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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버yeong May 31. 2024

먼 조림

음식

   5월 소백산행 날짜가 이틀 앞으로 다가오니 집채 만 한 사자가 내게로 다가오는 느낌이다. 기다리지 않는 일은 참으로 빨리 오기 마련이다. 건강하자고 끼어든 일이니 즐겁게 준비하자고 애써 뒤집어 생각해 보곤 해도 도시락 반찬부터 걱정이다. 평상시 밥상에 올려놓는 걸 가져가는 게 소박한 원칙이라고 한다. 부담이 없기는 한데 워낙 대충 먹는 부부라 그마저 여의치 않았다. 마트에 들러 생필품을 고른 후 반찬 재료에 눈길을 주다가 내일 전통시장에 가 보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나서 소파에 앉으니 게으름이 내 마음을 점령했다. 이럴 줄 알고 내일은 전통시장에 가겠노라고 남편에게 이야기를 해 놨었다. 그는 내색은 안 했지만 아마도 그 말이 무척 반갑게 들렸을 것이 것이다. 지난겨울부터 지금까지 인터넷으로 몇 가지 사서 냉동실에 넣어 놓고 야금야금 꺼내 먹어 왔으니까 새삼 스러웠을 것이다. 책임져야 할 말을 해 놨으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드디어 시장에 들어섰다. 첫머리에 자리 잡은 가게에서 식구 좋아하는 간식용 골뱅이를 찜 해 놓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제철을 맞은 마늘 무더기가 주인 키만큼 쌓여 있고, 건너편엔 머위대, 미나리, 키 큰 두릅과 참외며 수박까지 계절의 풍성함이 곳곳에 넘쳐 났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찐빵과 노릇노릇 구워진 호떡을 오늘은 지나친다. 든든히 먹은 아침 때문이다. 몸매 퉁퉁한 채 뽑아 올려진 더덕의 향을 맡으며 지나다 보니 비린내가 코에 훅 들어왔다.     

 

   다양하고 싱싱해 보이는 생선가게에서 발길이 멈췄다. 무엇하나 내 예상과 맞아떨어지는 값은 없었다. 얼마 만에 찾은 장터인데 그럴 만도 했다. 가져간 통에 냉동오징어 한 무더기 담았다. 그다음 임연수 한 손은 내가 좋아하는 생선이고, 저 쪽엔 냉동참조기가 작은 몸을 서로 기대고 누워있었다. 담백하고 감칠맛 나니 작아도 좋다. 채소는 상큼한 오이소박이를 담가 먹자. 거기에 꽁치 몇 마리를 더했더니 시장 가방이 묵직 해져 돌아왔다.      


  몇 년 만에 시장 나온 사람처럼 가지가지 사 들고 왔더니 풀어서 정리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서너 시간을 누비다 온 터라 세 시가 훌쩍 넘었다. 봄날 오후의 피곤함에 맥을 놓고 앉아 있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아차, 검은 봉지에 그득한 오이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잊을 뻔했다. 늘어진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갔다. 고무장갑을 끼고 오이를 썩썩 문질러 닦아내면서 생각했다. 내일 소백산행도 있으니 ‘그래, 쉽게 살기로 하자.’ 이번만은 4등분 하지 말고 통으로 십자 모양 칼집을 내어 절인 후 한 번에 부추 속을 넣어 마무리했다.     

  

  내일 고추장에 생오이를 가져갈 계산이었는데 글쎄 몽땅 소박이를 하고 말았다. 이 건망증을 누가 말리랴. 손쉬운 반찬 한 가지를 놓쳤으니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할 수 없이 꽁치를 선택했다. 새벽 5시에 출발 준비를 해야 하니 그전에 일어나 반찬 만들기는 불가한 시간이다. 최소한의 신선도 유지를 위해 밤이 깊은 후에 주방 앞에 또 섰다. 넉넉한 양을 프라이팬에 굽고 간장 양념으로 조린 후 꽁꽁 담아 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소백산 가는 날이 밝았다. 끓여 놓았던 국에 밥을 말아 아침을 챙겨 먹고 집 앞에서 일행과 합류했다. 자동차로 두 시간을 달려 단양을 지나 영주 희방사 등산로 입구에 다 달았다. 오르기 전의 긴장을 깔깔깔 대화로 풀어내며 신발 끈을 다시 맸다.  첫 입새의 편안함과 그 많은 계단마다 올려놔 준 고무깔개의 푹신함이란... 역시 국립공원은 다르다며 내가 꼬박꼬박 바친 세금이 이렇게 돌아왔다고 고마워하며 발길을 옮겨 나아갔다.     


   연분홍 철쭉의 은은함에 취하며 연화봉에 이르자, 점심 도시락을 펼칠 시간이라며 비로봉을 저 앞에 두고 저마다 먹거리를 꺼냈다. 낙지 젓갈과 보온병의 시래깃국을 내놓자 “와!” 하고 반가워들 했다. 나머지 하나 뚜껑을 열자 그게 뭐냐고 묻는다. 꽁치조림이라고 하니 맞은편에 둘러앉은 일행이 “먼 조림?”하며 몹시 놀란 듯 말했다. 이어서 “세상에! 산꼭대기서 꽁치조림이라니 상상도 못 한 반찬이네요.” 찬사가 이어졌다. 이렇게 좋아할 줄 미처 몰랐다. 한 도막 반찬이 고단한 일행 8명을 즐겁게 했다니 산행기쁨이 8배인 날이었다. 다음엔 뭘 해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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