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노엘의 내한공연을 고대하며
학창시절 음악에 대한 해박함은 생각보다 큰 힘과 지위를 주곤 했다. 언제 어디서든 지적 우월감을 만들어주는 치트키 비슷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음악 지식의 원천인 M-net 채널과 CD 플레이어의 최신 튐방지 기능을 갖추는 건 나이키 신발을 사는 것보다 내겐 중요한 문제였다.
밴드 오아시스(OASIS, 20대가 된 후 해외에선 ‘오에이시스’라고 발음하는 걸 알게 된 후 충격을 받기도 했다)를 알게 된 건 아날로그 시대의 끝을 향해가던, 음악이 내 삶에서 퍽 중요했던 그 시절이었다.
아직도 선명하게 OASIS 음악을 처음 듣던 순간이 기억 난다.
고1 같은 반 친구 이경완이 집으로 가는 기사 딸린 차 안에서 오아시스의 Definitely Maybe 앨범이 흐르는 이어폰을 내게 건냈다.(그 친구는 퍽 멋진 수서의 단독주택에 살았다) 그는 “브리팝이라는 장르이며 최근 한국에서도 팬덤이 막 시작한 음악”이라고 소개했다.
사실 당시 오아시스는 이미 세계적인 슈퍼스타 반열에 오른 밴드였다. 하지만 팝 문화의 불모지 한국의 고딩들은 오아시스의 앨범을 새로운 트렌드인 마냥 듣기 시작하며 신문물을 영접하고 있었다.
당시까지 나의 음악은 정통 얼터너티브 록이 지배하던 시기다. 중학생 시절 메탈리카, 메가데스, 커트코베인 그리고 국내에선 넥스트와 시나위 등에 빠져 지내던 나날들이다.
뭔가 개량주의자에 대한 배격 비슷한 것들이 내 마음에 자리하고 있었다. 날 티 나는 펑크록 스타일이 싫었고, 림프비스킷 등 랩메탈이 지배한 록의 시대 한 자락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개량주의자(뇌피셜)들이 판칠수록 나는 얼터너티브 정통에 매달렸고, 그 선에서 벗어나면 뭔가 순수를 잃은 사람인냥 경멸했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그때부터 자리하기 시작했던 듯 싶다(20대 중반 이후 선악의 구분이 얼마나 부질없고 편협한 사고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랬던 나에게 오아시스는 그야말로 기존의 문법으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 음악이다. ‘세다 약하다’로 음악을 판단하던 그 구분법이 적동하지 않은 그야말로 오아시스였다.
메탈이 갖는 세상을 향한 분노보다는 마치 동양적 관조가 담긴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사춘기 소년에게는 적지 않은 새로운 감성들을 불러일으켰다. 진중하지 않은 깽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술과 담배를 중시하는 그들의 깽판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Don't look back in anger’ 는 밴드하는 나쁜 남자들의 이야기다. 로큰롤 밴드를 하는 자신이 좀 잘못해도 이해하고 “적어도 오늘만은 그렇게 나한테 화내지 마”라고 하는 게 바로 이 노래의 핵심이다.
진정한 사랑과 가짜 사랑을 나누던 나에게 이 같은 노엘과 리암의 약간 막가는 태도는 미지의 해방감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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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학과 함께 음악이 자리하던 많은 것들이 관계로 채워지고, 오아시스에 대한 열정도 조금은 덜하던 20대 초중반을 지나가고 있던 중 2006년 군대에서 오아시스의 첫 내한 소식을 접했다.
당시 내한 공연이 비교적 활발해지기 시작하던 시절이었지만, 유독 한국을 패스하는 대형 밴드의 리스트에 오아시스가 자리하던 시기다.
남한 민가보다 북한이 더 가까운 강원도 인제 하늘을 바라보며 이게 꿈인가 싶었다. 휴가를 나가지 못하는 답답함에 더해 공연장을 가지 못한다는 상실감이 더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첫 영접의 순간을 놓치고, 노엘과 리암의 “여길 한국을 이제야 왔지?”라는 반응들을 접하며 입맛을 다셔야 했다.
절치부심 끝에 2009년 내한공연에서 그들을 처음 봤다. 압사의 위협이 느껴질 정도의 열기 속에서 탈진할 정도로 목소리를 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그 이듬해 오아시스의 해체 소식이 전해졌던 즈음 지산밸리 락페스티벌에서 그들은 두 번째로 접했다. ‘Fucking in the bush’ 전주와 함께 등장한 리암이 “감사합니다”라는 인사 후 락앤롤 스타를 향해 질주하던 그 순간은 아직도 너무나 생생하다.
Morning glory에서 쩌렁쩌렁하던 리암의 고음(지금은 조금은 갈라지고 탁해졌지만), 노엘이 당시 피아니스트 세션을 보고 “지저스”라며 웃었고, ‘Live Forever’ 전주에서 떼창이 잘 되지 않아 리암이 “노래를 부르라고”라며 일갈한 부분도 기억이 난다.
요즘도 한달에 두세번은 찾아보는 영상들이다.
나는 입사 뒤 회사 이메일 주소를 고심 끝에 noel@로 지었다. oasis@로 할까 하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오아시스를 연상시키거나, 지나치게 거룩한 느낌이라는 생각에 나의 치프인 노엘로 바꿨다.
이 노엘이 오아시스의 노엘인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종종 “형제님”이라고 시작하는 메일을 받기도 했다. 크리스천인지 묻는 취재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친밀도에 따라 노엘이 밴드 오아시스의 노엘이라는 점을 힘주어 말하곤 했다. 사적인 부분이라 드러내고 싶지 않을 때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2012년 런던올림픽 취재 현장에서 리암이 이끄는 비디아이를 본 것도 개인적으로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리암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노엘이라는 정신적 지주를 잃은 비디아이의 연주는 감흥이 분명 덜했지만, 살인적인 취재 스케쥴 속에서 리암을 봐야할 이유는 충분했다.
옷에 별 관심이 없지만...
리암이 한여름에도 입는 모자 달린 사파리는 어느 시기건 옷장에 한두 개가 걸려 있는 잇템이다. 딱히 국내에선 유행한 적이 없는 스타일이지만, 키가 작은 내가 잘못 입으면 오징어가 되기도 하지만, 난 그 사파리를 사랑했다. 그 사파리가 리암의 스타일이라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잘 말하지 않았지만, 리암에 대한 오마주였다.
정치부 시절 검은색 사파리는 내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했다. 여의도와 전국을 누빈 그 사파리는 곳곳이 바랬지만 일 년에 두세 번 꺼내 입는 날이면 새 옷을 입은 것처럼 힘이 된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