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바다
대학진학 후 처음 맞는 여름 방학이었다. 나와 단짝인 친구가 언니가 살고 있는 여수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여고 시절 아홉 명이 똘똘 뭉쳐 한 덩어리로 지내다가 취업과 진학으로 춘천, 서울, 대구지역으로 흩어진 친구들을 모두 부르자는 것이었다. 전화로 연락하기도 쉽지 않은 시절이었으니 우리는 서로가 많이 그리웠다. 대구에서 직장 생활 때문에 못 오는 친구들을 뺀 여섯 명이 드디어 합류하기로 했다.
문제는 항상 나였다. 먼 길을 떠날 때 친구들은 모두 괜찮은데 나만 자유롭지 못했다. 더구나 하루도 아닌 2박 3일이니 여행비용은 고사하고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큰오빠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그는 이미 대학 생활을 꿰고 있던 터라 여자애들의 여행이 들통나면 낭패였다. 궁리 끝에 대학에서 봉사활동을 간다고 둘러댔다. 이어서 다음 질문이 또 있을 줄이야. 순간 긴장됐다. 그럼 지도교수는 누구냐고 하기에 제일 먼저 스쳐 가는 교수님 이름을 댔다. 미술과 김 00 교수라고 하자 ‘어, 그래.’ 하며 누그러진 목소리가 내 고막을 통해 들려왔다. 이젠 됐다. 콩닥대던 심장 밖으로 안도의 숨을 뱉었다.
다음 날 오후, 우리는 기차에서 밤을 보낼 요량으로 버스를 타고 읍내를 빠져나왔다. 초저녁 무렵에 청량리 역에 내렸다. 여수행 밤기차 중에서 제일 싼 표로 샀다. 비록 차창 밖 남도의 색다른 풍경이야 놓쳤을지라도 떠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다. 꼬박 열한 시간이 지난 후, 밤새 초췌해진 우리를 마주한 친구의 언니 부부는 무척이나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음식 솜씨 좋은 언니 덕분에 갖가지 해산물 반찬도 맛볼 수 있었다. 여수의 갯 비린내는 철원의 뭍 내음과 많이 달랐다. 친구 형부가 내일은 바다 구경을 하러 가자고 했다. 기대됐다.
이윽고 아침이 되었다. 친구 언니 부부는 모두 여덟 명의 먹거리와 짐을 챙겨 승용차에 실었다. 그게 얼마나 번거롭고 힘들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못한 채 우리는 그저 즐거움에 들떠 있었다. 나는 ‘바다’ 구경이라고 해서 집 근처 해변의 경치를 마음껏 상상했다. 도착한 바닷가에는 생각지도 못한 엔진 품은 통통배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처제 친구들을 위해 친구 형부가 이미 예약해 놓은 것이었다. 곧바로 배에 몸을 담은 우리는 잔잔한 파도 위를 미끄럼 타듯 바다 한가운데를 향해 계속 달려가고 있었다. 이렇게 먼 바닷길 위에 내가 있다니 정말 신기하고 짜릿했다. 우리 내륙의 평야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내가 살았던 지역은 벌판 넓게 펼쳐진 논 사이사이에 몇 개의 점처럼 마을이 찍혀 있는 듯 보였다. 이 벌판의 광활함은 북한의 평강까지 이어져 맑은 날이면 그 시야 끄트머리로 평강고원의 황량한 모습까지 보인다고 한다. 여고 2학년 가을, 국어 선생님을 따라 읍내에 있는 금학산에 올랐었다. 947미터 정상에서 바라본 평야는 무르익은 벼로 지평선 끝까지 온통 황금물결이었다. 그때까지 내가 경험한 가장 넓은 세상이었다. 하지만 남쪽 바다에 와 보니 그곳은 단지 종이 한 장 크기에 불과할 뿐이었다.
