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노엘의 내한공연을 고대하며
1편에서 계속...
노엘과 리암 형제는 각자의 길을 걷고 있다. 팬들과 호사꾼들은 내년 오아시스 30주년을 맞아 재결합 공연에 대한 희망섞인 전망들을 내놓고 있지만, 희망가일 가능성이 현재로선 더 높아 보인다.
40줄에 막 들어선 내가 50대 이후를 상상하기 어렵지만, 어렴풋이 생각해보면 성인이 되고 30년을 살아온 관습과 쿠세를 이길 수 있는 깨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 세대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게 폭력이듯, 6.25를 겪은 세대에게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프레임을 전환하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누구보다도 소울에 이끌려 자신만의 크리에이티브를 펼치며 살아온 이들의 현재 간극은 생각보다 클 것 같다. 한 번은 잡힐 법도 하지만, 단 한 번도 노엘과 리암이 멘시티 구장에서 한 프레임에 잡히지 않았던 것처럼.
어색한 재결합과 형식적인 30주년 공연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려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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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결합을 하지 않더라도, 진성 오아시스 팬인 나는 현재로서 충분하고 충만하다.
특히 노엘의 행보는 내게 그렇다. 오아시스라는 플랫폼에서는 발현되기 어려운 빛들이 조금씩 색을 달리하며 깊어지는 느낌이다.
‘노엘 갤러거의 높이나는 새(High Flying Birds)’라는 밴드 이름부터가 그의 품을 보여준다. 중학 시절 교과서에 나오는 높이 나는 새가 멀리본다는 ‘갈매기의 꿈’이 생각나기도 했고, 이른 아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전의 말씀이 떠오르기도 한다.
노엘의 공연은 매번 가진 못해도 두 번에 한 번 꼴로는 찾았던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콘서트장에 간다”고 말하기가 멋쩍어 알리지 않고 간 적도 있다.
아내는 “참 젊게 산다”, “너는 멋있게 살고, 나는 멋있지 않네”라며 견제구를 날리면서도 나를 그곳으로 보내줬다.
치프의 목소리는 나이가 들면서 더 쩌렁쩌렁해지는 듯 했다. 2030대 극강 고음을 자랑했던 락커들이 나이가 들면서 갈라지고 쇠약해져(드림씨어터의 제임스 라브리에가 대표적) 안타까움을 주기도 하는데, 노엘은 달랐다. 밴드 사운드를 뚫고 나오는 그의 쇠소리는 라이브에서만 느낄 수 있는 백미다.
그의 내한을 건너뛰는 건 사실 많은 용기와 타협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제는 콘서트장을 성지 순례하듯 가지 않아도 나의 삶을 안정적으로 영위할 나이가 됐다”며 내한공연을 건너뛰었다가 후기 영상을 돌려보며 후회한 적이 적지 않다.
또 노엘 공연장의 수많은 10대 20대를 보면서 이젠 대중음악을 영위하는 세대에서 바뀌었고, 공연계를 은퇴할 시기가 온 건 아닌지 생각하기도 했다. 마흔이 너머 공연장에 가는 걸 주위에 알리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나이가 되어 버린 건 아닌지 헛헛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공연을 꼬박꼬박 챙기기에는 삶에서 책임질 것들이 너무 많아졌고, 실제로 공연을 생각하기에는 뇌의 용량이 한계에 다다른 느낌도 든다.
한 가지 더. 늘어난 나의 소득에 비해 10만 원을 훌쩍 넘어버린 티켓은 결코 가벼운 지출이 아니게 됐다. 소득은 늘었지만 내 개인에 소비할 수 있는 돈은 줄어버린 현실은 기회비용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됐다. 그러는 사이 노엘이 가진 내 삶에서의 비중은 어쩔 수 없이 줄어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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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대하는 내 마음의 비중은 분명 줄었지만, 그 깊이는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 노엘 곡의 가사를 대하는 마음은 더 깊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내 마음 속의 원픽은 ‘돈룩백’도 ‘리뽀’도 아닌 마스터플랜이다. 가끔은 무교인 내가 이 곡에 종교에 버금갈 정도로 의지하고 있다는 생각도 한다. 오아시스 시절에도 메인보컬인 리암이 아닌 노엘이 혼자 부른다는 사실 때문에 좋아하기 시작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구절구절들에 담긴 생각들을 생각한다.
복잡한 일이 딱히 있지 않아도 거의 매일 마스터플랜을 듣는다. 많은 상념들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조금은 맑아진 내가 보인다. 좀처럼 감정적으로 수습되지 않는 날도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곡이기도 하다.
