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철희 Aug 07. 2024

"좋은 사람"이 되려다가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의 이야기

<무간도 Ⅱ: 혼돈의 시대>

<무간도>에 대해 쓴 글에서도 말했지만,

유위강·맥조휘 감독의 2003년 영화

<무간도 Ⅱ: 혼돈의 시대>(이하 <무간도 2>)는 걸작이다.
<무간도>의 프리퀄인 <무간도 2>는

그 자체로도 잘 만든 영화인 <무간도>를

엄청나게 풍성한 영화로 만들어준다.

아귀가 살짝 엇나가게 맞물리는 바람에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부분들도 있기는 하지만.



<무간도 2>를 보면

1편만 봤을 때는 납득하기 힘들었던

캐릭터들의 행동 동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유건명(유덕화)이 한침(증지위)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했던 선택 같은 것이 그렇다.

<무간도>에서 그가 한 선택을 보면서

그의 선택이 이해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고 그랬는데,

<무간도 2>를 보면

그가 한 선택은 겉보기보다는 대단히 복잡한 동기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것이었음을 납득하게 된다.

<무간도>에서 아강이 죽어가는 동안

진영인에게 하는 충고도

진영인의 정체를 아는 그가

진영인을 아끼는 마음에서 하는

진심 어린 충고라는 것도 알게 해 준다.



유건명에게 암살당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직을 장악한 진영인의 이복형 예 회장(오진우),

한침을 위해 그 암살을 청부한 한침의 여자 메리(유가령),

황 국장의 상관이자 친구인 육 국장(호군) 등

<무간도 2>에서 새로 등장한 캐릭터들은

젊은 시절의 진영인(여문락)과 유건명(진관희)을 비롯한

주요 캐릭터들과 이런저런 인연으로 얽히면서

영화의 서사를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무간도>와 <무간도 2>의 제작 및 공개 순서가

거꾸로였다면 어땠을까?

영화에 묘사된 시간 순서대로

<무간도>가 <무간도 2>의 시퀄(sequel)로

만들어져 공개됐다면 어땠을까?

<무간도 2>의 오프닝에서,

삼합회 두목 자리를 향해 발돋움을 시작한 한침은

황 국장(황추생)에게

“우리 사이가 어떻게 끝날지 누가 알겠느냐?”라고 묻는다.

<무간도>를 본 관객은

두 사람의 사이가 어떻게 끝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저 대사는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무간도>와 <무간도 2>에서

인과관계가 역순으로 묘사된 여러 설정의 울림이 더 크다는 걸 감안하면

지금처럼 속편을 프리퀄 형식으로 제작하고 공개하는 것이

옳은 결정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무간도>의 빼어난 연출은

<무간도 2>에서는 한층 더 훌륭해진다.

시나리오와 촬영과 편집 등도 훌륭하지만,

정말로 인상적인 것은 2편에서 새로 합류한 연기자들의 눈부신 연기다.

그들의 카리스마와 연기력은

1편 출연진의 출중한 그것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냉혹하기 그지없는 예 회장을 연기하는 오진우의 연기는 특히 강렬하다.



영화의 주요 캐릭터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서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후반부 노천 술집 장면의 연출과 연기는 압권이다.

화면에 응축된 에너지는

금방이라도 초대형 폭발을 일으킬 것만 같다.

이 장면은 경찰이 보호하는 호텔을 빠져나온 한침이

예 회장을 만나러 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예 회장이 태국으로 전화를 걸어 한침을 협박하자,

한침은 하와이로 전화를 걸어 순식간에 전세를 역전시킨다.

그 직후 경찰이 몰려오고,

총에 맞아 죽어가던 예 회장은

이복동생이 언더커버라는 걸 알게 되고서도

그 사실을 덮어주고는 눈을 감는다.

