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것이 최초이자 최대의 일탈
나의 술 이야기
나에게 술은 일탈이었다. 매우 사소하고 소심한 일탈이었다. 처음 술을 마신 날은 고3 어느 모의고사 날이었다. 모의고사를 보는 날은 공식적으로 야간자율학습이 없었다. 시험은 늘 망치기 마련이고 그런 날은 모의고사를 봤다는 사실조차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모의고사는 저녁 6시 즈음이면 끝이 났고 그날은 석식 급식도 없었다. 친구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고 우리는 차마 집에 갈 수가 없어서 겨우 찾아간 곳이 한 친구의 자취방이었다.
친구J는 고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부모님과 떨어져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했다. 거기가 아지트가 되었다. 우리가 술을 먹기 위해 처음부터 모인 것은 아니었다. 그냥 모의고사를 봤다는 사실을 숨겨야했고 저녁을 먹고 야자시간 끝날 때까지 시간을 죽이며 버틸 곳이 필요해서 모였을 뿐이었다. 처음엔 그냥 동네 수퍼에서 라면을 사서 끓여먹었다. 여고생 4명이 야자를 안하고 친구집에서 끓여먹는 라면 맛은 얼마나 감칠맛이 돌았나 다시 생각해도 짜릿하다.
입에 착착 감기는 라면을 먹다가 결국 우리는 소주를 사기에 이르렀다. 나는 한평생을 우등생은 못되더라도 모범생으로 살았기 때문에 고등학생이 술을 먹는다는 것은 어떤 금기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용기였다. 사실 그때도 화학 시간에 쓰는 알코올램프에서나 날 법한 냄새를 풍기는 소주가 맛이 없었다. ‘안주발이’라는 타박을 들으면서도 나는 술 대신 라면만 퍼먹으며 국물을 홀짝거렸다. 슬슬 집에 갈 시간이 되면 냄새가 나나 안나나 서로 후후 불어가며 챙겨줬던 기억이 난다.
그게 내 학창시절 유일한 일탈이었다. 그때는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 마냥 걸릴까봐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소주는 그때나 지금이나 늘 쓰고 술을 찾기보다는 수다로 퉁칠 수 있는 몇몇 선생님들 험담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대학 얘기, 진로 고민 등을 나누는 그 아지트와 그 시간이 절실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하찮은 소주병 돌리기 스킬과 병뚜껑 ‘꼬다리’를 꼬아 튕겨서 떨어지게 하는 노하우들을 꽤나 심각하게 배웠었다.
엄마는 친구를 잘못 사귀면 인생이 망한다고 늘 엄포를 놓았었다. 내가 그렇게 엄마를 속이고 친구들과 술을 마셨으리라고는 지금도 상상을 못할 것이다. 그 친구들을 철석같이 믿었으며 다 어딘가 번듯한 밥벌이를 하고 사는 친구들 근황을 전해 들으면서 좋은 친구들을 뒀구나 생각할 것 같다. 엄마. 걔들이 고등학생때부터 술마신 애들이에요.
온실 속의 선인장처럼 자란 시절이었다. 화초처럼 세심한 돌봄과 관심을 받았다기보다 그저 화분에 심긴 그 상태에서 적당한 햇빛과 적당한 물로만 컸던 것 같다. 온실 밖의 세상을 잘 보여주지 않았던 부모님의 울타리 안에서 자라던 시절이었다. 그 친구들은 나에게 학원 땡땡이와 야자 땡땡이 그리고 음주의 세계로 안내해 주었지만 사실은 그게 내 학창시절의 유일한 숨통이었다. 그때는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걸릴까봐 눈치 보고 심장을 졸였지만 내가 그 부모님의 나이가 되어보니 너무 사소하고 소심한 일탈이었지 않다 싶다.
어른께 술을 배워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마 그때 그 친구들이 없었다면 나에게 술을 권하거나 가르쳐줬을 어른은 없었을 것이다. 감히 고등학생이, 그것도 여자가 술을 마신다는 일은 ‘날나리 일진’이나 하는 일쯤으로 폄하하던 어른들이 주위에 가득했다. 친구들과 처음 술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술자리 예의도 지킬 줄 알고 적정 주량을 챙길 수 있으며 주사랄 것도 없이 술자리를 잘 끝낼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랐다. 나한테는 그 친구들이 술을 가르쳐준 ‘인생 어른’이다.
처음 소주를 마신 그때부터 20년이 넘는 지금까지 먹은 소주를 합쳐보면 주당들이 한 달이면 채울 양이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나는 술을 즐기지 않고 특히나 소주는 더 잘 마시지 않는다. 그러나 소주를 떠올릴 때면 그 어른 같았던 친구들과 마셨던 자취방이 생각난다. 처음 입에 담아본 소주 맛과는 다르게 추억은 달큰하게 기억되고 있는 것 같아서 친구들이 조금 보고 싶어졌다. 이제는 누군가의 엄마로 어디 일터의 직장인으로 지내고 있을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