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화잡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백하 Jul 02. 2024

2024년 상반기 영화 결산

 올해 극장에서 본 것 중 좋았고 후기를 따로 쓰지 않은 작품들만 추려서 적어보겠읍니다. 전 영화를 미뤄보는 편이라 뜬금없이 사낙타가 올해 결산에 들어가고 그런 것이지요 우하핫

 헛소리 주저리 대충 막 쓰니 이런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순서는 순위와 무관합니다.



1. 사랑은 낙엽을 타고

2. 나의 올드오크

 두 영화가 재밌는 건 각 감독들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보인다는 점입니다. 사낙타에서 나오는 좋은 것들, 사랑이 됐든 농담마냥 지나가는 영화가 됐든 그 모든 것은 죽음이 도사리는 세계를 뒤엎거나 저항하거나 극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좌절 뿐인 세계는 아닙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한마디, "러시아의 공습을 피해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영화 극장으로 대피했습니다.". 죽음이 판치는 우크라이나의 도시라는 비극적 공간에서 영화는 대피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대놓고 <모던 타임즈> 옮겨놓은 엔딩도 마찬가지고요. 이렇듯 영화란 그런 세계에서도 안락함을 선사하는 대피처이자 소소하게 살아가는 방법이 되겠습니다.


 나의 올드오크 같은 경우는 확실히 저항성이 띕니다. 과거 노조 영상을 보면서 결기를 다지는 장면. 결국 갈등하던 원주민들과 이민자들이라는 서민 계층은 '저항'이라는 정신 아래 똘똘 뭉칩니다. 언제나의 캔 로치.



3. 노베어스

 파나히의 결기가 느껴졌습니다. 마지막에 사이드 브레이크를 당기는 걸 두고 이것이 실패냐 성공이냐를 두고 여러 얘기들이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성공 여부를 따지기 보다는 확실한 결기가 느껴졌다는 부분에 방점을 두고 싶네요. 이란이라는 국체의, 조직의, 공동체의 보수성이 혼란한 역사와 땅과 사회라는 질서 위에 서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파나히라는 개인이 마을에 미치는 영향. 자유라는 관념이 어떻게 보수의 땅, 이란 땅을 바꿔놓을 수 있는가. 결국 그것은 죽음으로 귀결되는 작업이 아닌가. 영화에서도 직접 보여줬지만 이란 정부를 피해 도망가려면 도망갈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파나히라는 사람은 그 보수성 마저 이해해나가면서 이란에 남아 투쟁하려는 사람인 것이죠.


 사이드 브레이크의 엔딩이란 나는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이란 땅의 이란 사람이고 그러니 이란에 남아 맞서겠다는 엄청난 포고 선언이 되는 것으로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진지하게 뭉클했습니다.



4. 일 부코

 내시경 화면을 생각하면 알겠지만 사람의 소화기관이라는 건 동굴 같아 보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동굴을 파헤친다는 건 사람을 파헤치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이고 동굴이 전부 밝혀짐에 따라 골골대던 시골의 노인은 죽고 맙니다. 이 영화의 기본 콘셉트: 하늘의 빌딩에서 시작해서 동굴의 끝으로 가기. 도시와 진보라는 거대한 성과 뒤에는 밝혀지고 밝혀지다가 숨을 거둬버리는 존재들이 있는 것이죠 우하핫. 밝혀진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것들을 없애나가는 과정인데 세계에서 신비가 갈 수록 사라져가는구나 싶은 그러한 의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5. 키메라

 애초에 이탈리아 땅 파헤치는데 주인공이 영국인이라는 것부터가; 이태리 땅은 거대한 기계 장치로 짓밟히고 있습니다. 기차로 시작해 나중에 직접적으로 엔진을 보여주는 요트까지. 그리고 고고학자가 되지 못해 이탈리아 땅을 맴도는 영국인 앞에는 거대한 발전소가 나타나고 "이탈리아 만세"는 "발전소 만세"로 변주됩니다. 이탈리아 땅과 이 땅의 사람들은 중대한 소실의 위기에 처한 듯 보입니다. 하지만 유물을 도굴해서 파는 주체는 영국인 친구 한 명을 빼면 정작 이탈리아인들이죠. 그들이 파는 유물이란 모계 중심의 에트루리아 문명의 산물입니다. 그러니까 이 에트루리아 문명의 죽음이란 오늘날 이태리에서 다시끔 재현되고 있습니다.


 하나 발견할 수 있는 점은 원주민을 자처하지만 그들 역시 쭉 따라 올라가면 본질적으로는 이주민이라는 겁니다. 몰래 숨어살던 여성과 가족. 주인공이 영국인이라면 이들은 설정부터가 유색인종입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에트루리아의 모계 중심의 문명은 오늘날 죽음의 위기에 처한 이래리에 재림하게 됩니다. 이탈리아 문명이 거대한 하나의 키메라라면 그들을 받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안타깝게도 주인공은 어디에도 엮일 수가 없는 존재였고 에트루리아의 여신상이 물 속에 가라앉듯 현재 위기의 이탈리아를 기리는 화신이 돼 지하에 영원히 갇히게 됩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반도의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을겁니다. 그럼에도 이탈리아 땅은 살아있을 테고 여신상이 그러하듯 그 정신은 후대에도 영원할겁니다.

 후반 갈수록 드러나는 정치적 의식을 넘어선 정치적인 주장. '이민자 문제'나 '모계 중심의 재편'이라든가 여기에 대해서는 저는 생각이 많이 달랐습니다만 소실 위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맘에 들었습니다.



6. 초국지소지천황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의 방법론은 따라하겠다 영화 안에서 선언하고 실제로도 그런 영화입니다. 그런 방법론적인 부분도 있는데 일단 넘기고 이 영화를 일축하자면 사라짐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떠한 사라짐의 열도와 그것을 기록하는 행위는 (본인의 붉은 배낭을 일장기랍시고 재차 강조하다가 마지막 가서 진짜 일장기 인서트한게 절대 우연일리는 없고) 궁극적으로는 신화와 영화國, 그리고 일본國이라는 하나의 총체.


 그걸 위하여 어째서 굳이 트럭이나 기차같은 차창 밖의 창밖의 경관을 비중있게까지 왜 보여주고 있는가. '사라짐의 이미지'란 무엇인가. 내 생각엔 수많은 이미지의 이중 나열도 있겠으나 모든 것이 뒤로 향하다가 소실점을 만나 사라지는 교통 이동의 정경이야말로 핵심으로 보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영화시대의 핵심을 찌르는 이미지 덩어리!


 일장기가 펄럭이는 부분에서 스스로가 어째서 초국지소지천황이, 그리고 일본이라는 거대한 국체가 될 수 있었는지에 방점을 찍어주었다 나는 그리 생각합니다. 결국 모든 소실은 하나로 모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이렇게 모아서 두고 보니 공통적인 키워드가 몇 개 보이는데 내가 이런 거에 끌리나 봅니다 확실히.

매거진의 이전글 스즈메의 문단속 후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