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상상>, <패터슨>, <듄: 파트 2>, <탑건: 매버릭>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 연구소 제2회 문화평론상 최우수상 수상작
※ 스포일러 포함
영화가 시작하면, 마치 할리우드 고전 SF 영화를 연상시키는 자막이 검은색 배경을 가득 채우며 찬찬히 올라간다. 인터넷을 통해 감염되는 바이러스가 돌아 모든 기밀이 유출되었고, 전 세계의 네트워크가 우편과 전신 시대로 회귀하였다는 독특한 설정의 자막만으로 영화의 장르는 신속하게 SF로 전환한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2021년 옴니버스 영화인 <우연과 상상> 중 마지막 에피소드 <다시 한 번>의 오프닝이다. 과학 기술의 급격한 발전이 이루어진 21세기에 제작된 영화들은 대부분 보편화된 기술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헤어질 결심>(2022)처럼 스마트폰의 액정이 프레임 안에 디졸브 되는 일은 흔하고, <서치>(2018)가 그랬던 것처럼 아예 프레임 전체를 디스플레이와 일치시키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는 지금부터 만나게 될 세계 안에서는 그러한 네트워크의 존재를 배제하겠다는 선언을 관객들에게 제시하면서 시작한다. 모든 이들의 일상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정보통신 기술을 없애면서 영화가 얻는 이점은 어디에 있는가? ‘영화의 죽음’ 이후에 완전히 디지털화된 영화 예술에서 ‘아날로그’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끊임없이 고개를 내미는 까닭은 무엇일까?
짐 자무쉬 감독의 2016년 작품 <패터슨>은 세계와 동떨어진 ‘아날로그 인간’을 내세워 과학 기술과 거리를 둔다. 영화의 주인공인 ‘패터슨’시의 버스 운전기사 패터슨은 시를 읽고 쓰는 게 취미이다. 그는 항상 지니고 다니는 손바닥만 한 노트에 자투리 시간마다 시를 쓰는데, 아내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이를 따로 백업 해두지는 않는다. 인터넷에서 기타를 주문하고, 동영상 강의를 통해 연주를 배우는 아내와는 달리 패터슨은 스마트폰도, 컴퓨터도 사용하지 않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는 흔히 말하는 ‘21세기 디지털 인간’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패터슨의 이러한 행동은 시인이라는 그의 또 다른 자아와 퍽 어울린다. 하루하루가 연처럼 나뉘어 하나의 시처럼 구성된 영화 속에서 일상은 따뜻하고 낭만적인 순간들로 재구성된다. 알람 없이 아날로그 시계로 확인하는 기상 시간, 노트에 시를 쓰며 보내는 점심시간과 극장에서 상영되는 흑백 영화. 이러한 요소들은 그의 탈-기술적 생활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마추어리즘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자무쉬 감독답게, 영화는 패터슨의 행동을 낭만적으로 묘사한다. 그의 일상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우리가 잊고 살았던 것들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돕는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기술은 낭만적 가치와 배치되는 의미를 지닌다. 이른바 ‘현실적인 상황’이 계속해서 패터슨의 삶에 침입해 오는 것이다. 가령 운행 중 버스 엔진이 멈춘 상황에서, 패터슨은 회사에 연락할 전화가 없어서 버스에 타고 있던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빌린다.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그녀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하지 않았냐고 나무라며 재차 스마트폰 구매를 제안한다. 영화 후반부의 하이라이트는 부부가 극장에(아날로그의 상징인 흑백 영화를 보러) 간 사이에 반려견 마빈이 패터슨의 모든 시가 적혀있는 노트를 전부 찢어버리는 사건이다. 평소에 아내는 노트를 잃어버릴 것을 걱정해 시들을 컴퓨터에 백업해 두거나 복사하는 것을 권했지만 패터슨은 이를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고, 결국 그의 아름다운 시들은 다시는 읽을 수 없는 휴지 조각이 되고 만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물성이 점차 옅어지는 시대에서 아날로그의 낭만은 패터슨의 시들처럼 산산조각 날 수밖에 없는 운명일까?
