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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키리 Jun 13. 2024

산악윤리, 등반의 시대정신

산악윤리, 등반의 시대정신

장소로서의 산     

공간은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설명 가능한 개념이고, 여기에 인간의 애착과 의식이 더해진 것이 장소다. 즉 장소는 단순한 물리적 환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경험, 감정, 기억이 쌓이고 의미를 부여받는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Yi-Fu Tuan, 1995). 지리학에서 장소는 실체적 공간이 인간과 교류작용이 만들어 내는 정신적 물적 영역으로 사회적․문화적 성격을 내포한 개념으로 사용된다(백선혜, 2005). 따라서 산은 공간일 뿐만 아니라 장소라고 정의될 수 있고, 이런 이유로 산은 장소성과 공공성의 특성을 가진다.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일반 사회구성원 전체에 두루 관련되는 성질을 의미하는 공공성은(국립국어원, 2024), 자신과 타인에 대한 책임을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어 윤리적 문제를 동반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떤 진공상태의 우주 공간과 같은 곳에서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윤리(Social Ethics)’가 자신의 이익을 넘어선 목표를 추구하는 행위, 자신의 이익과 다른 존재의 이익을 동등하게 보고 이 모두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바를 추구해야 함을 의미한다면, ‘환경윤리(Environmental Ethics)’는 자연 세계에 대한 인간의 행동은 도덕적 규범에 따라 지배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인간과 자연환경의 도덕적 관계에 대해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설명을 시도한다(위키백과, 2024). 따라서 산이라는 장소에서의 윤리는 ‘사회윤리’와 ‘환경윤리’의 결합된 형태로 이해되며, 개인 차원이 아닌 집단적·공적 차원의 문제로 확장된다.    

       

산악윤리의 패러다임     

한편, 72개국 94개 단체를 대표로 하는 국제산악연맹(UIAA)은 2009년 세계산의 날을 맞이하여 ‘UIAA산악윤리선언(UIAA Mountain Ethics Declaration)’을 발표한다(UIAA, 2024). 이 선언은 2002년 인스브루크(Innsbruck)에서 열린 산악 스포츠의 미래 콘퍼런스에서 채택된 ‘티롤 선언(Tyrol Declaration)’ 내용을 바탕으로 총 12개 본문(개인의 책임, 협동 정신, 산악인 공동체, 외국 방문, 리더의 책임, 응급 상황, 권리와 보전, 등반 상식, 초등, 접근과 보존, 스폰서 및 광고·홍보, 산소 사용, 상업 등반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UIAA, 2024), 특히 “7조 권리와 보존”(산과 암벽에 책임감 있게 접근하며, 환경보호를 위해 노력하고, 자연 보전 기구와 협력해야 한다), “8조 등반방식” (등반의 성공보다 경험의 질과 문제 해결 방식을 중시하며,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11조 산소 사용” (고산등반에서 산소 사용 여부는 등반가의 윤리적 판단에 맡기며, 사용 후 산소통은 반드시 회수해야 한다) 본문에 환경의 윤리적 문제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쓰레기 산이라는 별칭이 붙은 에베레스트 쓰레기 문제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버려지는 라면 국물로 국립공원의 식물이 멸종되고 생태계 교란 우려마저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한겨레, 2024), 산악윤리에서 환경윤리가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그렇다면 환경윤리는 어떻게 개념화되었을까? 자연에 대한 환경적 윤리적 사고는 알도 레오폴드드(Aldo Leopold) '토지윤리(land ethics)'에서 시작되었다. 레오폴드는 생태계의 기반인 토지와 인간의 상호작용을 강조했는데, 그의 사상은 우리의 환경의식을 바꾸어 놓은 20세기의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알려진 1948년 발표된 '모래군의 열두 달'에 수록되었다. 이 사상은 1800년대 소로우(Thoreau), 마시(Marsh), 옴스테드(Olmsted)의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옴스테드는 1865년‘요세미티 계곡 보고서’를 통해 국립공원 제정에 기여했다. 레오폴드의 '토지 윤리'는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하였고, 1978년부터 '환경윤리(Environmental Ethics)' 잡지가 발행되며 환경윤리학이 학문으로 자리 잡았다(박봉우, 2011).           

