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헬스장 여자탈의실에서 남자청소부를 보고 깜놀한 사연.
한국에서는 헬스장을 꽤나 꾸준히 다니는 편이었다. 코로나 때부터 자리 잡은 아주 바람직한 생활습관 중 하나인데, 자칭타칭 인간 골든리트리버에 대문자 E인 나는 코로나 시절이 퍽이나 힘들었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유럽에서는 대대적인 이동제한령이 내려졌고, 그나마 만들었던 회사친구들은 모두 자국으로 돌아갔으며, 사람을 만날 만한 장소는 모두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재택근무를 하며 프랑스에서 난생처음 사무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종종 조깅을 하며 삼삼오오 센강에 모여 앉아 있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것들 코로나나 걸려버리라지!'하고 (속으로) 저주를 퍼부을 때도 있었다. (미안합니다... 외로워서 그랬어요...)
한국으로 돌아와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가족들이 곁에 있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되었지만 왁자지껄 시끄러운 장소와 모임이 너무나 그리웠다. 넘치는 에너지를 소비할 곳을 찾다가 발을 들인 곳이 헬스장이었다. 처음에는 스트레스를 풀러, 나중에는 운동에 재미를 슬슬 느끼다가, 이제는 출장이나 여행을 가도 현지의 헬스장부터 체크할 만큼 헬스에 진지해졌다.
베를린에 왔으니, 독일 헬스장은 어떤지 체크해 볼까나. 베를린 적응이 어느 정도 끝난 후, 헬스장에 등록하러 갔다. 베를린의 헬스장은 멤버십 종료가 무척이나 어려운 것으로 악명 높다. 한번 뭔가를 사면 진득하게 그것만 쓰는 독일인들의 성향 때문일까? 헬스장, 통신사 약정 등 멤버십 베이스로 가는 그 모든 것들은 종료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
가격은 한 달에 30유로도 안 하는 대신, 1년 약정이 걸려있다. 베를린 거의 대부분의 헬스장들이 이런 시스템이라고 한다. 훗, 새해에 한번 등록하고 잘 안 나오는 사람들 등쳐먹기 딱 좋은 시스템이군. 나는 어차피 최소 1년 동안 베를린을 떠날 생각이 없고, 헬스는 꾸준히 하고 있으니, 나한테는 어림도 없다. 뽑아 먹을 수 있을 때까지 뽑아먹어 주마.
호기롭게 헬스장을 등록하고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출근 전 헬스장에 들렀다. 여자 탈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자 탈의실에서 남자 청소부가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내가 남자 탈의실에 잘못 들어온 것 아닌가 화들짝 놀라서 밖으로 나가보니 분명 여자 탈의실이 맞다. 다시 안으로 들어와 보니 곳곳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 여자들이 있었다. 심지어 샤워를 하고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옷을 갈아입어, 말어. 청소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볼까. 잠시 망설이고 있는 내 옆으로 어떤 여자가 옷을 벗는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옷을 호다닥 갈아입고는 탈의실을 나왔다. 그 와중에 남자청소부가 신경 쓰여 힐끔힐끔 쳐다보았지만, 그는 묵묵히 청소를 할 뿐, 그 외 다른 곳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아무리 노출에 자유로운 유럽이라지만, 이건 꽤나 당황스럽다. 다른 시간대도 아니고 꽤나 붐비는 아침 시간대에 여자 탈의실에 남자 청소부라니. 그런데, 운동을 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헬스장을 다녀봤을 때 주로 탈의실 청소를 하는 분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그럼 그들이 남자 탈의실/샤워실은 어떻게 청소를 할까?
우리나라는 물론 탈의실 청소 전 안에 사람들이 있는지 확인을 하고, 주로 사람들이 없는 낮 시간대에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남자탈의실을 청소한다는 것에 불쾌함을 드러내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다면 헬스장에서는 남녀를 각각 따로 고용했을 테니까. (우리나라 헬스장을 모두 다녀본 것은 아니기에, 그렇게 하는 헬스장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남자가 여자탈의실을 청소하는 것에 불쾌한 것일까.
남녀의 차이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소하시는 분들도 그냥 그들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그들의 일을 할 뿐인데, 나의 몸을 혹여나 성적으로 보지 않을까 하는 것은 그들의 프로페셔널리즘을 곡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사건만 봐도 그렇다. 오히려 내가 불편하여 힐끔거렸지, 그는 그저 묵묵히 청소를 하기 바빴다.
헬스를 시작한 지 2주가 넘은 아직까지도, 매번 같은 시간에 (하필 내가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는 그 타이밍에! 하지만 내가 샤워를 끝내고 난 다음이 아닌 게 어디야...) 청소를 하고 있는 남자청소부를 발견한다. 이제 표정으로는 천연덕스럽게(?) 옷을 갈아입지만, 사실은 아직도 벽을 보며 도둑질하듯 옷을 호다닥 갈아입는다. 마음까지 유럽의 자유로움을 따라가기는 초큼 버겁다.
(나중에 몇몇 독일인 친구들에게 들은 얘기이지만, 여자 탈의실에서의 남자청소부는 그들도 의아하다고 한다. 그래, 나만 이상한 거 아니지? 너네도 사실은 좀 불편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