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4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8호인 관곡지에서 연성음풍 시회(詩會)가 열렸다. 시조를 통해 지역 정체성을 고민하고 전통과 현대의 가교 역할을 꾀하고자 개최하게 된 행사이다. 이날 행사는 백중날 전일(前日)인 음력 7월 14일에 개최해서 그 의미가 남달랐다. 백종(百種), 중원, 망혼일이라고도 하는 백중은 농사일이 거의 끝난 시기로 100가지 곡식의 씨앗을 갖추어 놓고 하루 일손을 쉬며 잔치와 놀이를 펼치었던 날이다. 한국문인협회시흥지부장과 지역 원로문인, (사)한국시조협회이사장 및 회원들이 시회를 여는 의미에 동참했다.
시흥시는 연성(蓮城)의 문풍이 감도는 역사 문화의 고장으로서, 조선 영조 연간에 문인 백상형과 강세황이 주도하여 시회를 열고는 하였는데, 그 흔적이 백상형이 지은 오헌집(傲軒集)에 남아 있다. 김홍도의 스승이기도 한 강세황과 더불어 백상형은 엄경응, 이태길 등 당시 사대부들과 사로사(四老社)라는 모임을 만들어 3월, 5월, 9월, 10월 보름날, 1년에 네 차례 회원 집을 돌며 시모임을 열었다.
하중동 관곡지 일원은 1463년 강희맹이 명나라 남경에서 전당홍의 연꽃 씨를 가져와 심은 후 퍼지게 되면서 세조임금이 연성이라는 별호를 하사한 유래가 깊은 곳으로, 헌종 때 권용정 군수가 되살린 연꽃 전래의 뜻을 이어 시흥시에서는 보통천과 나란한 관곡지 주변을 연꽃테마파크라는 이름으로 조성하여 널리 지역을 홍보하고 있다.
이 날 시회에 참석한 시인들은 민족의 명절 백중날을 뒤로하고 동산 위에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조용히 시심에 들었다. 더하여 지역의 문풍이 화사하게 피기를 기원하며 우리 민족 고유의 노래인 시조를 지은 후 직접 낭송 발표하였다. 달빛이 내리는 늦은 시간까지 시회가 이어질 예정이라 오후 네 시, 한국무용과 시조창 공연을 시작으로 개회식을 가진 후 저녁식사를 먼저 하였다. 이후 참석자들은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관곡지와 연꽃테마파크 주변을 산책하였다. 해 질 녘을 배경으로 초록의 연잎과 수줍은 연꽃을 감상하며 시제(詩題)를 고민하고 고르는 짧은 생각의 여정을 여럿이지만 각자 홀로 걸었을 것이다. 다시 출발했던 자리로 돌아와서는 관곡지 앞마당에 흩어져 시조를 지었다. 이윽고 달빛 은은한 은휴정(恩休亭) 정자에 간단한 다과상과 함께 둘러앉아 창작한 시조를 낭송하는 것으로 오늘 일정이 마무리된다.
단아하고 완결미 넘치는 시조 본연의 자세를 간직하고 있는 단시조 쓰기로 정하였으며, 시제로는 연성음풍(蓮城吟風), 지행합일(知行合一), 만물일체(萬物一體), 연화대(蓮花臺), 관곡지 연꽃, 호조벌, 연못, 연잎, 연근, 연자, 연 밭에 부는 바람, 흙탕물, 금개구리, 갯골, 고향, 진실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삶, 타인을 존중하며 자신의 삶을 고양시키는 삶, 참 스승을 기리는 마음, 문화 예술로 하는 봉사 등 지역문화유산에서부터 현대인의 삶까지 다양하고도 폭넓게 주어졌다.
관곡지에서 6km 거리의 시흥시 화정동 가래울 마을은 한국 10대 사상가인 추곡 정제두 선생이 한국양명학을 일으킨 곳이다. 사람의 마음이 곧 하늘의 이치라는 심학의 학맥을 세운 곳이 시흥이기에, 만물일체의 생명사상과 지행합일의 실심실학을 일으킨 추곡 선생의 정신을 담고자 또한 시제에 포함해 이번 시회의 의미를 넓히고자 하였다.
수줍은 문학소녀, 소년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목소리를 고르며 자작 시조를 낭송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백발이 성성한 시조시인은, “오늘 이 자리에 서고 보니 시조 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행복합니다.”라는 인사로 벅찬 감격을 드러냈다.
향토유적이지만 사유지여서 일반인의 드나들음이 뜸하였고, 돌아앉은 선비의 모습처럼 고적하기만 하던 은휴정이 실로 오랜만에 시절인연을 만나 파안대소하는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