최근 환경윤리 패러다임은 ‘생물의 다양성 보존’이다. 올해 3월 안도라에서 열린 제12차 UN Tourism 회의의 주요 아젠더 중 하나로‘취약한 산악생태계 보호’가 포함되어 심층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다. 산악생태계 문제는 기계론·도구적 합리주의·과학 기술주의·인간중심주의가 위기를 불러왔다(천지일보, 20220). 따라서, 생태계 보호·생물의 다양성 보존을 위해서는 자연을 살리고 인간도 살릴 수 있는 생태중심주의인 ‘심층생태학’적 관점으로 생각을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심층생태학적 관점에서의 산     

노르웨이 철학자 네스(Naess)에 의해 제안된 ‘심층생태학(Deep Ecology)’은  환경철학으로, 환경 문제를 단순한 기술적 문제로 보지 않고, ‘인간중심적 관점’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간을 동등한 존재로 보는 ‘생태중심적 관점’이다(위키백과, 2024). 이와 관련하여 최근 발표된 Karlsen(2024) 논문 “Three paths to the summit: understanding mountaineering through game-playing, deep ecology and art(정상으로 가는 세 가지 길: 경기, 심층생태학, 그리고 예술을 통한 등산 이해)”는 네스의 ‘심층생태학적’ 관점에서 등반에 본질과 가치, 그리고 산악윤리의 재정립을 시도하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Karlsen의 주장에 따르면 네스는 등반가로서 그의 철학적 사상과 깊이 연관된 산악 경험을 바탕으로 자연과의 관계를 재정립했는데, 그의 ‘심층생태학’은 자연이 인간의 이익과는 무관하게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반적인 생태학적 관점은 기후 변화와 자연 파괴 문제를 기술 발전과 고립된 조치를 통해 해결하려는 인간중심적 접근이고, 심층생태학적 관점은 사고방식, 생활 방식, 자연에 대한 태도의 전면적인 수정을 요구하는데, 자연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고 우리는 자연을 빌려 쓰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산을 단순히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존중해야 할 존재로 보는데, 네스는 정상에 있는 경험이 과대평가되었으며 산에서의 경험 자체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결국 네스의 심층생태학은 자연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평가하며,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기존의 관점에 대해 수정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산을 포함한 자연은 우리의 확장된 자아의 일부로서 존중받아야 하며, 이는 우리가 자연을 대하는 방식과 태도에 대해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며, 등산을 기록 추구가 아닌 자연과 깊은 교감으로 바라보도록 촉구한다.           


등반의 시대정신     

등반의 목적이 정상에 도달하는 것이고, 정상을 향한 속도 경쟁이 불가피하다고 보는 관점은‘등반의 본질적인 경험의 상실’과 ‘지속가능한 등반’의 문제를 필연적으로 초래한다. 왜냐하면, 정상을 목표로만 하는 등반은 등반 그 자체에 담긴 복잡성과 심리적·상황적 가치를 단순화시키고, 이와 더불어 속도 경쟁은 많은 물적·인적 자원을 필요로 하는데 그런 과정에서 등반의 실존적인 가치와 윤리를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산이라는 장소 그 자체에 내재된 본질적 가치는 변함이 없겠지만,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해정도나 필요에 따라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1985년 보이텍 쿠르티카(Voytek Kurtyka)와 로버트 샤우어(Robert Schauer)가 가셔브룸 4봉(Gasherbrum IV) 정상을 불과 100m 앞에 두고 음식과 물도 없이 이틀을 기다리다가 하산하여 등반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등반 중 하나로 평가받는 이유가, 2023년 크리스틴 하릴라 (Kristin Harila) 3개월 1일이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시간에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했음에도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비난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이 결승선을 향해 달려야 할 이유가 없듯이, 등반이 반드시 정상 도달이 유일한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은 등반에 대한 본질적이고 깊은 생태학적 접근의 궁극적인 결과일 수 있다. 산이 무엇인지, 우리가 산과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한 전체적인 사고방식이 정복해야 할 정상에서 자연 속에 있는 장소로 바뀌게 된다.


#산악윤리 #등반윤리 #심층생태학 #에베레스트 #등산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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