나는 아직껏 바닷물 색깔은 막연히 파란색 한 가지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날 보니 파도가 해변으로 밀려와서 바위에 부딪히면 하얀 밀가루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곤두박질치고, 저만치 모래 위로 보이는 바닷물은 어느새 옥색 넓은 천으로 바꿔 덮은 것 같았다. 파란색 그 바다도 분명히 보였고 바위가 많은 곳엔 시커먼 파도로 일렁거렸다. 바닷물도 여러 빛깔인 것을....... 농촌에서만 살다가 만난 여수 바다는 정말 신세계였다. 천천히 사방을 둘러보니 마치 우주에 육지는 없고 오로지 바다가 전부인 것처럼 끝이 없었다. 통통배는 인적 하나 없는 작은 섬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섬. 그 가장자리에서 물속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여기저기에 손바닥 넓게 편 불가사리가 보이고, 성게는 가시를 세운 채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종아리까지 물이 차는 곳엔 ‘바다의 인삼’이라며 말로만 듣던 해삼이 뾰족한 돌기를 온몸에 두르고 길쭉하게 살고 있었다. 해삼은 깊은 곳에 살겠거니 생각했는데 얕은 곳에서 금방 보게 되었다. 친구 형부가 직접 잡아 보라고 권했다. 그래서 얼떨결에 손에 넣은 그것은 미끌미끌 단단한 촉감을 주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라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데 잠깐! 그 형부는 해삼을 한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으로 몸체를 쭈욱 훑어 내리더니 입 안에 툭 털어 넣고는 우적우적 먹었다. 맛있다며 우리에게도 먹어 보라고 해서 나도 어설픈 동작으로 훑은 후 입에 넣었다. 찔깃 찔깃 미끈미끈 으흐흐! 더구나 바닷물이라 내 입엔 너무나도 짰다. 몇 번을 질근질근 씹었지만 단단한 육질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처음 그대로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우물우물 꿀꺽 삼키고 말았다. 한탄강변의 메기와 붕어, 농수로 물풀 사이로 헤엄쳐 다니는 피라미와 미꾸라지 정도만 알던 내가, 단 한 번 먹어 보고 한려수도 해삼의 참맛을 어찌 알 까나.
난생처음 놀라운 경험을 가슴 가득 채운 후 섬만 혼자 덩그러니 남겨 두고 떠나오는 길. 한참을 되돌아 나와 다다른 곳은 바위들이 어깨동무하고 기다리는 해변이었다. 조심조심 배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니 바위에 의지해 살아가는 여러 가지 해조류가 눈에 띄었다. 바닥에는 초록색 팔을 흔들며 응원하는 듯한 미역 한 무리, 검은 바위에 껌딱지처럼 보이는 따개비, 그리고 검은 실밥 입에 문 채 서로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홍합타래들. 얼마나 싱싱하던지. 껍데기에 흐르는 무지갯빛 광택은 바다와 멀리 떨어진 우리 동네 그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이 모두가 처음 맞닥뜨리는 바다, 바다, 바다. 그날 우리는 미리 준비해 준 큼지막한 마대 자루에 홍합타래를 그득 따서 누군가가 짊어지고 왔다.
저녁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수돗가에 둘러앉아 친구의 언니가 알려 주는 대로 하나하나 손질하기 시작했다.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저마다의 이야기로 왁자지껄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끝이 났다. 큰 소쿠리에 수북하게 담긴 그것을 본 언니는 바로 삶아 주셨다. 그릇 그릇 나눠 들고 먹기 시작 했다. 내겐 하얀색 홍합 국물이 신기했다, 한 숟갈 먹어 보니 생각보다 무척 구수했다. 그 어떤 조미료 하나 안 넣었는데 이런 맛이 난다니. 그렇담 홍합 살은 얼마나 맛있으려나? 나는 쩍 벌어진 껍데기 사이로 노오란 알맹이를 집어내어 입안에 넣었다. 금새 입 안 가득 퍼지는 고소함과 그 부드러운 식감. 허겁지겁 얼마나 먹었는지...... .
한 여름의 긴 햇살이 어둠에게 자리를 내어 준 시간. 북쪽에서 단번에 남쪽으로 옮겨 앉은 우리는 경이로운 여수 얘기로 방안을 가득 채워가던 중, 속이 점점 메스꺼워지고 복통이 오더니 토사곽란이 시작되었다. 배를 움켜쥐고 쩔쩔맸다.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들락날락 고생으로 지샌 밤의 원인은 홍합에 체한 것이었다. 즐거움 뒤에서 괴로움의 그림자가 슬금슬금 따라 왔던 걸까? 그 때 큰오빠 얼굴이 떠올랐다. 평상시에도 친구들은 우리 집 앞을 지나칠 즈음이면 그 오빠 눈에 뜨일까봐 무서워 멀어도 길 건너 저 쪽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워낙 완고해서 이번에도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거짓말로 둘러댄 여행인데 그 죄 값이 이렇게 혹독할 줄이야.
그렇게 맛있게 먹었었건만 그 날 이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나는 홍합을 먹지 못했다. 홍합이라는 두 글자만 들어도 속이 울렁거리고, 홍합 그림만 봐도 머리가 어질어질하곤 했다. 지금이야 해물짬뽕 한 그릇에 올라앉은 홍합은 많을수록 고마울 따름이다. 바다는 이렇게, 경이롭고도 아프게 내게로 온 평생 비워지지 않을 추억의 창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