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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혜정 Dec 09. 2024

첫 출간작 문장 발췌 모음

《여름빛 오사카와 교토 겨울빛 나가노》(2024)

* 비행기를 예약하고서 오사카에 가면 무엇을 해야 좋을지 생각해 보다가, 연극이나 뮤지컬을 한 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일본 웹 사이트에 올라오는 무대 정보들을 보면서, 일본의 무대 공연은 어떤 것일지 궁금해했었다. 영화도 음악도 아닌 무대 공연은 당시의 내가 도저히 체험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라,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돈이 생기면 일본에 가서 직접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_본문 13쪽



* 처음 혼자 걸어보는 오사카 거리는 꿈이 아니었다. 비일상도 현재가 되면 일상의 옷을 입는다. _본문 23쪽



* 푸드 코트를 한 바퀴 다 돌았을 무렵에, 가지가 올려진 토마토 파스타 요리 모형을 보았다. 가지를 올린 파스타라니 매우 독특하고 맛있어 보였다. 그 가게는 교토에서 공수한 채소로 요리를 만드는 것이 특징인 모양이었다. 교토에는 다음 날 갈 예정이었지만 교토의 채소라고 들으니 신선할 것 같고 구미가 당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교토의 채소’라는 것만으로도 고객에게 좋은 이미지를 준다는 것은 그만큼 교토라는 도시의 이미지가 훌륭하다는 것이다. 지역 이미지 조성의 힘을 느낀다. _본문 43쪽



* 뮤지컬 「팬텀」의 막이 올랐고 극은 시장 거리의 풍경과 함께 시작되었다. 시장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엑스트라일 텐데 그 수가 꽤 많아서 놀랐다. 드레스 등 복장도 본격적이고 나무로 만든 가판대 등 배경 소품도 많아서 이 뮤지컬에서는 소품을 꽤 많이 사용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으로 놀라기에는 일렀다. 극 전체에 걸쳐 상당한 규모의 배경과 수많은 소품이 사용되었다. 그것들을 정확한 타이밍에 빠르고 실수 없이 움직이는 것은, 모르는 사람의 눈에도 굉장한 집중력과 노력이 필요해 보였다. _본문 49쪽



* 그녀의 노래는 결코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었다. 아름다움과 함께 힘, 정확성을 갖추고 있다는 걸 알고 감탄했지만 그것도 전부가 아니었다. 그 이상의 엄청난 무언가를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노래라는 예술의 틀 안에 그녀가 있는 게 아니라 그녀의 노래 자체가 이미 예술을 담아내다 못해 초월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그녀는 어떤 의미에서 노래보다도 엄청난 무용을 선보였다. 에릭의 이야기 장면에서 그의 어머니를 표현하며 괴로움에 발버둥 치는 모습은 어떻게 그것이 인간의 움직임일까 의심하게 했다. 그녀는 예술을 초월한 노래를 가졌으면서 물리를 초월하여 움직일 수 있었다. _본문 52쪽



* 사실 나는 튀김 요리를 좋아하지 않아서 쿠시카츠에 대해서도 별 기대 없었는데, 내가 튀김을 안 먹는 이유인 무거운 튀김옷과 과한 기름기가 전혀 없고 매우 담백하면서도 감칠맛이 터졌다. 소고기 쿠시카츠는 크기가 꽤 작았는데 확실히 그 크기여야 튀김옷과 1:1의 조화를 이루면서 쿠시카츠로서 완벽할 것 같았다. 소고기를 다 먹고는 바로 돼지고기 쿠시카츠를 집어 들었다. 소고기의 3, 4배는 되는 듯한 기분 좋은 육향과 감칠맛이 느껴졌다. _본문 65쪽



* 시간예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현대의 경제 구조에서 무대 연극이나 뮤지컬보다는 드라마나 영화가 효율적이고 돈이 되는 산업이라고 생각한다. 공연을 하는 날마다 공간과 소품, 인력을 필요로 하는 데다가 배우의 그날그날의 컨디션에도 좌우되는 무대극은 노력이 많이 들고 리스크도 크다. 그에 반해 영화나 드라마는 한 번 촬영해 만들어 두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수많은 관객이 볼 수 있게끔 배포할 수 있으니, 무대극에 비하면 속 편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효율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무대극이라는 산업은 한계가 명확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공연을 보고 뚜렷하게 느꼈다. 절대로 다시 볼 수 없기에 생겨나는 가치도 있다고. _본문 69쪽



