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방부제는 무엇인가요?
순간은 휘발되고, 기억은 불완전하다. 이 법칙 덕에 슬픈 순간은 곧 지나가리라 위안하며 버틸 수 있지만, 이 법칙 때문에 행복한 순간 또한 오래가지 못하고 애처로워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순간을 보존하려 든다. 사진과 향기, 음악과 같은 대상 속에 순간을 박제하고 마음 한 켠에 넣어둔 채 언제든 맡고, 보고, 들을 수 있게 남겨둔다. 그러한 행위로, 초마다 과거가 되는 순간을 아주 쉽게 꺼내 볼 수 있는 지갑 속 사진처럼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을 보관할 수 있는, 당신 만의 방부제는 무엇인가? 나는 주로 활자를 힘을 빌린다. 글의 힘을 빌어 기억을 보존할 때의 좋은 점은 대상이 없어도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나의 피부를 껍데기라 칭할 때, 껍데기 아래 나를 채우는 알맹이는 실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뚜렷이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나의 특성과 결핍들이 나를 채우고 있다. 이 알맹이들을 나는 신념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글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념을 실재하게 만들고, 모두의 눈에 보이는 나로 만들어낸다.
필사를 시작한지, 2-3년쯤 됐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 적어도 한 문장은 남기 마련인데, 그 문장은 주로 책을 읽던 당시의 내가 쫓던 마음을 묘사한 문장이 주로 남는다. 필사와 함께 내가 잊고 싶지 않은 마음들은 주로 블로그에 남겨둔다. 올해가 벌써 40일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1년치 가량의 필사 노트와 블로그를 들여다보니, 올해의 내가 중요하다 생각했던 마음들이 활자로 박제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올해의 나는 조금 더 여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바쁘고 여유가 없는 나날 속에서도 타인에게 꼭 지켜야 할 매너, 예의, 약속과 같은 여유를 보일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선언하는 마음으로 썼던 것 같다. 그리고 오늘 그것들을 돌아보며 그 선언을 지키는 사람이 되기로 다짐한다. 오늘의 나는 미래로부터 보면 언제나 최악의 버전의 나이지만, 더 성장한 나는 그렇게 별로였던 내가 남겨두었던 기록으로부터 출발하는가보다.
무엇보다 활자는 그 어떤 대상보다 남기고자 하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되살려낼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무엇인가에 대해 적기 위해서는, 그 대상의 생김새, 이미지에는 담기지 않는 그 대상만의 고유함을 오감으로 떠올리고 묘사해내야 한다. 내 곁을 떠나고 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가 그리워지면 그 사람의 향기, 그 사람이 해주던 말, 그 사람의 피부가 가진 촉감을 떠올린다.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단어와 내가 몰랐던 모든 단어를 동원해 그를 묘사한다. 사전을 뒤져가며, 그리고 그 순간을 되짚어가며 성실하고 꼼꼼하게 그 대상을 재현해내면 그 대상은 내 안에서 되살아난다. 그리고 어느 새 나와 함께 존재하며 서있다. 누군가를 묘사하기만 해도 그리운 누군가를 가장 생생한 모습으로 불러낼 수 있다는 사실은 누군가와 헤어지고 또 지나쳐가는 일상적 상실 속 헛헛함을 달래는데 아주 큰 힘이 되더라.
잊으면, 필연적으로 잃게 된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과 일상에 치이다 보면, 사소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들을 잊게 되니까.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내가 타고난 무엇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음을, 나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음을 가끔은 아주 쉽게 잊고는 한다.
그렇기에 나는 잊기 쉽지만 잊기 싫은 나와 누군가를 잃지 않으려고 쓴다. 나의 겸손함을 지키고, 나의 사랑을 지키고, 나의 감각과 감정을 지키기 위해서 쓴다. 올해를 함께 마무리할 에디터 활동도 이의 일환이다. 올해의 끝에서 당신도 잊기 싫은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무언가를 적어보는 것은 어떨까? 내년에도 꺼내 볼 수 있도록 말이다.
*해당 글의 원문은 문화예술플랫폼이자 언론사 '아트인사이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