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은 부지기수요, 가끔 예고도 없이 우회하는 베를린의 대중교통.
독일의 고속철도인 ICE가 종종 지연이 되고 심지어 갑자기 취소가 되기도 한다는 얘기는 자주 들었다. 실제로 나도 작년 여름 베를린 방문 때 퓌센을 들렸다가 예약한 열차가 갑자기 취소돼버리는 바람에 낭패를 보았다. 뮌헨을 찍고 베를린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정이었는데 하필 그다음 날 중요한 미팅이 잡혀 있었다. 영어도 잘 통하지 않는 곳에서 여러 기차를 갈아타며 베를린으로 겨우겨우 돌아왔던 아찔한 기억이었다.
베를린 생활 한 달 차. 이제 베를린 시내 대중교통은 집을 나서며 "아, 거의 다 왔어"라고 말하는 사람의 말만큼이나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지하철이나 트램은 그나마 덜한 편인데, 버스는 제시간에 오는 적이 거의 없다. 비교적 정확하다는 구글맵조차도 이제 5분 후면 도착한다더니, 10분이 다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인 적도 더러 있었다. (심지어는 구글맵이 이미 버스가 지나갔다고 거짓말도 한다. 내가 여기서 15분을 기다렸는데 지나가긴 뭐가 지나가!)
아니, 독일인들 시간약속 철저하다며... 대중교통부터 이렇게나 시간이 안 맞는데 약속 시간을 어떻게 잘 지킨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뭐, 약속 시간 30분 전부터 와서 빙빙 둘러보다가 오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왜들 그렇게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지 알겠다. 베를리너라면 자전거 없는 삶은 생각하기 힘들 정도이다. 환경이나 건강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대중교통 시간이 불규칙한 것도 한 몫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자전거를 한 대 들일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지만 무서운 베를린 사이클러들을 보면 조금 망설여지기도 한다. (이것에 관한 에피소드는 다음 편에...)
그런데 버스를 타면 탈 수록 점점 왜 버스가 제시간에 안 오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일단은 일반 도로의 차선이 비교적 적은 편인데, 그 와중에 공사 중인 도로가 굉장히 많다. 무엇 때문에 왜 공사를 그렇게나 많이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내 곳곳에서 도로 보수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무척 속도가 느리다. 지금 살고 있는 집 앞의 공사만 해도 아직 한 달째 도대체 무슨 공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보수 진행 중이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에선 지하철 신설 수준 아닌가?
다른 동네에 살고 있는 친구의 얘기를 들으니, 원래는 4차선이었던 집 앞 도로를 코로나 이후로 2차선으로 만들고, 나머지 차선을 자전거 전용도로로 만들었다고 한다. 누군가 택시를 잡아 타거나, 잠시 차에 문제가 생겨서 정차라도 하면 도로정체 당첨이다.
나머지 하나의 이유는 내게 버스지연을 조금 더 너그럽게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베를린의 대중교통에서는 휠체어에 탄 장애인이나 노약자를 아주 자주 볼 수 있다. 유모차도 마찬가지이다. 매일 출근하며 버스를 타는데, 단 한 번도 유모차나 휠체어가 같이 타지 않은 적이 없었을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독일의 모든 버스는 저상버스이고, 두대로 길게 이어져있거나 아니면 아래층은 넓게 유모차나 휠체어가 탈 수 있도록 하고, 이층에 자리가 있는 경우가 많다.
베를린의 버스기사들은 항상 도로 턱에 굉장히 가깝게 정차한다. 휠체어를 탄 노인이나 장애인의 경우 가끔씩 그냥 탈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버스기사들이 잠시 내려서 그들이 버스에 잘 승차, 하차할 수 있도록 턱을 내려준다. 그러면서 당연히 2분, 3분 정도 지연이 될 것이고 이것이 쌓이다 보면 버스가 많이 지연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나마 지하철에서 간혹 바쁘지 않은 시간에 휠체어에 탄 분들을 보지만, 버스에서는 거의 보기 힘들다. 베를린처럼 중간이 텅 빈 저상버스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요즘은 우리나라도 저상버스가 굉장히 많다. 하지만 버스에서 휠체어에 타고 있는 분은 거의 보지 못한 듯하다.
이 얘기를 하니 서울에 사는 외국인 친구가 이렇게 말한다. "그러게, 서울에서는 장애인을 많이 본 적이 없네. 대중교통에서는 더욱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베를린보다 서울이 현저하게 장애인이 적을 리는 만무하고,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겠지. 시선이 불편해서, 혹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까 봐 걱정이 되어 밖을 나서기 힘든 분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런데 나는 멀쩡한 다리로 고작 10-15분을 기다리지 못해 이렇게나 불평을 하고 있다니.
만약 버스가 지연되는 이유가 장애인과 노인들이 버스에 오르고 내리기 위함 때문이라면, 나는 그러한 기다림은 언제나 환영이다. 조금 느리지만 포용력 있는 사회. 우리나라도 조금 더 그러한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늦는 버스에 대한 불평을 꾸욱 참아 눌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