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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씨 Dec 18. 2024

가능성 있는 상태에 중독

무용한 예술의 쓸모

나에겐 오래된 꿈이 있다. 화가다.

그래서 뭘 했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학창 시절 처음으로 하고 싶은 걸 엄마에게 말했을 때,

돈이 많이 든다며 공부나 하라고 하셨다. 그게 끝이었다.


그렇게 30년이 지났다. 살면서 방황을 할 때마다 그때 그림을 그렸더라면.. 하는 미련과, 지원해 주지 않은 엄마에 대한 원망이 스쳤다.


이 이야기를 내가 한창 꿈을 꾸었던 나이가 된 딸에게 얘기하자 이렇게 말했다.

“진짜 하고 싶은 거였으면 그냥 하면 됐잖아?”

머리를 한 대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냥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난 왜 하지 않았던 걸까?

나는 그동안 ‘가능성이 있는 상태‘에 머물고 싶었던 거 같다. 화가가 될 가능성이 있는 상태. ‘안 해서 그렇지 하면 될 수 있는데 ‘하는 막연한 기대감. 그 이면에는 내가 뭐라도 하나 그리면 나의 하찮은 실력이 드러나 ’화가가 될 수 없는 사람‘이 돼 버릴 것 같은 불안이 깔려 있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능성 있는 사람’이 되는 게 더 편했다. 가능성 있는 상태에 중독된 것이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화가가 되기엔 한참 부족하다는 걸. 그리는 게 좋았을 뿐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원하는 걸 이루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부딪히고 깨지면서 성장한다. 가능성에 중독된 사람들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도전도 하지 않는다. 힘들게 도전했다가 내가 사실은 잘 못한다는 걸 직면하는 게 싫은 것이다. ’가능성 있는 나’에게 중독된 상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내가 변하는 수밖에. 각오하고 노력해 봐야지 별 수 있나.




그럼, 나 이제 그림 그려도 될까?


문득, 프레드릭이라는 그림책이 떠올랐다. 다른 들쥐들이 겨울을 대비해 곡식을 모을 때 프레드릭은 햇살, 색깔, 이야기를 모았다. 겨울이 되자 모아놓은 곡식을 나눠 먹고 이마저도 떨어지자 프레드릭이 모은 걸로 마음의 허기를 채웠다. 이 이야기에서 놀라운 점은, 아무도 프레드릭에게 불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실에서도 그럴 수 있을까?


예술은 무용하다. 내가 그 무용함을 누려도 될까? 예술은 무용하기에 이기적인 마음 없이 실행할 수가 없다. 그래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상과 시간에 밀려 마음에 미련 덩어리만 커질 뿐이다.


미술의 좋은 점은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늦고 빠른 것은 없다. 그래서 그냥 시작해 버렸다. 오래된 내 머뭇거림을 끝내고 등을 떠밀어 줄 사람을 찾았다. 그리기 강의를 신청하고 연필을 들어 선을 그었다. 원과 사각형을 그렸다. 모든 사물은 도형을 이용해 그려낼 수 있었다. 비율에 맞춰 사람 그리는 법, 손과 발을 따라 그려보고 강아지와 고양이를 그렸다. 원근법을 이용하면 꽤 그럴듯한 풍경이 나왔다. 두 시간의 수업은 나에게 최고의 사치였다.

적어도 나에겐 ‘무용한 예술의 쓸모‘가 생겼다.




누구나 무언가를 시도해도 괜찮다. 잘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쓸모가 있을지는 지금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미련은 남지 않는다. 운이 좋다면 ‘덕업일치의 삶‘을 살 수도 있지 않겠는가.


 ‘행복하게 일하기‘ 나에게 남은 시간 동안 한 번은 이뤄보고 싶은 나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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