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란과 억누름의 공존
<조커>에서도 <조커2>에서도 나온 머리를 쏘는 시늉이란 전편에 지대한 영향을 준 <택시드라이버>에서 비롯된 것이고 택시드라이버에서의 시늉이란 <순응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죠.
순응자는 파시스트들의 자기파괴성을 조롱하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 이미지가 택드를 거쳐 조커로 가는 과정에 파시스트가 존재하였는가 하면 의문인 것이죠. 머 단어를 광범위하게 쓴다면 쓸 수도 있겠지만 제가 좋아하는 활용은 아닌지라.
개봉 전부터 어둠 속의 댄서 얘기 나오길래 궁금했는데 영화 전반이 트리에 느낌이 나더군요. 아서 플렉이는 어둠 속의 댄서와는 정반대로 이민자는 아니지마는 영화 전반의 작동 방식은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이것이 단순 망상 뮤지컬과 현실이 반복되는 형식서 나오는 반응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결말의 선언으로 향하는 그 과정 역시 비슷하지 않나 싶은거지요.
여튼 우습게도 조커2는 <어둠 속의 댄서>와 비슷한 짓을 해버리면서 그 이미지의 시작, 그러니까 파쇼틱한 부분이 많이 묻게 됐습니다. 실제로 감독이 저 영화를 참고하지 않았을까하는 기시감도 무척이나 많이 들었고요.
어둠 속의 댄서는 이민자를 미국의 힘으로 죽여버리면서 그들이 몰려올 것임을 그리고 아주 자랑스러운 세계의 지배자 미국 체제가 그냥 좆됐다는 이야기라면 본작은 수많은 조커같은 존재가 미국에서 탄생하리라는 암흑상을 제시합니다. 일단 수많은 '최후의 노래'가 시작됐음을 알린다는 건 같네요. 그런데도 미국이 좆됐다는 이야기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왜냐?
애초에 조커에 관련된 현실의 그 누구도 그것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단 살잭집에서 잭이 나는 ^분명한^ 문자열로 규정하는게 싫다고 버지한테 씨부리는 것이 본작에도 재현됐다 그리 볼 수 있겠습니다. 가장 유효하게 작동됐다고 생각하는 뮤지컬, 아서가 판검사 다 때려죽이고 "내가 조커였어~."라고 노래부르며 자신의 머리를 향해 총을 쏘는 순간, 영화는 그놈의 범죄자와 정신병적 사회 문제 어쩌고에 관심있는 헛짓거리와 결별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런 식의 도전이 보입니다만 결국 영화는 미국 사회와 질서의 긍정, 그리고 굳이 따지면 변호사측을 옹호하는 수많은 안전장치로 수많은 도전을 억누르게 됩니다. 뭐 그러니까 감독은 전형적인 할리우드 맨인거고 사실 이런 결말이 지극히 당연한거겠지요. 기대도 안했습니다.
트럼프가 전체주의 파시즘이라는 소리는 결코 아니지만 그 안전장치들이 미국 사회의 혼란상과 엮여 트럼프를 공격하는 용도로 작용한 느낌도 있기는 있습니다. 세상을 불태우는 혁명은 결국 다 몽상이고 헛된 짓이라고.
그런데 이것이 토드 필립스가 전편의 무서움을 보고 노선을 수정한 것이냐 하면 매우 의문인 것이 사실 전편도 아서 플렉과 조커를 미화하는 한편 경계하는 태도 역시 취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나는 영화의 톤이 달라졌을지언정 뭐 주제의식은 비슷하지 않나 그리 느낍니다.
그래서 예술가 아서 플렉씨의 자기파괴성은 잘 때렸냐? 그것도 의문인게 솔직히 이 영화가 도전을 억누르는 방식을 취했음이 기획이 거기까지 도달해 시작하는 작품은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어둠 속의 댄서 만든 감독 양반이나 일본의 할복사랑 작가나 결국 자기파괴로 나아가다가 완성된 사람들인데. 이 작품이 그런 걸 억누르기만 했지 성공적으로 비웃고 반박하기는 했었나 싶은겁니다. (순응자 정도면 성공축.)
나는 영화 자체는 그래서 성공했다고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럼에도 반란과 방어라는 묘한 공존은 생각보다 도전적이고 흥미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고 느끼는 것이죠.
나는 유의미한 도전조차 없을 거라 예상했어요.
"누군가는 최후의 노래라 부르겠지만 그들은 우리를 알지 못하지. 최후의 노래로 만드는 건 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