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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아민 Jun 20. 2024

아오모리로 도망가신 할아버지의 일기장

언어의 사무침

하나


지하철의 양 끝 자리는 언제나 공석이 아닙니다. 그 옆, 혹은 그 옆 자리는 간혹 가다 비긴 합니다만 끝 자리는 쉽게 비지 않습니다. 다른 곳은 모르겠으나  이 곳의 사람들은 끝 자리를 좋아하기에 그 곳을 항상 채우려 합니다. 저는 상관 없다-는 쪽이었으나 최근 들어 저 역시 끝 자리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누구 하나 기댈 곳 없는 이 곳에서 끝 자리의 오른쪽 혹은 왼쪽의 벽면에 기대는 것은 나름 위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자리에 앉을 때에는 허리가 곧게 펴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공휴일의 퇴근 길은 허전합니다. 그러나 이 허전함은 좋은 의미로 쓰입니다. 범일의 퇴근길은 언제나 붐빕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밀고 서로를 째립니다. 언젠가는 밀지 말라는 외침을 들었습니다. 더 자주 듣는 것은 내리겠다는 말입니다. 아주 간혹 듣는 것은 욕입니다. 공휴일의 허전함이 좋은 의미로 쓰이는 이유입니다.


물론 저는 항상 귀를 막고 다녀 제가 아는 것이 다는 아닙니다.


다수가 내리는 곳은 환승역이리라고 감히, 짧은 생각으로 예측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내리는 곳은 그들의 집입니다. 다시 말해 다수가 내리는 곳은 환승역의 다음 역, 그 다다음 역입니다. 이를 확신한 것은 지하철이 아닌 버스에서입니다. 사람들은 환승을 위해 역에서 내리지 않습니다. 퇴근을 위해 아파트 앞에서 내립니다. 환승이란 도대체 언제 하는 것이며 왜 나는 그러한-퇴근 시간에도 환승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릴 것이라는-생각을 하였나 따위에 대해 잠깐 생각했습니다.


제 출퇴근 시간은 불규칙합니다. 출근이 오후 2시일 수도, 오후 7시일 수도 있습니다. 퇴근 또한 오후 3시일 수도, 오전 1시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불규칙적인 시간 덕인지 저는 곧잘 앉아서 갑니다. 앉아서 가는 것은 생각보다 무료합니다. 책을 읽기도 하고 영상을 보기도 합니다만, 무료함은 여전합니다. 그럴 때면 읽던 책이나 보던 영상은 잠시 뒤로 하고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봅니다. 역사에 멈출 땐 밖으로 껴안고 있는 두 사람이 간간히 보입니다(제가 타는 호선이 특히 그런 것 같습니다.). 선남선녀겠지요. 그들이 제 연락처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잠시 아주 약하게 듭니다. 그럴 때면 그들을 유심히 보다가도 별 쓸모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립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홀로 지하철에 오릅니다. 그들이 제 연락처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그럴 때면 그들을 유심히 보려다가도 아주 무서워져 눈을 감습니다. 펼쳐둔 책의 글자는 유유히 떠다닙니다. 켜진 영상의 소리는 한 없이 작아집니다.



이따금 알 수 없는 두통에 시달립니다. 아니, 거의 매 초 시달립니다. 누군가는 신이 왔다고 하고 누군가는 숙면을 취하라 합니다. 또 누군가는 답을 하지 않습니디. 저는 누군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무시를 하기도 합니다. 무엇이 좋은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민이 깊어지는 밤이면 근육통이 함께 옵니다. 이런 고민으로 지새운 밤 끄트머리의 아침이면 며칠 정도는 피를 토하기도 합니다. 혹자들은 별 게 아니라 합니다. 저는 정말 별 것 아닐까봐 병원을 가지 않습니다. 이렇게라도 별 것인 삶이어야 살아갈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매 순간 두통과 함께인 머리를 달고 다니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뒤를 도는 찰나에도 뇌가 두개골에 부딪히는 느낌이 깨름칙합니다. 안경을 써도 시야가 흐릿합니다. 초점은 항상 나가있습니다. 이리저리 부딪힙니다. 넘어지곤 합니다. 왼쪽 안면 근육을 사용하여 얼굴을 찡그립니다. 그리하여 이 얼굴은 꽤나 비대칭입니다. 그 탓은 두통으로만 인한 것은 아닙니다. 좋지 않은 자세의 영향이 차곡차곡 쌓인 것이기도 합니다. 전 전체적으로 비대칭합니다.


정신은 물 속에서 허우적거립니다. 눈, 코,입만 수면에 떠 있고 잠겨있는 몸은 무겁습니다. 잠겨있는 뇌는 먹먹합니다. 물 속은 아주 어둡습니다. 물 속은 소름돋게 모든 것을 잡아먹습니다. 전자는 저만 아는 것입니다. 후자는 모두가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는 제게 몸과 뇌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모두는 제 안면만을 봅니다. 이인증으로 인해 저는 제 모습이 보이는 듯 합니다. 저는 제 모든 신체가 보입니다. 몸은 무겁고 뇌는 먹먹합니다. 안면은 웃습니다.

다음 집으로 들어갑니다.



헷갈리실 겁니다.



먹는 것과 관련하여 문제들을 갖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먹습니다. 지나치게 먹지 않습니다. 먹어야 할 것을 놓칩니다. 먹지 말아야 할 것.


다섯


11월입니다. 사무치는 것들이 있습니다. 외로움, 그리움, 괴로움. 명사가 아닌 것들을 명사로 만들어 적습니다. 명사들이 사무쳐야 합니다. 명사들은 ‘사무치다’라는 동사로 흘려보냅니다. 그러나 형용사는 저를 곧장 수식합니다. 나를 곧이 곧대로 설명하려 합니다. 이를 기억하며 언어를 익혔습니다. 말이 튼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글을 쓸 뿐입니다. 비언어는 말 그대로 비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어만을 익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저를 울음으로 이끌었습니다. 언어를 안다는 것은 비언어를 안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양수와 음수 사이엔 영이 있습니다. 언어와 비언어 사이엔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저는 언어와 비언어 사이에 껴서 영원토록 혼란을 겪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를 영 탐탁지 않게 보기도 합니다. 언어와 비언어 사이의 영은 도대체 무엇인지, 저는, 영 알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말이 없습니다. 이는 무언어인지 비언어인지 영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영의 영역인 저는 영원토록 혼란만 겪습니다.


12월입니다. 언어를 안다는 것만으로 무언어와 비언어를 해석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의 존재로 그 사이의 영을 방증할 수 있습니다.


1월입니다.


2월


3


여섯


… … .


なな


漢字たけで書きたいですけど、あまり多くじゃないからひらがなで書きます。


これは、


どうしても何もしないの方がよさそうです。


間違いがあります。でも、修正していません。僕もできるのを見せたがったです。


ʕ⁎̯͡⁎ʔ༄


実は僕じゃないくて私です。


여덟


번역을 하면



헷갈리실 겁니다.


아홉


내일이 오면 오늘이 됩니다.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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