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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성의 생각 Sep 25. 2024

3분 서평: 카프카의 <변신>

"그래, 한 번 해 보라지!"



『변신』- 프란츠 카프카 저/진일상 역

  (부북스 : 2012)




전자책 표지





제가 프란츠 카프카를 알게 된 것은 『시지프 신화』 에 등장하는 알베르 카뮈의 언급 덕분이었습니다.


“소설가는 이제 더 이상 ‘이야기’를 지어내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우주를 창조한다.

 위대한 소설가는 철학적 소설가다.

 … 발자크, 사드, 멜빌, 도스토예프스키, 프루스트, 말로, 카프카 등은 그런 소설가의 예라고 하겠다.”

 _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저/김화영 역, (민음사:2022), 128p.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이라는 말이 있듯,* 개인적으로 카뮈가 저에게는 한 명의 문학적인 '영웅'이기에, 그가 나열하는 여러 영웅들 중 가장 나중에 언급된 카프카의 이름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 삼국지에서 조조가 유비에게 했다는 말이지만, 사실은 조조와 유비를 두 명의 대립된 '영웅'으로 묘사하기 위한 장치일 것입니다.


어떤 부류에 속하는 인물들을 나열할 때 특히 동경할 만한 부류의 명단을 진열할 때에는

일종의 쾌락적인 고통이 수반된다고 생각합니다.


적극적인 관점에서는 누구를 언급해야 하는지(혹은 언급해도 되는지) 즐겁게 고민할 것이고,

소극적으로는 누구를 제외해도 되는지(또는 제외해야 하는지) 고통스럽게 고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가장 마지막에 언급되는 인물에 관하여는

특히나 '이 사람만큼은 제외할 수 없다'는 각별한 고심이 개입되는 법입니다.


아마 카뮈는 이 적극적인 고민소극적인 고뇌 사이에서 카프카를 특별히 엄선했을 것입니다.


알베르 카뮈뿐 아니라, 밀란 쿤데라 등의 굉장한 문인들이 카프카를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을 보면,

정말 영웅의 눈에는 영웅이 보이나 봅니다.






1. 길이와 문체, 전개와 묘사



부북스가 번역한 『변신』은 편집에 있어서는 그다지 친절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제가 읽은 책이 EPUB이라는 사실과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장면묘사와 독백과 대사 사이에 전환이 있을 때마다

과감하게 줄바꿈을 시도하는 현대적인 소설과는 사뭇 다른 편집 철학을 보여줍니다.


본문으로 넘어가면서 화면을 빼곡하게 메우는 글자들 때문에 잠시 질식할 뻔했지만,

결론적으로 부북스 판 『변신』의 불친절한 편집양식은 오히려

문장이 편집을 이기는 기이한 경험을 가능케 한 고마운 요소가 되어주었습니다.


카프카의 전개와 묘사는 가히 천재적입니다.

특히 '해충' 또는 '괴물'로 변하는 과정에서 주인공 그레고르가 겪는 심리나 신체적인 몸부림,

'변신'해 버린 그레고르(아들/오빠)를 대하는 주변인물들의 심리와 행동 묘사은 치밀하고 현실적입니다.

'변신' 이후 그가 신체와 공간(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를 묘사하는 방식도

주의 깊게 읽을 만한 흥미로운 요소입니다.


소설의 화자는 전지적 작가이지만, 전체적인 비중을 따지자면 주인공의 관점에 다소 치우친 관점의 화자입니다.

카프카는 관점의 채택을 통해 가족들의 심리와 행동에 대한 그레고르의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을 일일이 놓치지 않고 대변하고 있어 효과적인 몰입 유인이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전체 이야기의 길이가 예상보다 짧아 놀라웠습니다.


한 편 한 편의 길이가 짧은 대신 결말까지는 한 없이 늘어지는 웹소설 장르와 달리,

짧은 길이로도 깊고 풍부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흥미로운 소설이었습니다.


고전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는 물론이고, 짧고 강력한 소설을 원하는 독자들에게는 강추할 만한 요소입니다.






2. 착상 (아이디어)



20세기 초 카프카의 삶에서 많은 단서를 끌어다 온 소설이라고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변신'이라는 소재는 세기말 속 사회인(직업인; 영업 사원)으로 살며,

일터라는 기능과 값어치의 터전, 그리고 가정이라는 됨됨이의 터전 사이에서

방황하며 인간성을 잃어 갔어야만 했던 카프카 자신의 내면 갈등에 대한 비유일 수도 있겠습니다.


흥미롭게도 후기에서 역자는, "어쩌면 변신은 눈에 보이는 그레고르의 변신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가족들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색다른 해석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동의할 만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레고르가 사회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가족들과 멀어지고 '변해 버렸다'면,

(어쩌면 핑계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가족들 역시 현실 때문에

괴물 모드의 그레고르를 외면하는 쪽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레고르도 가족들도 어쩔 수 없었다면,

이 이야기 속에서 '변신했다(괴물이 되어 버렸다)'는 비난은 누구에게 향할 수 있는 것일까요?


저는 어쩌면 진짜로 '변한 것(변신한 것)'은 그레고르를 둘러싼 세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렇다면, 카프카의 잔혹동화 속 인물들처럼,

세상이 '변신'하면, 그 속에 있는 우리 역시 '변신'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3. 함의



카프카의 『변신』 은 노골적인 방식으로 문제 의식을 던져주는 소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사람이 겪는 모순과 고통, 그리고 그 속에서 품게 되는 생각과 감정을 전시해줄 뿐입니다.


이야기 자체는 매우 비현실적인 '허구'입니다만, 어쩐지 작품 속 『변신』 은 유독 허황되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해충/벌레'의 마음이 공감되기까지 합니다.


그레고르가 '변신'한 것은 그레고르의 의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레고르는 괴물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시종일관 사람의 마음을 붙들고 싶었던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삶'에서 멀어져야 하는 순간들을 종종 겪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사람으로서 사는 삶'을 끝내 놓아버린다면,

결국 우리는 그때 정말 '변신'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정지우 작가는 에세이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에는

"모든 시대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빼앗"는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모든 시대의 개인들이 각자의 소중한 것들을 모든 시대로부터

빼앗기고 지키면서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사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살을 내어주고 뼈를 지키는 심정으로 말입니다.


그러다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면,

'변신'한 시대의 새로운 요구 때문에 더 이상 내어줄 것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더욱 극심한 '변신'과 사람으로 살기 위한 '발버둥'을 겪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카프카에게는 이렇게 소설을 쓰는 행위가 일종의 변신에 대한 '발버둥' 아니었을까요?

요즘처럼 변화가 잦고 점점 빨라지는 세태 안에서 우리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변신'해야 할까요?

세상이 '변신'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도 우리 자신이 아닌 무언가로 '변신'하게 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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