<우연과 상상>에서 기술의 부재는 두 인물이 서로를 동창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네트워크가 단절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이 우연한 만남은 궁극적으로 인물의 내면 깊이 자리한 구멍을 치유하고, 서로 몰랐던 이들이 두 손을 꼭 쥐고 미소 짓게 한다. 마찬가지로 기술의 부재가 사람들이 잊고 지내던 따뜻함과 낭만을 되찾을 수 있게 돕는다고 본 것이다. 시를 적어둔 노트를 잃고 실의에 빠진 패터슨 역시 영화의 결말에 접어들면서 다시 삶의 의지를 되찾는다. 자주 거닐던 폭포 앞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인 시인과의 대화를 통해 시에 대한 애정을 재확인하고, 새로 선물 받은 노트에 다시금 시를 빼곡하게 채워갈 준비를 마친다. 아마 그는 새 노트에 쓰게 될 시들 또한 컴퓨터에 기록하지 않을 것이다. 두 영화는 결국 기술의 부재가 가져올 긍정적 측면을 조명하며, 관객들에게 이를 전달하려고 한다.
그러나 관객의 생각은 조금 다를 수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관계, 역사성, 고유한 정체성이 부재한 ‘비장소(non place)’에 포위된 현대인들은 낭만을 ‘이상주의’로 치부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아날로그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상기시키는 영화들은 따라서 ‘아쉬움’이라는 관객의 도전에 부닥친다. <우연과 상상>을 보며, 관객은 전화가 있었더라면 주인공이 동창에게 더 일찍 연락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품을 수 있다. 또한 <패터슨>을 보면서, 관객은 시를 하루만 더 일찍 백업해 뒀다면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을 삼키게 된다.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극복해 내지만 관객에게는 찜찜한 뒷맛으로 남는 이런 아쉬움은 기술이 부재한 사회의 낭만을 스크린 속에서나 가능한 일로 만들어 버린다. 조금 더 나아가면, 역설적으로 디지털 기술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행위가 되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왜곡이 발생하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우리의 일상에 자리한다. 비장소를 오가는 이들로 가득 찬 현대사회에서 과학 기술은 몰개성한 삶에 안주하게 하는 요소로 기능한다. 비장소의 특성은 영화 <플레이타임>(1967)에서 잘 드러난다. 영화에서는 주인공 윌로 씨를 제외한 모두가 각자의 개성을 상실한 채 틀에 갇힌 것처럼 움직이고 행동한다. 박람회 씬에서 강조되는 것처럼 사방이 화려한 광고 이미지와 안내문구, 홍보문구 등으로 포위되어 있으며 인물 간의 소통은 질문-응답이 명확하게 코드화된 언어와 텍스트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술의 부재는 불가능한 것이기에 스스로의 환상성을 강화한다. 다시 말하면, 영화 속의 세계와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괴리가 관객으로 하여금 설정의 작위성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비장소의 점령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의 일환으로 기술 부재 상황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내세우는 것은 아직까지는 어느 정도 타당해 보인다. 관객이 노스탤지어에 공감할 수 있으려면, 기본적으로 과거에 대한 경험과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의 기성 세대는 디지털, 정보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하기 이전 시기를 경험한 이들이 많다. 문제는 이제 막 청년기에 들어서는 세대가 될 텐데, 이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정보 기술 발전을 접하면서 이를 몸소 체화해왔던 집단이다. 그들에게 비장소, 또는 과학 기술의 침입이라는 위협을 공감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키워드가 필요하다. 아니, 그것은 대신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이 공유하던 가치가 될지도 모른다.
최근에 인기를 끌었던 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Z세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티모시 샬라메를 주연으로 내세운 드니 빌뇌브 감독의 <듄> 시리즈(2021, 2024)는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의 높은 진입장벽에도 불구하고 기록적인 흥행에 성공했다. 원작 소설부터 이어진 듄 세계관의 주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높은 수준의 과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칼과 같은 재래식 무기가 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설정된 속도 이상으로 접근하는 모든 물체를 튕겨 내는 ‘홀츠만 방어막’이 보편화된 것이 원인인데, 이번 영화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듄>(1984)와는 달리 방어막의 묘사에 상당한 공을 들인 것으로 주목받았다. 작중에서 묘사되는 방어막은 설정해 둔 보호 속도 미만으로 접근하는 공격을 막지 못한다는 약점을 지닌다. 따라서 보호막 전투에 대비한 특유의 검술이 존재하며, 영화 속의 결투 씬 등에서 이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총을 사용하는 현대전은 기본적으로 물리적 거리를 요구한다. 적에게 내 위치를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정확히 표적을 저격하는 능력이 필요하며, 작은 숨소리 하나조차 치명적일 수 있다. 반면 칼과 칼이 부딪치는 전통적 전투에서는 육체성이 두드러진다. 인물 간의 거리는 사라지고, 상대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까지 접근해야 한다. 적의 공격을 예측하고 회피하기 위해서는 가벼운 움직임 역시 필수적이다. SF 장르에서는 이례적으로, <듄>은 이러한 전투의 육체성을 강화한다. 이는 파트 2 후반부의 하이라이트인 폴과 페이드 로타의 결투에서 정점에 이르는데, 이때 카메라는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한 공간 안에서 인물의 몸짓 하나하나에 집중한다. 흡사 춤과 같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하는 결투가 폴의 승리로 끝나고 나면,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온다. 마치 고도 기술의 세상에서조차 육체의 대결에서 승리한 자만이 진정한 황제가 될 수 있다는 듯이.
