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건축
태어난 직후, 사람의 마음은 순살 아파트다.
세상에 태어났다. 마음 속에선 차근차근 건물을 세우게 될 것이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정서적 안정을 얻게 된다는 말이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경우엔 순살 초가집이 되는 것이다. 안그래도 최소한의 재료로만 지은 집인데 벽에는 금이가고 창호지는 찢어져 너덜너덜 할 터이다. 이런 경우는 무너진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후의 행동은 여러가지가 있을 텐데 그 중 몇 가지를 말해보려 한다.
첫 번째는 부서진 잔재들을 부여잡고 우는 행위. 이미 산산조각 나서 먼지로 밖에 안보인다. 허나 마음의 주인에겐 그렇지 않은 듯 하다. 어떻게든 그 잔재로 다시 집을 지으려 한다. 집이 아니어도 좋다. 하다 못해 그저 앉아서 쉴 낚시 의자라도 좋다는 심정이다. 이 때는 시야가 좁아져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신뢰와 불신이다. 이미 무너진 재료만이 건물을 지을 수 있다는 신뢰. 다른 재료들로는 건물을 지을 수 없다는 불신. 단 한 사람에게만 의지했을 때, 단 한 사람만을 믿었을 때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을 달달 볶으며 '내 옆에 있어줘! 위로해줘! 공감해줘!'를 목이 터져라 외칠 것이다. 골 때리는 것은 속으로만 외친다는 것이다. 당하는 사람은 속이 썩어 나간다. '나한테 뭘 바라는 거지? 왜 이리 심술이지? 왜 나만 괴롭히지?' 당신도 누군가의 재료일 테다. 당신도 누군가를 재료로 쓸 것이다. 생각해 봐라. 당신으로 이루어진 건물이 부실하진 않은가? 누군가로 이루어진 당신의 건물은 안녕한가?
두 번째, 무너진 건물을 한참 바라본다. 그 때 무언가를 깨닫는다. 이것은 그에게 터닝 포인트가 된다. 이 순간, 그는 정서적으로 성장한다. 이 재료를 이 부분에 쓰면 안되는 구나, 기둥이 여러 개가 있어야 하는 구나, 이 재료는 이제 힘을 다했네, 등등, 건물을 점검한다. 이에 대해 내가 더 덧붙일 말은 없다. 무너진 건물에서 오류를 파악한 뒤 건물을 다시 세울 것이다. 한 층 발전된 기술로. 그리고 나아가선 정기적으로 점검을 할 것이다. 더불어 나는 다른 건물에게 어떤 존재인가까지, 성찰이 가능하다. 당사자의 마음에 맞춰 적재적소의 재료로써 활약할 것을 기대한다.
무너진 건물의 후속처리에 대해 알아보았다. 모두가 후자의 경우라면 참 좋을 테지만 그렇지는 않다. 게다가 더 좋은 경우도 있다. 바로 무너지기 전에 재건축하는 것이다. 재개발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는 건강하게 거리를 두고, 내 건물에 노상방뇨를 하는 자에겐 단호하게 한 마디 할 수 있어야 한다. 건강한 마음, 정서적 안정, 성숙한 감정 조절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