로를 가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사실 교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해할 만하다. 14-15세기를 전후해서 확산된 ‘인본주의’(人本主義)는 종교 개혁가들에게 일정한 지적토대를 마련해 줌으로 인해 교회가 ‘종교개혁’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이는 곧 ‘신본주의’(神本主義)를 절대적 가치로 삼는 가톨릭교회에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인본주의에 대한 교회의 방침도 역시 종교 개혁가들에게 보였던 태도와 다를 것이 없었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이런 태도는 이어 두 과학자에 대한 단죄에서 드러난다. 바로 “만물의 중심에는 태양이 있다”는 ‘태양중심설’을 주장한, 프라우엔부르크 대교구장이었던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nicus, 1473-1543)와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한다”는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다.


우주의 모든 체계는 ‘지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천동설’을 ‘창조신앙’과 더불어 ‘신앙적 우주관’으로 삼아왔던 교회당국은 ‘지동설’을 지지하는 과학계에 ‘성경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공격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비밀리에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루터를 포함한 종교 개혁가들, 예를 들면 1521년 최초로 종교개혁의 원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신학원론>을 집필한 마르틴 루터의 동료이자 ‘필리프 멜란히톤’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필리프 슈바르체르트 (Philipp Schwartzerd) 마저도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이 성경에 위배된다하여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많은 종교지도자들도 그들의 입장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가들을 앞장서 박멸한 공을 인정받아 성인품에 오른 당시 교리 책임자였던 ‘벨라르미노 추기경’ (Roberto Bellarmino, 1542-1621)이 이들의 처벌에 앞장섰다. 1616년 3월 5일, 벨라르미노 추기경에 의해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오류임이 공포되면서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책과 금서목록에 오르게 되었고, 갈릴레오는 죽을 때 까지 피렌체에 있는 자택에 연금되었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종교 개혁가들에게 맞서기 위한 교회의 일치에 있었기에, 그 어떤 이탈도 있을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는 결국 불필요한 이질분자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갈릴레오와 교회의 갈등은 새롭게 발전하는 자연과학과 교회의 관계가 처음부터 뿌리까지 곪아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물론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기미는 갈릴레오 이전에도 나타났다.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였던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년)의 화형이 바로 그것이다. 공개적으로 화형에 처해졌을 당시 “말뚝에 묶여 있는 나보다 나를 묶고 불을 붙이려 하고 있는 당신들 쪽이 더 공포에 떨고 있다. 왜냐하면 내 주장이 진실이라는 것은 곧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발언으로 유명한 그가 이단으로 화형에 처해진 이유는 바로 ‘지동설’과 더불어 ‘무한우주론’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는 무한하게 퍼져 있고 태양은 그 중에 하나의 항성에 불과하며 밤하늘에 떠오르는 별들도 모두 태양과 같은 종류의 항성이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극히 당연한 이 주장은 당시 ‘천동설’을 주장하는 교회에 반대하는 이론이었다. 브루노의 화형은 이탈리아에서 자유로운 문화 활동이 가능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들과의 ‘대화를 통한 해결’은 애당초 관심에도 없었던 것이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영향은 곧 정치에서도 나타났다. 단죄와 처벌로써 종교 개혁가들을 대했던 태도는 결국 30년 종교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온 유럽을 폐허로 몰아넣었다. 이어 프랑스 파리에서 발생한 “성 바로톨로메오 대축일 대학살”은 그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994년에 제작된 영화 <여왕 마고>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이 ‘학살사건’은 종교전쟁을 중단하고 신/구교도들의 화합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던 1572년 프랑스 파리에서 약 1달 동안 만여 명의 신교도들이 구교도들에게 무참히 학살당한 사건이다.


종교를 빙자한 이 학살사건의 이면에는 정치적 암투가 숨어있었다. 이에 대해 보고를 받은 당시 교황 그리고리오 13세는 학살이 시작된 8월 24일을 기념일로 지정하고, 대축일 찬송인 테데움(Te Deum)을 부르게 했으며, 심지어 ‘1572년 신교도학살 기념’이라고 쓰인 기념주화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교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던 모습은 근대(17세기-19세기)에 들어서 정치와 교회의 갈등으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는 점차 교회를 제외한 모든 것으로부터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국가 지상주의’의 발로와 그로 인한 ‘국교회 사상’이 태동되었고,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계몽주의와 신학적 합리주의 경향이 대두되었다. 이 역시 트리엔트 공의회의 반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교회는 경건주의와 엄격주의의 강화 정책을 가속화하게 된다.