여기서 발생하는 아이러니는 고도의 기술 발전이 오히려 육체성으로의 회귀를 야기한다는 측면에 있다. 총기가 무용지물이 되고, 칼이 다시금 주된 무기가 된 이유는 방어막의 개발, 즉 과학 기술의 발전이다. 다시 말하면,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인간 육체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많은 SF 영화와 소설에서 그러했듯이, <듄>의 독특한 설정은 결국은 육체의 고유한 가치가 존재한다는 믿음, 혹은 존재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일상을 침범하는 기술에 대한 경계, 더 나아가 기술과 코드에 따라 작동하며 개인의 개성과 고유성을 말살하는 미래-비장소를 향한 두려움에 근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듄>이 육체로의 회귀에 대해 다룬다면, 지난 3년간 가장 많이 회자되었던 ‘속편’ 중 하나인 조셉 코신스키 감독의 <탑건: 매버릭>은 여기서 더 나아가 기술을 초월하는 육체성을 역설한다. 우리 시대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인 톰 크루즈가 36년 만에 <탑건>의 피트 미첼로 돌아온다는 사실은 제작 단계부터 화제가 되었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로 대표되는 톰 크루즈의 액션 영화들은 스턴트를 최소화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어떤 이들은 그는 온갖 위험을 감수하며 영화를 찍던 1920년대 무성영화 배우 버스터 키튼을 떠올리게 한다고 평하기도 한다. 영화 초창기 시네마의 운동성을 상징하며 오늘날까지 시대의 표상으로 남은 버스터 키튼처럼, 톰 크루즈는 근 40여 년간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육체성’의 아이콘이었다. 따라서 대표작 중 하나인 <탑건>의 속편을 통한 그의 귀환은, 그 자체로 육체성의 복귀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는 더 분명해진다. 오프닝에서 초음속기의 테스트 조종사로 등장하는 매버릭은 마하 9에 도달하는 시범 비행이 있는 날, 마하 10에 이르지 못하면 프로젝트를 중단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위험을 감수한다. 그는 기술의 부족함을 정신력으로 극복하고 마하 10에 도달하는 것은 성공하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속도를 올리다 결국 마하 10.4에 이르러 기체의 엔진이 파괴되는 사고를 일으키고 만다. 이후 본부와의 통신은 두절되고 매버릭은 스크린에서 사라진다. 당연히 죽음을 암시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매버릭은 바로 다음 시퀀스에서 머리카락만 좀 그을린 채로 태연하게 식당에 들어가며 재등장한다. 김병규 평론가가 지적했던 것처럼, 이 공간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기에 매버릭은 폭발에 휩싸여 죽었고 이후 이야기는 가상일 수 있다는 의심이 드는 것도 타당해 보인다. 바로 이 오프닝을 통해 <탑건: 매버릭>은 관객이 앞으로 보게 될 이야기가 일종의 신화, 혹은 인간 찬가라는 사실을 전달한다. 다시 말해 영화는 마하 10.4에서 발생한 폭발에서도 살아남는 육체성의 아이콘, 어떠한 ‘불가능한 임무’도 수행해 내는 톰 크루즈를 앞세워 기술만능주의를 뒤편으로 내몰고 다시금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사명을 따르는 것이다.
매버릭이 탑건의 교관이 되어 생도들과 임무를 수행하는 내용을 다룬 영화의 메인 플롯 역시 오프닝의 방향성을 그대로 연장한다. 이 영화에서 매버릭은 36년 전의 자신과 같은 생도들에게 육체성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다. 기술의 발전이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진행되는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초월하는 인간의 육체성과 고유성을 미래 세대에게도 전달할 필요성을 가지고 있기에 매버릭은 기꺼이 그들을 훈련시킨다. 이는 마치 36년 만에 인간에 대한 찬가로 돌아온 영화 그 자체와 닮아있는데, 아마 영화의 부제가 ‘매버릭’이 된 이유일 것이다. 즉, 매버릭은 기술의 무분별한 점령에 저항하는 영화의 현신과도 같다. 그리고 그 현신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를 성공시키는 팀을 만들어 낸다. 영화 후반부 첨단기술이 아닌 ‘직감’으로 목표물을 정확히 폭파하는 루스터의 모습은 미국인들의 신화라고 불리는 <스타워즈>에서 데스 스타를 파괴하는 루크 스카이워커와 겹쳐 보이기까지 한다. <탑건: 매버릭>은 신화를 재현함으로써 과거의 가치, 육체와 개성을 복원하고자 한다. 재현의 과정 안에서 기술의 의미는 인간성의 상대적 우위를 강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퇴색되고, 무뎌질 따름이다.
