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로 안익태의 애국가를 사용하기로 의결하다
애국가의 자취는 조선 후기 개화기와 갑오개혁 직후까지 올라간다. 1896년 당시 독립문 정초식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에 의해 그 유명한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의 멜로디로 불린 작사 미상인 애국가가 최초의 애국가로 여겨진다. 여기서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죠션 사람 죠션으로 길이 보죤하세" 라는 가사가 지금의 애국가 가사에서도 맥을 이어 변형(조선→대한)되어 쓰이고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때는 한 해에 수십개의 애국가가 쏟아져나왔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로는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로 대체되면서 국가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후 1919년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애국가로 당시 스코틀랜드의 가곡 올드 랭 사인의 곡조에 맞춰 애국가를 불렀다. 이 당시에는 지금의 애국가로 치면 3절에 해당되는 가사가 없어 지금의 4절에 해당하는 가사가 3절이었던 시절이었고, 2절 가사 내용 중에서는 '바람서리'가 '바람이슬'로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올드 랭 사인은 국내에서 '작별'이라는 제목으로 번안되어 음악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로 시작되는 그 곡.
이 시기의 애국가의 특징으로는 워낙에 구슬픈 곡조인지라 나라 잃은 설움 및 반드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비장미가 더욱 잘 드러난다는 의견도 있다. 게다가 실제로도 일제강점기에 우국지사들이 많이 부른 애국가는 지금의 애국가가 아닌 올드 랭 사인에 맞춘 애국가였다.
새 곡을 써야 할 필요를 느낀 안익태가 1935년 11월 사 장조로 된 새 가락을 작곡했다. 상해임정에서는 애국가를 윤치호가 짓고 안익태가 작곡한 것에 대해서 둘다 친일을 한 경력이 있어서 이 때문에 애국가의 채택을 놓고 임정에서도 논란이 일게 된다.
이에 김구는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한 동지에게 '우리가 3.1 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했는데 누가 지었는가가 왜 문제인가'라며 '작사ㆍ작곡가의 성향보다 애국가 안에 담긴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반박하며 강제로 이를 국가로 의결시킨다.
애국가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가로 채택하기로 의결된 날이 1940년 12월 20일이다.
이렇게 친일파의 작품을 나라를 상징하는 국가로 채택한 것이야말로 대한독립의 영원한 문지기이자 대부인 김구의 어찌보면 가장 큰 흠집일 수 있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