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 이야기 #1

by 잡동산이

우리는 이제부터 일본서기를 읽기 시작할 것이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러기 위해서 첫 번째로 시간들여 해야 하는 일은 일본서기가 담고 있는 '실수들'을 찾아 바로잡는 것이다. 일본서기를 해하고 있는 척 이런런 개요를 설명하거나, 반대로 조작 따위의 음모론을 늘어놓는 이 아니라.


일본서기는 다른 모든 자료와 마찬가지로 자료를 옮겨쓰는[筆寫] 과정에서의 실수들이 만들어낸 잘못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잘못은 만약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다른 자료가 있다면 비교를 통해 간단히 바로잡을 수 있다.




일본서기는 응신천황 25년 백제 직지-왕이 죽었다고 적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주석이 인용한 어떤 기록은 전지-왕을 또한 직지-왕이라고 한다고 적었으니, 일본서기 응신천황 25년 기사의 백제 직지-왕은 백제 전지-왕인 것이 분명하다.


일본서기: (응신천황) 25년 백제의 직지-왕[直支-王]이 죽었다[薨]. (應神天皇)二十五年百濟直支王薨
삼국사기 백제본기 주석 인용 어떤 기록: <(전지-왕을) 직지(-왕)[直支]라고 하였다.> (腆支王)<或云直支>


일본서기 응신천황 25년 기사에 있는 잘못은 전지-왕이 죽은 시점이다. 이것이 어째서 잘못인지 려면 일단 전지-왕이 왕의 자리에 오른 시점을 알야 하고, 그러려면 다시 지-왕보다 앞선 왕이 죽은 시점을 알야 한다. 그리고 나서야 이 잘못이 어떤 실수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살필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전지-왕의 아버지가 아신-왕[阿莘-王]이라고 적었으며, 일본서기 주석이 인용한 백제기는 직지 곧 전지-왕이 아화-왕[阿花-王]의 왕자였다고 적었다. 그런데 신莘은 화華의 모양이 다른 글자[異體子]이니, 백제본기의 아신-왕이 아화-왕을 달리 적은 것이거나 아화-왕이 아신-왕을 달리 적은 것일 수 있다. 어느 쪽이 본래의 표시였을까? 백제기가 화華와 소리가 같은 다른 글자 화花를 써서 아화-왕[阿花-王]이라고 적고 있는 것을 보면, 본래의 표시는 아화-왕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전지-왕[腆支-王]은 아신(-왕)[阿莘]의 첫아들[元子]이었다. 腆支王阿莘之元子
일본서기 주석 인용 백제기: <아화-왕[阿花-王]이 서서 귀-국[貴-國]에게 예를 갖춤이 없었으며, 그리하여 (귀-국이) 우리[我]의 침미다례枕彌多禮, 현남峴南, 지침支侵, 곡-나[谷-那], 동-한[東-韓]의 땅을 빼앗으니, 이리하여 (아화-왕이) 왕자王子 직지直支를 조정[天朝]에 보냈다.> <百濟記云阿花王立无禮於貴國故奪我枕彌多禮及峴南支侵谷那東韓之地是以遣王子直支于天朝>


위의 백제기를 인용한 일본서기 주석은 본래 응신천황 08년 03월 기사에 달린 것인데, 잘못 읽어 아화-왕이 왕의 자리에 올랐다고 한 것으로 여기고 이 해에 아화가 왕이 되었다고 적은 응신천황 03년 11월 기사와 충돌한다고 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응신천황 08년 03월 기사의 주석은 '이 때'라는 구절 뒤에는 전지-왕이 열도로 건너온 일 만을 적, 그 앞에 적은 아화-왕이 왕의 자리에 오른 일은 응신천황 08년 03월보다 앞서 일어났다고 적다. 그러니 이 주석은 응신천황 03년 11월 기사와 충돌하지 않는다.