* 꿈에 그리던 훌륭한 대학의 모습을 일부일지라도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고 생각했고, 이 생각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교토 대학에서 나도 이곳의 일원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일종의 씁쓸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방문해서 좋았다고 생각한다. 이곳에는 이곳이 낳을 수 있는 좋은 점이 있다면, 나는 나의 생활이 낳을 수 있는 좋은 점을 맛보고 있다. _본문 83쪽



* 내 오른쪽 자리의 서양인들은 화과자를 입에 넣고는 서로를 쳐다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처음에는 화과자가 서양인에게는 얼굴을 찌푸릴 만한 맛인가 하고 의아했는데, 먹으면 먹을수록 서양인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는 맛이겠다고 납득했다. 나는 식문화가 비슷한 지역에서 성장해서 거부감 없이 맛봤지만, 그들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_본문 88쪽



* 점원은 하늘색 기모노를 입고 있었고, 시종 웃는 얼굴로 응대하면서 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경어를 사용했다. 아름다운 빛깔의 기모노와 일본식으로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 그리고 조리까지 완벽하게 갖춘 모습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일하는 날마다 본격적으로 스타일링하는 것부터가 보통 일이 아닐 테고 기모노와 조리로는 움직이기도 상당히 불편할 텐데도 흐트러짐 없는 용모와 태도로 접객하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저 점원의 정신력이 특별히 뛰어난 건지 아니면 원래 저 정도의 프로 정신을 발휘해서 일하는 것이 일본의 일반적인 규준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상적이었다. _본문 90쪽



* 가게 앞 안내문에는 직원이 부족한 관계로 대기 명단을 받고 있으니 양해해 달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자리가 있어도 대기를 하는 경우는 처음 보았는데 생각해 보니 들어오는 손님들을 모두 받아 점내를 혼잡하게 하기보다는 직원 인력에 맞춰 손님을 받는 것이 현명한 방식인 것 같았다. 고객의 입장 속도를 조절해 점내를 질서 있게 유지하고 직원이 여유를 가지고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새로운 방식을 하나 배웠다. 기다리는 사람들도 전혀 불편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_본문 119쪽



* 처음으로 전신을 물에 담근 그 순간, 모든 피로가 싹 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피로가 한순간에 날아간다’라는 말은 그만큼 기분이 좋다는 의미의 상투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때는 말 그대로 피로가 한순간에 날아가는 걸 경험했다. 몸에 피로가 쌓여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지 않았기에 더욱 물에 몸을 담근 순간의 그 감각은 어떤 충격처럼 다가왔다. 일본에서는 매일 욕탕에 몸을 담그는 것이 당연시되는데, 그것이 정말 현명한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하루하루의 피로를 적극적으로 씻어 내는 것이 당연하고 권장된다는 점에서 여유와 지혜를 느낀다. _본문 129쪽



* 열차가 달리고 달려도 창밖에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야생의 산, 야생의 눈, 야생의 절벽이 계속 펼쳐졌다. 무언가 일상과 동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이곳이 특별한 곳이라는 선명한 감각이 들었다. 눈 쌓인 산의 아름다운 사진은 검색하면 얼마든지 나오지만, 나가노의 이 눈풍경은 왠지 먼 미래에야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차가 달리면서 눈에 덮인 산과 절벽의 모습이 옛날 애니메이션의 필름처럼 끊임없이 지나갔다. 순간을 포착할 수 없어서 그런지 왠지 덧없고 그립게 느껴졌다. 처음이지만 마지막인 것도 같고, 그리운 것도 같은 감각이었다. _본문 134쪽



* 이윽고 뮤지컬 「루팡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의 비밀~」의 막이 올랐다. 극은 마아야 씨의 단독 넘버로 시작되었다. 「팬텀」의 시작 넘버인 ‘파리의 멜로디’와는 다른, 무게감이 있는 노래였다. 곡조에 맞춰 발성도 힘 있는 발성을 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차분하고도 성스러운 곡조에 맞춰 정교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일본 나가노 호쿠토 문화홀에 와서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다는 것이 얼떨떨하고도 행복했다. _본문 164쪽