많은 캐릭터들이 저마다 존재감을 과시하며 뒤얽히는

이 일련의 과정이 시종일관 엄청난 긴장감을 빚어내며 매끄럽게 펼쳐진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문장에서

“시간의 제약 없이”라는 문구를 강조하는 <무간도 2>는

“시간”을 강조하고 고민하는 영화다.

유건명은 시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무간지옥에 빠진 이들을

잠깐이나마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해 주려는 듯

1편과 2편에 꾸준히 등장하는

차이친(蔡琴)의 노래 제목 “피유망적시광(被遺忘的時光)”은

“잊힌 시간들(Forgotten Times)”이라는 뜻이다.


영화가 이렇게 “시간”을 강조하고 고민하는 이유는

1997년 7월 1일에 이뤄진

“홍콩의 중국 반환”이라는 운명적 사건을 바라보는

홍콩인들의 복잡다단한 심정을 다루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무간도 2>에는 빼어나고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은데,

영화 말미의 파티 장면도 그런 장면에 속한다.

호텔 창밖으로 영국령 홍콩의 중국 반환을 축하하는

화려한 불꽃이 연신 터지는 동안,

예 회장을 밀어내고 보스의 자리를 차지하는 데 성공한 한침은

호텔방에서 자신을 사랑한 끝에 목숨을 잃은

옛 연인의 사진을 보며 눈물을 글썽인다.

그러고는 문을 열고 나가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과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축배를 든다.


이 장면에 정치적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이 장면의 시간적 배경 때문이다.

이 파티의 참석자들이 축하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그들은

“한 나라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개의 제도를 허용한다”는

“일국양제(一國兩制)”라는, 지켜질 거라는 보증이 없는 약속 아래

홍콩이 중국의 품으로 돌아간 것을 축하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범죄조직을 호령하던 기존의 보스를 밀어낸

새로운 보스의 등극을 축하하고 있는 것인가?

이 장면에는

홍콩의 중국 반환은

영국이라는 기존의 보스를 밀어내고 새로운 보스가 등장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보는 <무간도> 제작진의 의중이 담겨있는 건 아닐까?



영화의 엔딩 장면도 인상적이다.

이 영화의 엔딩은

영국령 홍콩 경찰과 관련된 모든 표식을

중국령 홍콩 경찰의 그것들로 교체한 유건명이

경찰복 차림으로 술에 취한 메리와 대화하며 웃는 장면이다.

우리는 <무간도 2>를 통해

유건명이 <무간도>를 통해 알게 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캐릭터라는 걸 알게 된다.

유건명은 사랑하는 보스의 여자 메리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거절당하자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고는

그녀가 살해당하는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며 눈물 흘리는 인물이다.


<무간도>에서 슬쩍 언급된 것처럼

몇 십 개의 인격을 가진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르는 그가

(여전히 삼합회에 충성하는) 중국령 홍콩의 경찰로서

동명이인인 새로운 메리를 만나 환하게 웃는 엔딩은

두 사람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훤히 알고 있는데도,

유건명이 28개의 인격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는 면에서

<첨밀밀>의 엔딩만큼이나 인상적인 엔딩이다.


<무간도 2>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시리즈이기도 하다.

<무간도 2>의 오프닝에서

황 국장은 한침에게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경찰이면서도 삼합회 보스의 암살을 스스럼없이 지시한다.


<무간도 2>를 본 이후로 뇌리를 떠나지 않는,

동일한 맥락에 속한 장면이 있다.

서류에 적혀있지 않은 친아버지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경찰학교에서 쫓겨날 위기에 몰린 진영인에게

황 국장은 “경찰이 되려는 합당한 이유”를 묻는다.

그러자 진영인은 대답한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가 주저 없이, 너무나 간단명료하게 내놓은

대답처럼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는

“언더커버”라는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우리이기에

이 대답을 듣는 심정은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지극히 당연해야 할 소망을 품은 사람을

지옥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이 사바세계라는 곳은 도대체 얼마나 험난하고 혹독한 곳이란 말인가?

작가의 이전글 우리가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어야" 하는 까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