일본서기: (응신천황 03년 겨울 11월) (이 해) 키-츠누-스쿠네[紀-角-宿禰] 등이 이어 아화阿花를 세우니, (아화가) 왕이 되었다. (키-츠누-스쿠네 등이) (백제에서) 돌아왔다. (應神天皇三年冬十一月)(是歲)紀角宿禰等便立阿花爲王而歸


이제 아화-왕이 왕의 자리에 오른 시점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전지-왕의 앞선 왕, 아화-왕이 왕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일을 적으며 진사왕 08년에 진사-왕이 죽고 아화-왕이 왕의 자리에 올랐다고 적었는데, 또한 진사왕 08년 11월 기사에 진사-왕이 구-원의 임시 궁에서 죽었다고 적었으니, 아화-왕이 왕의 자리에 오른 시점은 아화왕 01년 11월이다. 라서, 일본서기 응신천황 03년 11월 기사가 '이 해'라는 구절 뒤에 적고 있는 일, 일어난 달이 불분명한 일이 끝난 시점 11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 08년 (진사-왕[辰斯-王]이) 죽었다. (왕의) 자리에 올랐다. 八年薨即位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 08년 겨울) 11월 왕이 구-원[狗-原]의 행궁行宮에서 죽었다[薨]. (辰斯王八年冬)十一月薨於狗原行宮


그 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화왕 14년 09월에 왕이 죽었다고 적었다. 일본서는 아화왕이 왕의 자리에 오른 을 응신천황 03년 기사에 었으니, 아화-왕이 죽은 시점은 01년과 14년의 차이인 13년 뒤, 응신천황 16년이어야 한다. 과연 일본서기 응신천황 16년 02월 기사는 아화-왕이 죽은 일을 적고 있다. 하지만 일본서기가 적은 02월과 삼국사기 백제본기가 적은 09월 사이의 간격은 꽤 크다. 일본서기는 '이 해'라는 구절의 뒤에 일을 적으니 국사기 백제본기와 충돌한다고 까지는 할 수 없지만, 어디서 이러한 차이가 생겼는가?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화왕 14년) 가을 09월 왕이 죽었다[薨]. (阿幸王十四年)秋九月王薨
일본서기: (응신천황 16년 봄 02월) 이 해 백제 아화-왕[阿花-王]이 죽었다[薨]. 천황이 직지-왕[直支-王]을 불러 그 일[之](=아화-왕이 죽었음)을 이르고, 말하기를 "네[汝]가 국國에 돌아가 (왕의) 자리를 잇도록[嗣] 해라."라고 하였다. (천황이) 이어 또한 동-한[東-韓]의 땅들을 (직지-왕에게) 내려주고, 그를(=직지-왕을) 보냈다. (應神天皇十六年春二月)是歲百濟阿花王薨天皇召直支王謂之曰汝返於國以嗣位仍且賜東韓之地而遣之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아화-왕이 죽은 뒤 전지-왕이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일에 대해 조금 복잡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그 가운데 앞부분은 이렇다. 전지-왕은 아화왕 03년 왕태자가 되었는데, 06년 백제를 나가 왜에서 볼모가 되었다. 일본서기 응신천황 08년 기사의 내용은 이 일을 이른 것이다. 돌아가서, 14년 아화-왕이 죽자 그 아우 훈례가 다스림을 맡아 전지-왕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였는데, 그 아우 접례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생각컨대, 앞서 달의 차이는 이 일로 말미암은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화(-왕)[阿莘]이 (왕의) 자리에 있은지 제03년 세워 (왕)태자太子로 삼았다. 阿莘在位第三年立爲太子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화왕) 06년 (왕태자[太子]가) 나가 왜-국[倭-國]에서 볼모[質]가 되었다. (阿莘王)六年出質於倭國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화왕) 14년 왕이 죽었다. 왕의 가운데[仲] 아우[弟] 훈해訓解가 다스림을 맡아[攝政] (왕)태자太子가 국國으로 돌아옴을 기다리도록 하였다. (왕의) 막내[季] 아우[弟] 접례碟禮가 훈해訓解를 죽이고 스스로 서서 왕이 되었다. (阿莘王)十四年王薨王仲弟訓解攝政以待太子還國季弟碟禮殺訓解自立爲王


앞서 이야기에 따르면 아화-왕과 전지-왕의 사이에 접례-왕이 있었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아화-왕의 자리를 이은 왕을 전지-왕이라고 하여 접례-왕의 기紀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지-왕의 기사는 아화-왕, 훈해, 접례의 일을 모두 이야기한 뒤에 시작되니, 그것들에는 접례-왕의 일이 남아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접례-왕의 일이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곳은 아화-왕의 기사 뿐이다.