<듄>과 <탑건: 매버릭>은 모두 기술의 약진에 대응해 육체를 제시하는 영화들이다. 이런 영화들이 21세기 들어 더욱 주목받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인간은 태초부터 그들을 규정했던 접촉의 감각을 상실하는 과정에 있다. 종이에 펜으로 시를 쓰는 일, 연락하기 위해 손때가 묻은 편지를 적어 보내는 일 등은 이미 과거의 유산이 되었다. 무언가를 만지고 느끼며 자신만의 고유한 흔적을 남기는 행위는 개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생동의 느낌을 갖게 해 준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최근 몇 년간 필름 카메라나 LP판 수집 등 레트로, 아날로그 형태의 취미가 유행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현실의 일부가 된 기술을 제거할 수는 없기에, 사람들은 스크린이라는 가상의 공간으로 눈길을 돌린다. 스크린을 통해 인간은 그들이 꿈꾸는, 혹은 결핍된 가치를 찾고자 한다. 점차 희미해지는 육체의 감각을 되찾기 위해, 관객은 극장을 찾는다. 날카로운 날을 서로 맞대며 서늘한 감각을 공유하는 세계, 레버를 직접 움직여 적을 조준하는 구형 전투기가 스텔스기를 격추할 수 있는 세계, 관객은 전통적 세계를 창으로 삼아 기술에 파묻힌 일상의 감각을 깨우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영화를 하나의 창으로 보는 관점은 역설적으로 관객과 스크린 사이의 비육체적 거리를 전제한다. 관객은 스크린을 하나의 창으로 볼 수 있지만, 가상의 세계와 시각 주체 사이의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에 창 안의 폭력과 상해에 영향받지 않는다. 이상적으로 작동하는 창은 안과 밖을 구분하는 유리창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비가시성은 관객 스스로가 안전을 보장받기 때문에 가능한 특징일 뿐이다. 스크린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자신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관객은 창 밖에서는 불가능한 사건에 더욱 열광하고 이를 갈망하게 된다. 따라서 육체성을 되찾으려는 시도는 결국 극장이라는 비육체적 공간에 의존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앞서 언급한 노스탤지어의 왜곡을 반복한다. 극장의 공간적 특성에 의해 검의 날카로운 날은 무뎌지고, 전투기의 총알은 그 살상력을 잃어버린다. 과거부터 인간이 공유하던 특성을 이용해 보다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기술 사회에 대항하려는 육체성은 매체 자체의 비육체성이라는 역설을 극복하기 어렵다.
다시 기술에 대한 영화의 저항적 움직임을 논하기 전에, 먼저 영화라는 예술 자체의 기계성에 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영화는 그 등장부터 항상 인간 지각의 기계적 확장으로 간주되어 왔다. 1900년 무렵에는 이동 통신 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기에 영화는 자유롭게 유영하며 인간을 대신하는 인공적 눈으로 기능했다. 영화는 몸 없이 존재하기에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에도 장애물 없이 접근할 수 있었고, 시공간의 거리에 제약되지 않았다. 영화 초창기의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인 지가 베르토프는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를 비롯한 그의 영화들에서 ‘인간 인지의 불완전성으로부터 기계의 분리’를 칭송하기도 했다. 이처럼 인간을 능가하는 영화의 기계성은 때때로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따라서 영화는 그 탄생부터 인간의 고유한 능력에 대한 기술 침입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기원 때문에 영화가 그 근원과 다름없는 기술을 비판하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 본래 인간의 불완전성을 극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등장했던 영화가 탄생 후 100여 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정반대의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이제 영화는 인간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기술의 침입에 대항해야 하는 임무를 떠맡는다. 문득 <터미네이터 2>(1991)의 T-800이 떠오르는 게 단순한 우연은 아니리라. 영화는 죽어 소멸하고 재탄생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편에 서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차차 인간의 감정과 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T-800처럼 영화는 20세기 내내 세계와 인간을 동일시하기 위해 변화해 왔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과 부활을 넘어선 21세기의 포스트시네마를 통해 진화의 새로운 장을 열어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20세기의 끝자락, 영화는 필름 시대에 종언을 고하고 디지털로 이동하기 시작하면서 단순히 기술적 차원에서의 전환만이 아니라 영화 문법 전체의 새로운 단계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스티븐 사비로는 ‘포스트시네마’라고 칭한 디지털 시대의 영화들을 이전의 작품들과 확실히 구분 지었다. 21세기에 들어 기계적, 화학적 구조로 구성되었던 과거의 영화 장치들은 자취를 감추고, 필름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영화에서의 디지털 시대의 도래, 이른바 ‘영화의 죽음’이라는 영화 예술의 새로운 분기점이 우리에게 찾아온 것이다. 