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츠나 Sep 25. 2024

#8 휴가 가는 며느리의 여행 필수품, 시아버지 빵

젖먹이를 떼어놓고 떠나는 어떤 여행에 대하여

캐나다 시댁에서 더부살이하는 저는 이를테면 신입사원입니다. 입사한 지 이제 2년 반이 조금 넘었고, 제 뒤에 입사한 사람이 없으니 막내지요. 대체로 행복하지만 가끔은 서럽습니다. 이건 비밀인데, '가족 같은' 회사라는 말은 결국 '진짜 가족'은 아니라는 뜻이잖아요.



첫 휴가를 떠난 맏며느리


쓸쓸하지만, 결혼을 하고 남편의 가족과 '가족'이 된 것이 회사생활에 가깝다고 느낍니다. 시어머니, 시아버지는 저에게 과분하도록 좋은 분들이시지만 우리 회사에 '이사'쯤 되는 그분들이 마냥 편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요. 묘하게도, 우리 팀에서 팀장을 맡은 제 남편도 엄밀히 '남'이니 꽤 조심해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이 상사분들로부터 정말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한국으로 혼자 떠나는 2주 동안의 여행입니다.


저의 주요 업무, 이제 18개월이 된 아이를 돌보는 것에 대한 인수인계도 일찌감치 진행됐습니다. 낮잠 재우는 법, 용변 후 씻기는 법, 각별히 주의하고 있는 여러 사소한 것들. 시부모님은 꽤 열정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연습도 했지요. 저의 한국행과 동시에 '엄마 젖'을 졸업하게 될 아이가 보채면 어떻게 할지 회의도 열렸습니다. 대가족 좋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이 좋은 사람들이 아이를 지켜주는 동안 얼른 휴가 다녀와야지, 행복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아가야, 엄마 우유한테 안녕해


아이가 젖을 찾는 순간은 제가 하루 중 가장 사랑하는 시간입니다. 입술을 맘맘맘 부딪히며 우유 먹는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딸에게 "어디서 먹을래?" 하면 조그만 손가락이 초록색 등받이를 가리킵니다. "누구랑 먹을거야?" 하면 곰돌이와 토끼, 야옹이. 그날그날 운 좋은 동물 친구들이 딸아이에게 한 아름 안겨 저에게 함께 오지요. 아이와 동물 인형을 무릎에 한가득 끌어안고 젖을 물리면, 제 마음속에 수백만 평 잔디밭이 펼쳐지고 색색의 꽃이 일제히 피어나는 것 같습니다. 빈틈없이 가득 찬, 눈물겹게 아름다운 행복이 거기에 있습니다.


맘맘맘 하며 안겨 오는 딸을 거절하는 것은 미처 생각 못 했던 높은 벽이었습니다. "아가야, 넌 이제 아주 작은 아기가 아니란다. 네가 두 살이 되고 열 살이 되고, 스무 살이 되어도 넌 나의 아기겠지만. 지금 너는 무럭무럭 자라서 이제 엄마 우유한테는 안녕해도 되는 거야. 너에게 언제까지나, 뭐든 주고 싶은 엄마 마음은 똑같으니 슬퍼할 것 없어." 아이가 이해 못 할 말을 매번 하면서 울지 않는 게 꽤 쉽지 않았습니다. 빨개진 눈으로 방을 나서면 가족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와서 저를 안아주었습니다.



시아버지가 빵을 구울 때


제가 캐나다를 잠시 떠나오기 전날이면 어김없이 집에는 빵 굽는 냄새가 납니다. 먼 길 떠나는 저를 위한 것입니다. 빵 굽는 냄새를 맡으며 짐을 쌀 때는, 빵 자리는 남겨둡니다. 매일 시아버지로부터 소위 '급식'을 받아먹고 사는데, 집 떠날 때까지 챙겨주시는 게 영 민망하고도 기쁩니다. '잘 챙겨 먹고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한국식 인사를 듣는 기분입니다. 마치 영영 떠나는 듯이, 대단히 쫓겨나기라도 하는 듯이 눈물을 찍어내며 짐을 꾸렸습니다.


떠나는 날에는 시아버지가 공항까지 와서 저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그동안 힘내서 아이를 돌봤으니 휴가를 떠날 자격이 충분해. 부디 즐겁게, 잘 다녀오렴." 나직한 음성과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마음에까지 따뜻하게 닿았습니다. 빵과 머핀이 든 저의 여행 가방도 제 마음도 든든하니, 없던 힘을 내 씩씩하게 출국장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젖 찾는 아이를 두고 떠나는 휴가가 즐거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친정 다녀오는 길이 쓸쓸하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이와 남편, '가족 같은' 가족들이 있는 여기가 바로 '돌아올 곳'이고 내 집이니 말입니다. 그걸로 다 괜찮습니다.



시아버지가 요리하실 때 거드는 척이라도 좀 하려고 얼쩡거리면 어김없이 음료와 간식을 받게 된다. 이날은 0.5도짜리 맥주와 갓구운 머핀을 받았다.
시아버지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레시피 책과 가족들로부터 전해내려오는 노트를 요리 중에 몇 번이고 본다. 나는 레시피를 짚어 내려가는 시아버지의 손끝이 참 좋다.



What's New Today?

아이가 오늘 처음 한 일 : 어디선가 익숙하지 않은 소리가 들리면 검지손가락을 위로 치켜들며 "Noise(소리)!"하고 말한 후, 양손으로 눈을 가리며 "Hide(숨어)!"하고 말함.

가장 행복했던 순간 : 아이가 내 볼을 쓰다듬으며 "예뻐!"하고 웃었을 때


매거진의 이전글 #7 도망친 맏며느리에겐, 시아버지 도시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