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 <날씨의 아이>는 전반이 실망스러웠다. 아리송한 전개부터 그러한 전개를 메우고자 무리하게 투입된 테마송 주구장창 연출. 이러한 연출은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대폭 수정됐다. 물론 스즈메에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 미미즈가 등장하는 장면까지는 좋으나, 본격적으로 문단속을 시작하면 매번 나오는 그 음악. 그 자체로는 테마송 연출보다도 훨씬 별로다… 그리고 고베에서의 문단속이 그냥 매번 나오는 할리우드 재난 영화의 장면과 별다를 바 없다는 것. 영상 테마부터가 다를 뿐더러, 재밌는 액션으로서 눈요기로는 괜찮은 장면이지만 두 번 보고 싶게끔 만드는 장면이 전혀 아니었다. 만약 스즈메의 문단속의 접근이 여기서 그쳤다면. 나는 완성되지 못한, 초반의 전제를 유기한 어설픈 영화라 비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스즈메는 신카이의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본작까지 일컫는 일명 ‘재난 삼부작’ 중 최종장이라는 작품의 숙명을 저버리지 않고 성공적인 결말로 달려간다. 본작은 재난 삼부작 중 가장 발전된 형태이다.
더욱 직접적인 재난의 묘사
재난 삼부작이 2011년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과 관련됐음을 모르는 이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전작에서는 비유적인 다른 재난을 보임으로서 직접적인 지진의 묘사를 피하였다. 허나 스즈메의 문단속은 작심했듯이 지진의 직접적인 묘사를 행한다. 말미의 3월 11일과 무너진 마을, 지진 경보, 후쿠시마 오염토 제거 등 수많이 지진의 묘사가 등장한다. 판타지로 실재하는 비극을 다룬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든 설정이다… 그럼에도 스즈메는 두 작품과 다른 길을 걸었는데, 어찌하여 그런 길을 걸을 수 있었는고. 그러한 비난이 내제된 접근이나 본인이 본작을 적극 옹호하는 까닭은 전작의 구조를 반복하면서도 다른 방식을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전작의 반복과 계승
날씨의 아이가 너의 이름의의 모티브를 담습했다는 평가와 비슷하게, 스즈메의 문단속은 앞선 두 작품의 모티브를 반복한다. 도쿄 상공을 뒤덮은 폭풍의 형상을 한 미미즈, 머리를 묶는 스즈메, 사랑에 빠지는 주인공 등의 눈에 띄는 일 대 일 붙여넣기 묘사도 존재하나, 영화 전반 역시 마찬가지이다.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아픔을 환상을 통해 치유하고 극복해가며 성장하는 서사이다. 그러나 대지진과 트라우마라는 현실 세계를 다루는 방식은 다르다.
첫 사건. 미미즈가 영화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은 학교에서 이뤄진다. 카메라를 창문이 비춘다. 미미즈라는 동일본 대지진의 은유는 창문 너머에 존재하며, 스즈메를 제한 급우들은 알아챌 수 없는 존재이다. 첫 문단속이 끝나고 복도에서 내부를 바라보는 구도로 문을 조명한다. 첫 문은 어디 있었는가? 지붕이 무너진 돔 건물의 한가운데, 원형으로 이뤄진 복도 너머의 물이 얕게 고인 강당. 가운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돔의 골재는 가운데의 문과 그 장소를 부각하는 듯한 효과를 준다. 강당의 ‘물’은 여기부터는 현실의 세계가 아닌 일종의 ‘환상’ 세계임을 나타낸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앞선 두 작품에서도 사용된 것이다. 너의 이름은에서는 저 세상을 향해 물을 건너는 장면이 그러하고 날씨의 아이에서는 독자적인 생태계를 지녀도 이상하지 않는 물의 집합인 환상적인 구름을 비롯한 작품 전반이 그러하다. 동시에 물은 비정형인 탓에 무척이나 불안정한 형태를 띈다. 너의 이름은에서의 다소 아리송한 황혼의 시간, 그리고 날씨의 아이 영화 전반이 나타내듯. 문단속의 종결이 소나기로 끝나는 것처럼…
그러나 본 영화는 물을 전면에 내세운 날씨의 아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을 통해 현실을 조명한다. 날씨의 아이에서 도쿄란 본래 잠겨야 하는 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의 사회 문제가 표현되는 현실의 영역인 매우 모순적인 지역이다. 이러한 모순성은 본 세계의 작동 논리에서는 당연한 듯 받아지는 상식이다. 히나의 소멸부터 대탈출까지. 비가 걷힌 도쿄와 누가봐도 순수히 환상의 영역일 물의 세계 구름을 보여주며 이러한 모순성을 부각시킨다. 출 소년 문제 등 불운한 사회의 문제를 모순된 도쿄에서 보여주며 현실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뒤, 잠길 수밖에 없었던 환상 도쿄를 현실에 현현시켜 도쿄의 침몰을 이끌어낸다. 일궈온 허황된 대지는 침몰하나 사람들은 그러한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다르다. 영화 내 장면장면에서 비현실이 현실과 중첩되는 이미지가 존재할지언정, 비현실과 현실의 구분이 명확하다. 날씨의 아이의 비현실이 현실과 구분되지 않은 반면, 문단속은 단 두 명만이 보는 세계이다. 상술했듯이, 영화는 초장부터 비현실을 창문이라는 노골적인 상에 가두며, 현실과의 거리를 둔다. 어느정도는 비현실적이 담보된 무대를 선보이겠노라 선언한 셈이다. 이러한 선언은 다루기에는 불안정한 환상의 성질을 다소 정제된 형태로서 사용하게끔 만들며, 환상으로 하여금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말미의 서사를 더욱더 가능하게끔 보이게 한다.
너의 이름은은 ‘대지 환상’을 부분적으로 사용했기에, 이는 무척이나 기막히고 깔끔한 전개로 작동한다. 대지 환상이 내포한 모순성이 영화 전반을 흩틀어 둘 틈새를 주지 않는다. 반면 날씨의 아이는 대지 환상의 모순성을 전면에 내세운 탓에 영화 전반이 다루기 힘들 정도로 불안정해졌다. 이를 성공적으로 다뤘다면 좋았겠으나… 그 결과 영화의 전개에서 다소 납득하기 힘든 과장이 발생하였으며, 이러한 간극을 메우기 위한 매우 강력한 ‘뮤비식 연출’이 작품 서사에 필수적인 요소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이전작에서 군림하는 일까지는 없었다.) 앞선 두 작품과 달리 스즈메는 정제를 추구하였기에, 판타지로 지진이라는 트라우마를 직접 다룸에도 큰 어색함을 자아내지 않았다.
스즈메의 문단속의 인물들이 날씨의 아이와 다르게 왜 죄다 좋은 사람들밖에 없는지를 물으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불안정이 지배하는 세계의 미미즈라는 환상적 존재가 본능적인 혼란을 가지듯이. 현실의 일본 열도의 사람들은 그러한 혼란을 이겨낼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분법적 사고로 끝을 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스즈메가 현실로 무사히 복귀할 수 있었음은 변덕스러운 신이지만, 결국 ‘일본’이라는 안정된 대지의 내적 논리에 따라 움직인 다이진의 희생 덕택 아니겠는가?
스즈메의 문단속은 재난 삼부작 중 가장 직접적인 동시에 대지 환상을 다루는 방식이 가장 발전된, 삼부작의 최종장이라 할 수 있는 영화이다. 이전작의 비유에서 한 발 나아가 현실의 재난으로 넘어오며 비극을 직시하고 다시 일어나자는 치유의 메시지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