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저 우리 아이가 책을 좋아하고 독서를 즐기는 아이이길 바란다.
나의 첫째 아이 찐빵이가 40개월쯤 됐을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코엑스 유아교육전에서 도서 상담을 신청했다. 우리 찐빵이는 '창작책'을 좋아한다. 읽어주는 나도 재밌다. 상상만 하던 일 또는 상상도 못 해본 일을 신나게 이야기해 주는데 재미없을 리가. 좀 더 다양한 창작책을 제공해주고 싶은데 내가 일일이 구입하자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 (아마 나와 같은 니즈를 가진 사람이 분명 또 있을 것이므로) 여러 작가의 창작책을 모아둔 세트가 시중에 나와있을 것 같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이제 우리나라 나이로 곧 5세가 되는 찐빵에게 창작책을 주로 읽게 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며, 이제는 세계명작과 전래동화를 읽어야 하는 시기라고 했다. 그러면서 세계명작과 전래동화를 읽으면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고 갈등의 해결방법을 배울 수 있고, 어휘가 늘고, 이야기에 깊이 몰입하게 되고.. 등의 장점을 나열했었다. 아, 그리고 이 책들은 창작과는 다르게 기승전결이 명확하고, 이야기 안에 직접적으로 설명되지 않은 그 어떤 인간군상을 유추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준다는 특징 설명까지도. (물론, 나는 이것들이 세계명작과 전래동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창작 도서 추천받으러 갔다 엉뚱하게도 세계명작, 전래동화에 대해 영업당한 것이다. 물론 그 자리에서 도서를 구매하진 않았지만, 이다음 도서관에 갈 때마다 혹시나 해서 세계명작이나 전래동화를 한두 권 빌려봤다. 그리고 우리 찐빵이는 이런 류의 책을, 적어도 지금은, 읽지 않아도 된다는 명확한 결론을 내렸다.
그림체가 귀여워서 빌려본 오즈의 마법사. 처음부터 마녀가 하늘에서 떨어진 도로시의 집에 깔려 죽고 그 마녀를 처치하려던 자로부터 감사인사를 받으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왜 죽여준 게 고맙냐고 묻는 찐빵에게 뭐라고 답했어야 했을까. 마녀는 나쁜 사람이라 죽여도 된다-였나. 그다음 장면은 도로시가 그 죽은 마녀의 신발을 신고 모험을 나서는 내용이었는데, 여기서 남의 신발을 말도 안 하고 가져가면 안 된다는 찐빵에게 난 뭐라고 답했어야 했을까. 이미 죽은 사람 물건이니 괜찮다는 말? 또는 마지막에 이 신발이 없으면 도로시가 다시 마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결말 스포? 나는 일단 이야기를 읽어보자며 어물쩡 넘어가고 말았다.
사람들이 모여서 한 사람을 어두운 곳에 가두는 것은 잘못된 거 아니냐고(라푼젤), 파티에 초대를 못 받았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나쁜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니냐고(잠자는 숲 속의 공주), 왜 남자는 공주가 얼굴만 예쁘면 결혼하는 거냐고(알라딘). 이런 질문을 낳는 책들이 과연 5세 수준의 인성교육과 함께 갈 수 있나. 그리고 성정체성을 만들어가는 5세에게 정말 적합한 것인가.
시간이 흘러 찐빵이가 53개월 접어들었고, 도서관에 갔다가 이름이 너무 웃기다며 빌려온 '콩쥐 팥쥐전'. 처음으로 콩쥐 팥쥐전을 보는데 새엄마 배 씨는 어른인데 왜 아이인 콩쥐를 미워하냐-부터 해서 팥쥐는 왜 콩쥐를 연못에 떠미는 거냐 밀면 넘어질 수도 있는데- 등의 질문들. 아, 세상에 악한 사람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는 걸 지금 알 필요가 있을까.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악을 미리 예습하는 개념인 건가.
침대에서 처음 호두까기인형을 보던 찐빵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 말고, 세상에 이런 게 있다고? 하는. 흥미진진보다는 진심으로 충격적인 표정. 정말 놀란 표정이었다.
세계명작과 전래동화가 이 시기에 필수로 봐야 하는 책이라고? 진짜?
이게 정말 찐빵의 세계를 넓히는 걸까? 출판사들이 짜놓은 판매로드맵에 놀아나고 있는 건 아니고? SNS 공동구매시장에서 마저 책을 팔아 대는 요즘. 구매층을 넓히기 위한 어떠한 판매전략인 건지, 아이들 연령에 비해 책의 수준을 높여 읽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전래동화가 계속해서 나오니 미리 예습하는 개념에서 꼭 읽어야 한다며 5세에는 이 책을 들이라는 홍보글도 있던데, 나는 이렇게 되묻고 싶다. 지금 말고 7세 후반 또는 초등학교 들어가서 읽으면 안 되겠냐고, 무슨 전래동화도 2-3년 미리 선행학습을 해야 하는 거냐고 말이다. 독서에 선행과 후행이 어딨겠는가. 여섯 살 된 아이가 글 하나 없는 그림책을 보고 있으면 후행인가, 글밥 많은 위인전(사실은 그중의 그림 부분을 보고 있겠지만)을 보고 있다면 선행인가.
다양한 책을 읽으며 배경지식을 넓혀가는 게 아이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지만, 그건 연령에 적합한 책일 때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책의 말투나 표현이 유아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아이의 발달 수준보다 어려운 책은 아이에게 사랑받기 어려울뿐더러 유익하지도 않다.
글 쓰면서 나의 생각도 한 번 더 정리가 됐다. 역시 나는 우리 아이의 순수한 마음, 특히 모든 사람은 선함을 기본으로 추구하며 상대를 선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점, 혹시 나쁜 행동을 하더라도 그건 아직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라서 그런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을 조금 더 유지할 수 있게 하고 싶다. 굳이 내가 전래동화와 세계명작을 통해 이 작은 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사그라들게 하고 싶지 않다. 선행학습을 이유로 또는 교육한다는 이유로, 이제 겨우 유치원생인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어지럽히는 건 싫다.
세상에 없으면 안 될 또는 무조건 경험해야 하는 책은 없다. 그래서 ‘몇 살에 꼭 봐야 해요’라는 말에 절대 현혹될 필요가 없다. 내 아이의 발달정도와 취향 그리고 부모의 교육관과 일맥상통하는 책을 보여주면 되는 일이다. 난 그저 지금 우리 아이가 책을 좋아하고 독서를 즐기는 아이이길 바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