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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철희 Aug 07. 2024

모든 것의 소박한 바탕

흴 소(素)

시라카와 시즈카에 따르면

에 “희다”를 비롯한 여러 뜻이 붙게 된 유래는 이렇다.

옛날에는 실을 염색할 때

실 다발의 밑 부분을 묶은 다음에

나머지 부분을 물감 그릇에 담갔다.

그래서 물감에 들어가지 않은 부분은

원래대로 흰색으로 남았는데,

그렇게 흰색으로 남은 부분을 “素”라고 불렀다.

“素”의 밑 부분에 있는 가는 실 사()”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다.


“素”에는 뜻이 여러 개 있는데,

“흰 실로 남았다”는 데에서 비롯된 “희다”는 뜻도 그중 하나다.

요즘은 소복(素服)” 차림의 처녀귀신 얘기를 듣기 힘들다.

<전설의 고향> 같은 TV 프로그램을 알거나 봤는지 여부가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를 판가름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정도로

“소복 차림으로 산발을 한 조선시대 처녀귀신” 대신

서양에서 건너온 귀신이 더 무서운 존재로 간주되는 시대가 된 탓일 것이다.


아무튼 처녀귀신이 입는 “素服”은 말 그대로 “흰 옷”이다.

요즘에는 남자는 검정 양복 정장을,

여자는 검정 한복을 “상복(喪服)”으로 입는 게 보통이지만

예전에는 남녀 모두 흰 옷을 상복으로 입었고,

남편을 잃은 과부도 소복을 입었다.

상복 색깔이 흰색에서 검은색으로 바뀐 이유를 짐작해 보면,

검게 염색한 옷을 상복으로 입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윤택해졌다는 것도 이유일 수 있고,

조문객을 맞이하고 식사를 대접하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

옷이 더럽혀지더라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것도

이유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흰 실에 물감을 적셔 색을 입히는 것은 실을 꾸미는 행위다.

그런 관점에서

물감을 적시지 않고 흰색으로 남은 부분을 가리키는 “素”는

“꾸밈이나 거짓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소박(素朴)하다와 검소(儉素)하다 같은 표현에

“素”가 들어가는 건 이런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素”의 또 다른 뜻인 “근본, 바탕”은

염색할 때 염료에 담그지 않고 잡고 있던 “끝부분”이라는 데에서,

“바탕이 된 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바탕이 되는 재료”라는 뜻을 가진 단어 소재(素材)”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재질이나 타고난 능력”을 가리키는 소질(素質)”

들어있는 “素”는 다 같은 맥락에서 들어간 글자다.


이런 뜻의 “素”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들은

자연과학 분야의 용어들이다.

산소, 수소, 탄소 등 각종 원소(元素)”

물질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요소고,

엽록소(葉綠素)”는 식물의 광합성에 필수적인 요소다.

앞 문장에서 두 번이나 사용한 요소(要素)”라는 단어에도

“素”가 들었다는 걸 주목하라.


인간을 비롯한 많은 동물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성경 말씀에도 등장하는 “소금”도 그런 요소 중 하나다.

“무엇인가를 썩지 않게 해주는 존재”로서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소금”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작은 금”이라는 뜻의 “小金”이라는 주장도 있고,

농경시대에 농사에 꼭 필요한 존재였던 “소(牛)”와

역시 귀중한 “金”이 합쳐진 단어라는 주장도 있다.

여러 주장이 난립하는 “소금”의 어원은

국립국어원도 명쾌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는 주제인데,

개인적으로는 “하얀 금”이라는 뜻의

한자 “素金”이 어원이라는 의견이 옳다고 믿는다.


“급여”를 뜻하는 영어 “salary”가

로마시대에 “소금(라틴어로 salarium)”을 급여로 지불한 데에서

비롯된 단어라는 점에서 보듯,

바위에서 얻는 암염(巖鹽)이나

바닷물을 증발시켜 얻는 천일염(天日鹽)으로만 소금을 얻을 수 있던 과거에는

소금이 황금과 비교될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다는 사실이 내 믿음의 근거다.


소금을 합성하는 기술이 개발되고 보급되면서

오늘날 소금은 예전처럼 “金”과 비교될 정도로

귀한 대우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오히려 가격이 많이 싸지고

주방과 식탁에 부담 없이 양껏 구비해 놓을 수 있게 되면서

소금은 건강에 좋지 않은,

그래서 되도록 적게 먹어야 하는 조미료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뒤집어쓰고는 푸대접받는 신세가 됐다.


우리,

한때 “하얀 금”으로 불릴 정도로 대접받던 물질도

세월이 지나면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다는 걸 명심하자.

“하얀 금”을 되도록 적게 섭취하면서

내가 가진 “소질”을 열심히 갈고닦으며

“소박하고 검소하게” 살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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