17세기에 이르러, 한 국가가 교회나 외부 세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최고의 권위를 가지려는 국가 지상주의가 태동하였다. 대표적으로는 프랑스의 갈리아주의 (Gallicanism)을 들 수 있다.


피에르 피투(Pierre Pithou, 1539~1596)의 저서 <갈리아(프랑스)교회의 자유>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갈리아주의는 17세기에 전제군주 국가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일환으로 교황권을 제한하여 교황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려는 프랑스 국수주의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지역 교회의 운영은 지역 교회의 주교와 그 지역 교회의 자치에 맡기기를 원하였다. 이러한 이론은 자크-베닌 보쉬에(Jacques-Bénigne Bossuet, 1627-1704)가 주동이 되어 1628년 4개조로 구성된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즉, ① 교권으로부터 정권의 독립, ②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의에 따른 교황의 수위권 재해석, ③ 교황권은 프랑스 교회의 회의와 관습에 적합하게 행사될 것, ④ 신앙 문제에 대한 교황의 결정은 전체 교회의 동의를 요한다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그는 ‘성 바로톨로메오 대축일 학살사건’이 기화점이 되어 체결된 ‘낭트칙령’(프랑스에서 자유로운 개신교의 활동을 보장한다)을 폐지하는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갈리아주의’는 18세기 독일에서 페브로니우스주의(Febronianism)의 기초를 제공했다. 페브로니아니즘은 독일의 주교였던 혼트하임(Johnn Nikolas von Hontheim, 1701-1790)이 유스티누스 페브로니우스(Justinus Febronius)라는 가명으로 1763년에 발표한 <교황령과 로마 교황의 적법적 권리; 분열된 그리스도교도의 종교적 일치를 위하여>라는 책에서 독일 교회와 국가 사이의 입법에 대한 것을 다루면서 ‘국교회 사상’과 ‘공의회 우위설’을 주장하였다. 즉 교황은 교회의 수뇌이며 교회 행정, 신앙과 도덕의 감독자이기는 하지만, 전체 교회에 예속되며 전체 교회만이 무류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1764년, 교황 클레멘스 13세(재위 1758-1769)는 페브로니아니즘을 주장한 혼트하임을 단죄했으나 오스트리아의 요셉 2세(재위: 1741 -1790) 황제는 페브로니우스주의를 지지하였다. 이것이 요셉주의(Josephinism)다. 이러한 교황권에 대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권한은 오히려 전세계 교회에 미치며, 국가의 속권에도 간접적으로나마 간여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교황권 지상주의’(Ultramontanism)로 대처하였다. 그리고 ‘갈리아주의’ ‘페브로니우스주의’ ‘요셉주의’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무류성’을 재확인하면서 단죄되었다.

교회가 국가지상주의와 투쟁하느라 유럽의 지배자 계층이 교회로부터 멀어지는 동안, 신앙의 자리를 ‘이성’(理性)에게 내주고 말았다. 즉 ‘계몽주의’라는 ‘문화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세계의 주요 흐름으로 등장한 계몽주의를 대하는 교회의 태도 역시 ‘반종교개혁’적 노선과 다를 바 없었다.


계몽주의와 관련한 교회의 반응은 곧 성경주석에서 나타났다. 계몽주의 체제 하에서 성경까지도 역사비평의 도구로 검증하려는 것에 강력하게 대응하고 나섰던 것이다.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 방법은 갈릴레오 및 데카르트와 동시대인이었으며, 동시에 유대인 철학자 이자 성서 비평가였던 스피노자의 제자 ‘리샤르 시몽’(Richard Simon, 1638-1712)이 시초이다. 시몽은 성경의 모세가 쓴 <모세오경>이 모세로부터가 아니라 오랜 역사적 발전을 거쳐 집필된 책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1678년 시몽이 발표한 <구약성경에 대한 비판적 연구>는 현대 성서학자들에게 황금과도 같은 원전이지만, 당시에는 앞서 언급했던 자크-베닌 보쉬에에 의해 압수되고 그의 저작들은 모두 불태워지고 말았다.


이처럼 가톨릭교회 내 성경연구는 그 꽃이 피기도 전에 교회당국에 의해 말살되고 말았으며, 성경연구가들이 가톨릭교회를 등지면서 더 이상 가톨릭교회 내에서 성경에 대한 연구는 시도되지 않았다. 성경의 해석을 오로지 사도좌에만 일임시킨 트리엔트 공의회의 그림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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