고 신해철 님이 장례식에서 틀어야 할 곡이라며 ‘민물장어의 꿈’을 꼽았을 때 뭔가 선수를 뺐긴 기분이었는데, 내게는 마스터플랜이 있는 셈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vk6C-CF_YHQ
최근 앨범에 담김 ‘We're gonna get there in the end’의 글도 마스터플랜다움이 느껴져 마음이 간다.
‘Don't fight the feeling~’ 무형의 감정과 싸우지 말라(내 해석은 이렇다). 이 구절을 읊으며 뭔가 삶의 양식이 달라 보이지만 동양과 서양 모두 근저에는 비슷한 강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렇게 신실함과 냉담 그 어느 사이에 있던 노엘을 지난해 다시 만났다. 나보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촌 형이 아니었다면 공연장에 갈 생각을 못했을 지도 모른다.
예전 공연처럼 셋리스트의 모든 맬로디와 가사를 외워야 겠다는 압박까지는 없었지만, 최근 공연의 풀 영상을 찾아보며 한창때의 나로 돌아가 보려고도 했다.
지난해 가을 LG트윈스의 우승을 지켜보며 울었다는 4050 지인들이 적지 않았는데, 나도 간만의 공연을 보며 울음이 터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했다. 건조한 일상에서 그냥 한번 뜨겁게 흐르는 눈물과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슈퍼급으로 까칠한 과거 노엘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달달한 멘트(I Love you more, This song is for 버스데이 걸 등)가 세월의 변화만큼 너그러워졌다는 것만이 달랐을 뿐이다.
‘땡큐 베리 머치’에서 느껴지는 쿨함도 그대로였다.
마스터플랜의 첫 코드가 나오는 순간, 해프 더 월드 어웨이의 박수, 앵콜 브레이크에서 원더월 떼창, 립뽀 전 “너네가 불러주던 노래 이번엔 내가 할게”라는 노엘의 멘트, 격정적인 돈룩백의 떼창 등 공연 전 유튜브 영상을 보며 따라갔던 감정의 동선이 그대로 이어졌다.
영상이 아닌 현장에서 느껴진 음량의 위압감과 노엘의 짱짱한 보컬은 역시 공연이 아니고서는 느끼기 어려운 것이었다.
다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아직 그 지점에 대해선 아직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의 감동이 없었던 것은 분명 아니지만, 최근 한라산 백록담에서 차올랐던 뜨거운 것이 밀려오진 않았다.
‘눈물이 나지 않을 만큼 심장이 식어버린 나이가 돼 버린건 아닌지’라며 자조해보기도 했지만, 이 정도의 감흥을 감당할 내면의 단단함이 생긴건 아닌지 조심스럽게 위안해보기로 했다.
예전 같으면 콘서트에서의 감흥을 밤샘 술자리로 이어갔었겠지만, 공연장을 나와 나는 곧장 담담하게 집으로 왔다. 그리고 어떤 공연에 다녀왔냐는 아들의 질문에 노엘과 맨시티와 돈룩백의 관계를 설명하며 샴페인을 한잔했다. 영국에서 돈룩백과 원더월은 제2의 국가로 불리기도 한다.
여행을 하면 아직 차에서 오아시스 CD를 틀기에 아들들은 “아 그래서 그 노래를 아빠가 좋아하는구나”라며 나의 노엘팬심을 조금은 이해하는 듯 했다. 그 대화에서 느낀 온기와 자부심이 밤샘 술자리의 혈기보다 더 자연스럽고 따뜻하게 다가왔다.
올해 7월 26일 노엘의 공연이 다시 열린다. 혹자는 “또 가냐?”, “셋 리스트도 비슷할텐데”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종교인들이 매주 교회나 절을 찾듯, 공연이 있기에 그저 가는 것”이라고 답한다.
엄청난 감동도, 눈물도, 환희가 없어도 괜찮다. 그저 그 자리에 노엘이 서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아직도 종종 마흔의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직 20대의 열정과 지적 자극을 하루하루 쫓으며 그날의 감흥들을 더 느끼지 못하는 나를 자책하기도 한다.
하지만 노엘에 대한 나의 연대기를 정리하며 이제는 마흔의 나를 조금은 더 따뜻하게 바라봐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릿느릿 공연장을 빠져나가는 노엘의 걸음걸이처럼 마흔을 살아볼 요량이다.
We're gonna get there in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