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아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극복할 수 없었고, 단지 그것을 기만할 수 있었을 뿐이고, 그것으로부터 단지 도망칠 수 있었을 뿐이다. …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 그것은 단 한 가지 원인, 딱 한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나를 너무 두려워하였으며, 나는 나로부터 도망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 <싯타르타, 헤르만 헤세>
"자아를 언제나 이드에"
프로이트는 자신의 정신분석치료의 핵심을 언제나 위의 한 문장으로 축약하고는 했다. 이드란 무엇인가. 이드는 삶을 향한 자아의 원초적인 본능이자 욕망이다. 이드란 우리 속에 언제나 내재되어 있는 동물적인 본능이다. 사회가 허용하지 않는 원초적인 본능이다. 이성을 향해 내달리는 폭발적인 성욕. 타자를 향한 잔인한 공격성. 금지된 것을 부숴버리고 싶어 하는 폭력성. 우리가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봤을 때 언제나 억누르고 억제해야만 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 바로 이드이다. 우리는 이드가 만들어내는 지옥을 겪는다. 세상의 지옥은 인간의 이드가 만들어내는 지옥이다. 불합리와 폭력들로 점철된 세상은 인간의 이드가 발현된 결과이다. 이드는 그래서 강력한 도덕의식인 초자아의 중재를 받는다. 이드와 초자아의 중재사이에 언제나 자아가 위치한다. 자아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자 '악'을 대표하는 이드(id)와 인간의 강박적 도덕관이자 '선'을 대표하는 초자아사이에서 언제나 흔들린다.
이런 자아의 흔들림이 인간의 고통을 만들어낸다. 모든 인간의 고통은 필연적으로 초자아와 이드를 중재하려는 자아의 갈등 속에서 태어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병리를 이러한 인간정신의 삼중구조를 통해서 설명한다. 그렇다면 왜 프로이트는 자아를 '선'을 대표하는 초자아가 아니라, '악'을 대표하는 이드에 두라고 말했을까? 프로이트가 이해하기에 신경증(인간의 성격구조에 따른 정신병리를 뜻하는 심리학적 용어)을 앓는 대부분의 인간은 너무나도 강한 이드(id)가 아니라, 반대로 너무 강한 초자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신경증을 앓는 인간은 순진한 인간이다. 그들은 삶 속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세상의 악과 자신의 내면 속 이드(id)의 영역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한다. 그러기에 그들의 자아는 너무나도 연약하다. 그들은 그러기에 불합리와 부조리를 점철된 세상을 직면하지 못한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강박적인 초자아로 도망가서 스스로를 허상의 도덕으로 보호하려 한다.
그러므로 프로이트는 자신의 환자의 자아를 이드에 익사시킨다. 이드로 끌고 들어가 그곳에 던져버린다. 환자가 도망가려고 하면 다시 끈질기게 쫓아가서 환자 스스로가 바라보아야만 하는 그 내면 속 지옥을 직면시킨다. 그 지옥과 같은 이드 속에서 도망가지 않고 살아남을 때까지, 인간의 자아를 단련시킨다. 그 지옥을 편하게 유영할 수 있을 때 비로소야 인간은 스스로의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이드를 자신의 자아에 편입시킨다. 자신의 내면 속 괴물을 무심히 바라볼 수 있는 인간만이 자신 안의 내재된 폭력성 속에서 영웅적인 가능성을 엿본다. 그는 이드 속의 원초적인 욕망이 반드시 악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초자아가 반드시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선악의 저편으로 넘어가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자아의 비밀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그는 이드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엿본다. 그것은 이드가 가지고 있는 폭발적인 에너지이다. 영웅적인 잠재력이다. 그러기에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잠재력과 에너지를 봉인시키지 않고 해방시킨다. 그는 자신의 어두움을 선으로 승화시킨다. 마치 자신의 트라우마를 상징으로 새긴 배트맨처럼.
그의 아이디어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니다. 프로이트의 생각은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지성들의 가르침과 맞닿아있다. 그는 다만 정신분석학과 심리상담이라는 독특한 형태로 인류의 철학적 지혜를 부활시켰을 뿐이다.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돌이켜보자. 그는 왕국의 왕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지켜주는 성벽이 허상임을 깨닫고, 출가하여서 세상 속으로 여정을 떠난다. 그는 불타고 무너져내리는 부조리의 세상 속에서 , 욕망들이 서로를 부시고 멸망시키는 잔혹한 세상 속에서도 평온을 꿈꿨다. 해탈에 도달했다. 그는 하나의 자아가 하나의 세상이며, 하나의 세상이 하나의 자아임을 깨닫는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처럼,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은 곧 자아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니. 우리는 비합리와 폭력으로 점철된 세상의 고통을 통해서 우리 속에 존재하는 괴물을 마주한다.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준 세상의 폭력이 우리의 내면 속에서도 잠들어 있음을 깨닫는다. 이상을 버리고. 순진한 마음을 버리고. 기대를 버리고. 삶의 잔혹한 진실을 마주한 자에게만 진정으로 삶을 시작할 기회가 주어지는 법이다. 그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진다. 이 부조리한 세계를 회의하면서 살아갈 것인지.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서 삶을 사랑할 것인지. 역사의 지성들은 모두 후자를 택한다. 삶을 사랑하는 지혜를 보여준다. 부조리 속에서 피어날 수 있는 강인하고 아름다운 영웅적인 인간의 가능성을 믿었다.
예수의 이야기를 돌아보자. 그의 이야기 역시 싯다르타의 이야기와 동일하다. 구약에서 그는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이상적인 삶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는 신약을 통해서 직접 그 모범을 보인다. 절대자라는 자리에서 내려와 자신의 피조물과 동등한 존재가 된 예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부조리한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바침으로써 사랑을 실현한다. 그는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인간의 이상 - 영웅적인 삶의 이상을 직접 보여준다. 그는 절대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피조물들이 악으로 물들여놓은 세상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자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위해서 그들의 죄를 대속해서 희생한다. 그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으로 부조리한 세계로 걸어 들어와 사랑을 실현했다.
예수가 아니더라도. 역사의 모든 위대한 지성들은 똑같은 선택을 했다. 그들의 종착지는 서로 모습은 다르더라도. 이토록 부조리하고 고통스러운 세상을 직면하고도 사랑하는 것을 택했다. 그 사랑은 삶을 향한 초인적인 저항(니체)일 수도. 자아의 죽음을 통한 해탈(싯다르타)일 수도. 타자를 향한 사랑(예수) 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부조리한 세계를 향해서 여정을 떠난다. 그 부조리한 세계는 우리의 자아 속 이드(id)이다. 우리는 그 부조리 속에서라도 인간 구원의 유일한 가능성 - 삶을 향한 사랑을 실현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