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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숙 Jun 14. 2024

텃밭의 노인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그녀는 다 식어빠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마당 한쪽 귀퉁이에 있는 텃밭에 눈을 둔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눈에는 어떠한 사물도 인식되지 않는다. 부산스럽게 날아드는 참새들도, 텃밭에서 무언가 끊임없는 일거리를 찾아내 꼬물거리는 어머니도, 멍하니 앉아 있는 자신도, 그저 한 폭의 정물화 같다. 전에는 이런 순간들이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은 분명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도리질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굳이 도리질할 이유도 또 그럴만한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가족과 함께 살지만 말을 하지 않고 지내는 날이 훨씬 더 많다. 하루종일 일간지를 읽으며 소일하는 아버지와 손바닥만 한 텃밭에 나가 온종일 무언가를 하는 어머니를 마주할 때면 숨이 턱턱 막힌다. 그녀의 존재가 더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저 두 노인네 탓일지도 모른다.  하긴 마흔이 넘도록 결혼은커녕 제 앞가림도 못하고 집에서 뒹구는 딸이 그나마 살갑기를 하나, 싹싹하기를 하나, 숨이 막히기는 서로 마찬가지일 터였다.  

어머니가 굽은 허리를 펴고 현관문을 연다. 아마도 점심을 차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노인네는 지성껏 밥을 차려 먹는다. 단 한 끼도 거르는 일이 없고 대충 먹는 일도 없다. 마치 두 사람에게 남아 있는 과제는 밥을 먹는 일밖에 없는 듯 생선을 굽고, 상추를 씻고, 된장찌개를 끓이고, 끼니마다 부산스럽다. 아직도 앉은자리에서 소주 두 병을 거뜬히 비우는 아버지나, 작은 체구에 감기로 골골하면서도 쉽게 눕지 않는 어머니의 버팀목은 아마도 저 밥심 때문일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두 노인네가 식탁에 마주 앉아 묵묵히 공깃밥 한 그릇을 비우는 모습은 비장감이 감돌기까지 한다.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상에 그녀가 함께 앉는 일은 거의 없다. 그녀는 마치 이방인처럼 두 노인과 철저하게 다른 사이클로 살고 있다.

폐가 같은 이 집을 뛰쳐나가고 싶은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짐을 꾸려 미국으로 떠날 때 그녀는 두 번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겠노라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두 노인네는 끝끝내 그녀의 발목을 잡고 놓지  않았다.  

“니 에미가 쓰러졌다. 난 니 에미 장례 치를 기운도 없으니 들어와라.”

“그런 전회는 오빠한테 해야지 왜 나한테 하는 거야?”

말은 표독스럽게 했으나 결국 그녀는 짐을 꾸렸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병원에서 퇴원해 집에 누워계셨다. 병명은 노환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까지 저렇게 건재하게 살아서 움직이고 계신다. 결국 그녀가 이 집에 남아있는 것은 두 노인네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당신이 딸의 삶을 망치기라도 한 듯 어머니는 그녀의 눈조차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습관적으로 지금은 몇 시쯤이나 되었을까 가늠해 본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지 한 시간쯤 지났으니 아마도 시계는 열두 시 십몇 분쯤을 지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픽 헛웃음을 흘린다. 일 년 열두 달 내내 지겹도록 남아도는 시간을, 어제인지 오늘인지 내일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순간을 보내는 자신의 처지가 참 딱하다는 생각에서다.  

텃밭에서 한 노인이 허리를 편다. 어머니는 분명히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는데, 저 노인은 누굴까? 그녀는 눈을 비비고 노인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노인이 그녀를 보고 씩 웃는다. 한순간 그녀는 전율한다. 그것은 분명 그녀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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