* 호쿠토 문화홀에서 나가노역까지의 길은 뮤지컬 루팡을 보고 나오는 사람들의 행렬이었다.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은 각자 일행끼리 뮤지컬의 감상을 나누면서 역까지 향하고 있었다. 뒤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공연을 볼 때마다 천사의 목소리에 치유되는 기분이야.”라고 했다. 마아야 씨의 아름다운 노래를 칭찬하는 말을 들으니 나까지 기분이 좋았다. 극장 내에서는 몰랐는데 역까지 가는 길에서 뮤지컬 팬 중에는 중년 여성이 꽤 많다는 걸 알았다. 2, 30대보다도 중년층의 관객이 더 많은 이유가 궁금해졌다. _본문 171쪽



* 라멘을 먹는 중 점내 스피커에서 사카키바라 이쿠에(榊原郁恵)의 여름 아가씨(夏のお嬢さん)가 흘러나왔다. 평소에 좋아해서 자주 듣는 노래인데, 일본 한복판에서 내가 생활 속에서 즐겨 들었던 노래를, 그것도 1978년에 발매된 노래를 만나게 되니 놀라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어제는 나가노역 앞 신호등에서 고향의 하늘을 들었고 오늘은 라멘 가게에서 여름 아가씨가 들려온다. 나가노역에서는 좋아하는 음악과의 반가운 만남이 많다고 생각했다. _본문 173쪽



* 폭포로 올라가는 길목 입구에서부터 세차게 흐르는 개울이 보였다. 떨어지는 물의 힘을 그대로 싣고 흐르는 듯한 멈추지 않는 생명력이 느껴졌고 물살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길이 꽤 미끄러워서 조심스레 한 발씩 나아갔다. 주위는 그야말로 겨울의 대자연이었다. 경사면에 가득 쌓인 눈에 무수한 돌과 나무, 푸르게 흐르는 물이 어우러져 비현실적인 감각까지 자아냈다. 눈이 가득한 그 풍경은 자연의 장엄함을 담고 있는 동시에 보는 사람의 마음을 밝고 가볍게 해 주었다. 겨울의 한복판이자 산의 한가운데인 것 같은 그곳에 관광객들이 드나들고 있었고, 그것이 허용되는 것조차 조금 신기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_본문 188쪽



* 길을 헤매 이 골목에 들어온 셈이지만, 그 덕분에 카루이자와의 별장 지구를 두 눈으로 구경할 수 있었다. 여기에 별장 지구가 있다는 것은 몰랐을뿐더러 알았더라도 방문 계획은 세우지 않았을 테니까 별장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선물한 행운이었다. 알아보니 우연히 들어갔던 이 골목의 이름은 수차의 길(水車の道)이다. 그리고 성씨가 적힌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갔던 그 골목에는 일본의 작가 호리 다쓰오(堀辰雄)가 머물렀던 별장이 있었다고 한다. 호리 다쓰오의 작품 『장밋빛 볼(燃ゆる頬)』에 흥미를 가지고 원문을 분석해 본 적이 있는 만큼, 그 길에 들어섰던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큰 특별함이자 행운이었다는 것을 느낀다. _본문 205쪽



* 커피를 가져다준 여자 점원이 “크림이 필요하신가요?”라고 묻기에 크림도 부탁했다. 크림을 받을 수 있다는 건 일본의 카페에서만 즐길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커피를 마실 때 기본 옵션으로 크림이 있는 것은 일본의 커피 문화인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는 어른들이 커피를 마실 때 프림을 넣는 모습을 본 적 있는데, 지금 어른이 되어서는 커피에 크림이나 프림을 넣어 마시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커피에 크림을 넣는 건 한국에서는 거의 없어진 문화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다. 블랙커피를 주문하면 작은 유리병에 크림을 담아 커피 옆에 함께 내준다. 그 새하얀 크림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_본문 211쪽



* 이번에 나가노에 오게 된 것은 마아야 키호 씨의 무대를 보기 위해서였다. 작년 여름, 오사카에서 처음 듣고 반해 버린 그 노랫소리를 한 번 더 듣고 싶어서 나가노행을 결정했다. 그 너무도 훌륭하고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더 늦기 전에 직접 듣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여행이다. 시간이나 비용 등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가기로 결정했다. 그 선택의 결과로 이렇게 나가노에서의 즐겁고 귀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이제는 이렇게 여행의 끝자락에 있다. 마아야 씨의 ‘지금’을 눈과 귀에 담을 수 있었고, 많은 시간을 좋은 ‘지금’으로 채울 수 있었다. _본문 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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