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교의 철학> 을 읽고
나의 명제들은 이런 점에서 사실을 밝게 드러낸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 명제를 통하여,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그것을 극복하고서 올라오면, 결국은 그 명제들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올라온 다음에는 사다리를 치워야만 한다.
그러면 그는 그 세계를 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는 상황에서는 단지 침묵해야 한다.
<논리철학논고, 비트겐슈타인>
젊음의 열정은 세상의 베일을 벗기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고는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내 결코 세상의 비밀에 완전히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 인간은 그러기에 영원히 가슴앓이를 할지도 모릅니다. 미완성인 채로 살아가야만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열정이 도달하는 곳은 세상에는 비밀 따위는 없다는 인식일 것입니다. 세상은 베일에 가려져 있지 않습니다. 항상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아무런 비밀도 품고 있지 않기에 세상은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무에서 시작하여 유를 만들어내려는 우리의 탐구는 언제나 무로 귀결됩니다.
이러한 무에 대한 인식은 - 지금까지 지식을 통해서 사다리를 만들어왔던 자아에게 허무감을 안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명제가 말하듯 올라왔다면 사다리를 발로 차야 할 것입니다. 분노와 허무가 우리를 덮칠지도 모르지만, 언제나 결연한 의지를 품고, 다시 세계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이 있는 그대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유의 바다에 침잠하게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자신을 내려놓고 그 자체로 완전해서 받이들이기만 하면 되는 세계를 창조한 신에게로 닿아야 합니다. 또는 자신을 죽임으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세계와 맞닿아야 합니다.
세계를 언어로 표명하려 한다면, 세계와 나의 관계는 나와 그것의 관계로 전락해 버립니다. 신을 언어로 규정하려 한다면 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신을 만날 수 없습니다. 세계를 언어로 가려버린다면 우리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세계를 향유할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하이데거의 강연처럼 "인간은 시적으로 거주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분노와 슬픔이 만들어내는 상처로부터 너무 많은 사유가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스스로를 돌보는 일입니다. 무로 귀결되는 삶이 부조리해 보일지라도,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사랑해 보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삶을 살아가는 일은 사유하는 일이 아닙니다. 만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일상으로 깨어나십시오. 삶은 불안을 가지고 탐구해야할 미지가 아닙니다. 편하게 향유하고 만나는 여정의 장소입니다. 우리는 침묵을 통해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마주합니다.
"올바른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선사는 "쌀죽의 냄새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