가장 뚜렷한 포스트시네마의 징후는 더 이상 영화가(혹은 영화적인 것이) 물리적 현실성에 기반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한 디지털 이미지들은 영화 리얼리즘의 기반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제 영화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시공간을 뛰어넘는 이미지들을 현실과 다름없이 우리에게 제시한다. 카메라와 대상 사이의 존재론적 관계가 과거 필름 시대에 비해 옅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시대의 이러한 이미지들은 보여지는 사실성의 측면에서 확고한 우위를 점하며 새로운 리얼리즘을 구축한다. 다시 말해,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우리는 한때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들이 ‘실재’가 되는 세계와 만나게 된다.
포스트시네마의 물결에서 기존 ‘창’으로서의 영화가 담지하고 있던 극장의 비육체성은 점차 설 자리를 잃는다. 그러한 성질이 아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제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극장은 더 이상 영화를 관람하는 유일한 창구가 아니다. 관객은 VOD로, 넷플릭스로, 심지어 자그마한 비행기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면서도 만족감을 느낀다. 이들에게 영화 속 세계와 자신 사이의 일치 여부는 애초에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여기에 더해, 영화 자체에 대한 몰입보다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영화를 보는 행위가 더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한다. 따라서 디지털 시대의 영화 관객에게 매체 자체의 비육체성은 그렇게 커다란 장애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한편 기술의 부재로 인해 역설적으로 그 필요성을 강화한다는 한계점은 어떤가? 우리가 오늘날 영화를 볼 때 사용하는 기기들-TV, 컴퓨터, 스마트폰, 태블릿-은 과학 기술의 집약체나 다름없다. 따라서 부재는 엄연히 영화 속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필요성을 강화할 정도로 관객의 삶에 침범해 들어오지 않는다. 이제 디제시스는 그 자체로 분리되어 하나의 실재를 구성하는 주체가 되며, 현실에 종속되거나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지위를 지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관객에게는 디지털 기기를 통해서 그 세계를 바라보는 행위만이 허용된다. 마치 천체망원경으로 다른 행성을 관찰하는 것처럼,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일어나는 디제시스 내부 전체를 작은 스마트폰으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들여다보는, 그러니까 시각적 행위가 중심이 되는 상호작용 속에서 포스트시네마의 새로운 리얼리즘은 더욱 빛을 발한다. 디제시스 내부와 외부를 완전히 구분하면서 관객은 더 이상 기술의 부재로 인한 가상 세계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느낄 필요가 없다. 진짜 같은, 아니 디제시스 안에서는 ‘실재’가 되는 영화의 장면들은 인간 내면의 욕구와 상상력, 기호와 의도를 마음껏 늘어놓는 공간이 된다. 그러한 괴리가 해소됨에 따라 이제 관객들은 왜곡 없이 영화의 의도를(비교적) 명확히 파악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아날로그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영화의 육체성-비장소 시대에 저항하는 영화의 속성들-을 모두 그대로 직면한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포스트시네마의 경향성이 점차 짙어질수록, 창작자의 의도는 관객에게 더욱 투명하게 다가간다. 단순한 의도를 영화에 함의하는 이 작은 몸짓들이 기술의 침입을 온전히 막아주는 갑옷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술을 제외하면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보호할 안식처가 또 어디 있겠는가?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이런 영화들이 등장하고, 흥행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희망적이다. 만일 잠시라도 뒤를 돌아볼 수 있게 해 준 그 작품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비장소의 점령은 지금쯤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에 의해 탄생한 영화 예술은 기술의 소산이라는 내재적 한계를 극복하고 그들의 정체성과 고유성을 지키는 수단이 될 수 있을까? 21세기 초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잠정적 결론은 ‘그렇다’라고 내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