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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먼파워 Aug 19. 2024

운명은 한 순간에

운명의 미스터 X

“오늘부터 너의 미스터 X가 될 거야.”

아무 준비도 없는데 그가 훅 치고 들어왔다.     

그와 나는 같은 대학, 같은 학과 선후배 사이였다. 그를 처음 본 것은 광주 고적 답사에서였다. 그의 첫인상은 단정하고 매력적이었다. 까칠한 머리카락이 잘생긴 두상 위로 삐죽삐죽 자라고 있는 것을 보아,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듯 했다. 그는 마치 잘 다듬어진 조각상 같았고,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저 선배 괜찮네.’라고 생각했지만, 그저 그 정도였다. 딱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은 날은 따로 있었다. 11월 3일 토요일, 체육수업으로 시내 볼링장에서 볼링을 치고 있었다. 볼링장 안은 공 굴러가는 소리와 핀이 쓰러지는 소리로 가득했는데 갑자기 주변이 웅성거렸다. 

“장비 선배가 왔어.” 

라는 소리에 모든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모두들 볼링을 치다 말고 난리가 났다. 여학생들만의 수업에 남자 선배가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는 누구를 만나러 온 것일까?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수업이 끝난 후, 후배들 사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를 두고 나는 친구들과 함께 볼링장을 천천히 빠져나오고 있었다.

“장비 선배 진짜 누구 만나러 온 걸까?” 

“아마도 나 만나러 온 것 같아.”

“정말?”

상상도 못 했다는 표정으로 친구들은 나를 바라보았다. 곧이어 그가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점심 사줄게. 가자.”      

일 년에 네 번, 일 학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이 학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끝날 때마다 일명 골빈당 멤버 내 친구들은 명동 칼국수를 먹으며 그동안 시험공부 하느라 애쓴 자신들을 위로하곤 했다. 이런 우리의 취향을 아는지 그는 칼국수를 사주겠다고 했다. 식사를 마친 후, 나와 할 이야기가 있다며 그는 친구들을 집으로 보냈다. 그리고 우리는 버스를 탔다. 평소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다며 나를 이끌고 간 곳은 공사를 하다만 공원 부지였다. 채석장에서 옮겨온 돌들이 군데군데 쌓여있었고 넓은 논에는 가을에 추수하고 남은 벼 밑둥들이 반쯤 물에 잠긴 채 남아 있었다. 마치 미완성의 감정들이 엉겨 붙어 있듯이 여기저기 정돈되지 않은 채 드러나 있었다. 그는 울퉁불퉁한 논길을 앞서 걸었다. 나는 뒤에서 조심스럽게 뒤따랐다. 그러다 돌이 빠져 있고 뛰어야 간신히 넘을 것 같은 지점에 이르렀다. 뛰어넘으려던 순간, 그가 손을 내밀었고 엉겁결에 그의 손을 잡게 되었다. 얼른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의 손이 강하게 움켜쥐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내게 말했다. 

“오늘부터 너의 미스터 X가 될 거야.”     

순간적으로 겁이 덜컥 났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는 이곳에서 그의 갑작스러운 고백은 예고도 없이 몰아치는 폭풍 같았다. 서둘러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그는 버스에서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나에게 고백하기 위하여 전날 미리 와서 돌을 뽑아놓았다고 한다. 그 정성을 생각하면, 그가 내 반응에 얼마나 실망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복잡한 심경이 버스 안 공기마저 무겁게 만들었다. 

 그 당시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하고 찰턴 헤스톤이 주연을 맡은 영화 벤허가 상영 중이었다. 장장 200분이 넘는 대작이었다. 실연의 쓸쓸함을 달래보려는 듯, 혼자 영화를 보겠다며 그는 나에게 잘 가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 뒷모습이 왠지 애처로워 보였다. 돌아서는 그에게 말했다. 

“나중에 커피 사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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