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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대끼는 삶 Aug 16. 2024

먹고 살아가기- 부대끼게 하는 세상(1)

휴대폰 알람이 울린다. 아침 8시 약을 먹을 시간이다. 저녁 8시에 또 울릴 것이다. 요즘 매일 부대끼는 일의 하나다. 정해진 시간 없이 식후 30분 복용 지시에 맞추어 대충대충 약을 먹어오다 작년 12월 말에 뇌경색으로 된통 당하고 나서 바뀐 생활 습관이다.


담당 의사의 처방 압박에 “지금 먹으면 평생 먹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별로 의미 없는 말을 거부의 의사로 표현하였는데, “밥은 평생 먹지 않느냐?”는 덤덤한 답이 돌아왔다. 부작용에 대한 내 마음속의 불만까지 누르겠다고, 약을 먹지 않는 위험과 약의 부작용은 손익 면에서 견줄 수가 없다는 말을 바로 이어서 한다. 이렇게 하여 교과서에 나와 있는 처방 시기보다 1년 먼저 처방약을 먹기 시작했고, 이 나이 되도록 처방약을 먹지 않고 지내고 있다는 쓰잘데없는 자부심은 무너졌다.


브런치에 부대끼는 삶이란 필명으로 글을 쓰게 되어, 부대끼는 삶은 어떤 것인지 그 성격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봤다.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는데, 시간에 쫓기거나 구속되어서 하는 일이 삶을 부대끼게 하고, 내 의사와 관계없이 또는 내 의사에 반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나를 부대끼게 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인간에게 부대끼는 일을 하게 하는 주체는 크게, 자연과 사회, 인간이 있다. 자연의 압박은 만인에 대해 평등하지만, 인간은 처지에 따라 대응하는 방식이 아주 다르다. 자연이 부과한 부대끼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먹이와 필요한 것(necessity)을 구하지 못하면 삶을 이어갈 수가 없으므로 이보다 더 부대끼는 일은 없다고 하겠다. 국가와 국민 단위에선 민생(民生)이 된다. 사회의 생산체제가 산업사회로 발전한 이후에 금융이 숨어서 뒤를 봐주다 언제부터인가 얼굴을 내밀고 앞에서 끌어오면서 오늘날 인간이 만든 사회는 화폐를 기반으로 삶을 꾸리게 하고 있다. 돈이 최고이고 대부분의 삶을 돈으로 해결한다. 이런 형편을 물신주의네 물질만능주의라고 하여 비판하기도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국세청에서 분류하는 돈을 얻는 방법은 크게 3가지 정도가 있다. 첫째 노동의 대가로 돈을 얻는 방법이다. 근로소득이다. 둘째로 돈으로 돈을 얻는 방법이다. 이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기업이나 가게를 직접 운영하여 얻는 사업소득이고 다른 하나는 돈을 위탁하여 얻는 이자나 배당, 임대 소득 등의 자산 소득이 되겠다. 세 번째는 가만히 앉아서 얻는 불로소득(不勞所得)이다. 상속소득, 증여받은 소득, 개발이익 등이 여기에 해당하겠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손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태어나므로 돈이 없는 것은 똑같다. 자연은 평등하다. 하지만 태어난 처지에 따라서 입에 무는 숟가락의 소재가 아주 달라진다.


똑같이 맨손으로 태어난 인간이 애초에 어떻게 자산을 축적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공정하지 않은 면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산업사회에서 100을 생산하고 생산 요소 주체별로 100을 화폐로 나눈다. 그러면 생산요소의 주체는 화폐와 생산물을 교환하여 생활하고 화폐 100은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아온다. 이런 과정이 생산과 소비의 순환으로 알려져 있고 단순 재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한 주체가 소비를 줄이고 그만큼 저축하여 자산을 축적할 수 있다. 이런 자산은 욕망을 억제하고 필요를 줄인 대가로 공짜가 아니니 나무랄 일이 아니다. 이러면 남는 생산물이 있게 되므로 경영자는 축소 재생산을 하여야 한다. 만약 경영자의 노력으로 수출하여 돈을 회수할 수 있으면 경영자의 노력은 칭송받을 만하다. 경영자는 자신의 노력에 힘입어 단순 재생산을 하거나 확대 재생산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단순하게 말해서 애초에 분배를 80만 하고 20은 남겨서 수출하고 그 대금을 나누지 않고 한 요소 주체가 독점하는 상황을 알면, 뭔가 공정하지 못하고 정의가 무너졌다고 생각하게 된다. 굳건한 생산과정의 통제 체제에서 후자의 과정이 반복되면 소유 자산의 차이는 점점 벌어지고, 자산 소득까지 보태어지면 그 간격은 계산이 어렵다. 자산의 양극화 현상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고 구조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사회체제는 구조적으로 노동을 팔아서(사실은 생명의 시간을 파는 것이지만) 돈을 얻고 먹을 것을 구할 수 있게 하였는데, 어쩌다 일자리가 없는 실업 상태가 되면 달리 돈을 구할 방법이 없는 구조이기도 하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보통 빚으로 부대끼는 삶을 이어간다. 순자산 계정이 양수가 아니면 부채 계정만 계속 증가하는 사회구조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먹을 것을 스스로 구하라고 부추길 때는 스스로 노력으로 구할 수 있는 환경은 제공하였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수렵 채취도 그러한 환경이라고 하겠다. 이 경우엔 인간은 생산자가 아니라 전적으로 소비자였다. 자신이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농경사회 이후의 인간은 생산자이면서 소비자이다. 그런데 오늘날 굳건한 산업사회 체제와 구조는 생산자의 역할을 마음대로 못 하게 막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빚으로 살더라도, 용을 쓰고 길을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주어진 길만 가게 하므로 실업 상태에선 정말 심하게 부대낀다. 실업급여를 세 번 받아본 필자는 부대끼는 강도를 잘 안다. 이때는 빚 외에는 초근목피조차 구하기 힘들다.


오늘날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은 자신이 장소를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태생적으로 국가와 암묵적인 계약을 하고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일차산업혁명이 꽃을 피우던 시기에 루소는 당시 절대군주제와 억압적 사회 제도의 폐해를 자유라는 어려운 단어로 물리치고 사회계약을 주장하여 프랑스혁명을 이끄는 민중을 열광하게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사차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고 생산체제가 크게 바뀌고 있다. 체제 전환의 시기에 겪었던 과거의 혼란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一般意志)를 모아서 새로운 사회계약이라도 맺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새로운 계약에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위임하는 대가로, 진실로 생존을 넘어서 인간의 존엄이 지켜지는 삶을 보장 받을 수 있는 내용이 있으면서 실제로 실행된다면, 다음 세대는 좀 덜 부대끼면서 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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