아화-왕이 죽은 뒤, 전지가 왜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다스림을 맡은 사람이 훈해였고 접례는 훈해를 죽이고서 왕의 자리에 올랐으니, 그러기에 앞서 궁宮을 침범하여 훈해를 죽여야 했다. 이 일을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아화왕 14년 03월 하얀색 기운이 궁의 서쪽으로부터 일어났다고 적다. 그러니 아화-왕이 죽은 시점은 14년 03월보다 앞선 시점데, 아화-왕이 죽은 일을 일본서기 응신천황 16년 02월의 기사가 이미 적고 있으니 아화-왕이 죽은 달은 02월이거나 보다 앞선 달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화왕) 14년 봄 03월 흰색 기운이 왕王의 궁宮의 서쪽으로부터 일어나니, (흰색 기운은) (1)필 비단같았다. (阿幸王)十四年春三月白氣自王宮西起如匹練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기사를 적으면서 왕의 이름과 해를 각각의 달 앞에 적지 않다. 때문에 접례의 기사들 가운데 왕의 자리에 오른 일과 그 뒤 01년 04월부터 08월까지의 기사가 빠지게 되자, 접례왕 01년 09월의 기사 앞선 아화왕 14년의 기사에 이어지는 아화왕 14년 09월의 기사로 여겨졌다. 그리서는 아화왕 14년 02월 기사가 왕의 죽음을 적은 부분과 그 뒤 궁에 일어난 일을 적은 부분을 보고 앞 부분 09월 기사가 적은 왕의 죽음을 잘못하여 다시 적은 것이라고 여겨 삭제하였는데, 뒤에 02월[二月]이 03월[三月]로 획이 보태어져 잘못 옮겨지면서 현재의 형태가 되었다.




이제 아화-왕이 죽은 시점은 아화왕 14년 02월이며 또한 응신천황 16년 02월이라는 점을 알았다. 그리고 아화-왕 뒤에 전지-왕이 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아화-왕의 아우 접례가 아화-왕이 죽은 해 02월에 왕의 자리에 올랐다가 09월에 죽었다는 점도 알았다. 그러하니, 전지-왕이 왕의 자리에 오르는 시점은 바로 아화왕 14년 09월 곧 응신천황 16년 09월이 된다.


이제 비로소 글 처음에 제시하였던 일본서기의 응신천황 25년 기사에 어떤 잘못이 있는지 이야기할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전지왕 16년 03월 왕이 죽었다고 하였으니 전지-왕이 죽은 것은 1년과 16년의 간격인 15년을 응신천황 16년에 보탠 응신천황 31년이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응신천황 25년 기사에 전지-왕이 죽었다고 달리 적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전지왕) 16년 봄 03월 왕이 죽었다[薨]. (腆支王)十六年春三月王薨


어째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글자를 세로로 쓰면 그 답이 보인다. 옛 사서의 기록이 그러하듯 25[二十五]의 세 글자는 모두 한자로, 세로로 쓰였고 31[三十一]의 세 글자도 그렇다. 삼三을 구성하는 것은 이二와 일一인데, 그 아래 십十을 쓸 때에 가로 자획 오른쪽서 실수하여 과한 삐침이 남게 되면 아래의 일一과 합하여 五로 보다. 三十一이 二五처럼 쓰인 뒤, 二와 五 가운데 十이 누락되었다고 보아 보태면 二十五가 된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일본서기 응신천황 25년 기사는 응신천황 31년 기사를 옮겨쓸 때의 '실수'에서 생긴 잘못이다. 이것을 바로잡으면 일본서기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차이처럼 보이는 부분이 하나 사라진다.




이렇게 잘못을 바로잡고 나면 다른 잘못 또한 바로 잡을 수 있다. 기왕 손을 댄 김에, 전지-왕과 관련되어 일본서기에 남아있는 다른 잘못도 살펴보자.




일본서기 응신천황 39년 02월 기사는 백제 직지-왕이 여자 아우 신-제도-원을 보냈다고 적었다. 그런데 백제 직지-왕은 응신천황 31년에 죽었으니 39년의 3[三]이 2[二] 또는 1[一]에 가로획 하나 또는 둘을 더하여 쓴 실수로부터 비롯된 잘못일 가능성이 있다. 각각의 실수에 따르면 응신천황 39년은 각각 29년과 19년이고, 이것은 각각 전지왕 14년과 4년에 해당한다. 과연 삼국사기 백제본기 전지왕 14년 기사가 왕이 왜-국에 백-면-십필을 보내었다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 (응신천황 39년 봄 02월) 백제 직지-왕이 그 여자아우[妹] 신-제도-원[新齊都-媛]을 보내며 명령하여 (신-제도-원이) (천조에서) 신하 노릇하도록[仕] 하였다. 이어 신-제도-원이 7(명) 남편있는 여자들[婦女]을 거느렸으며, (신-제도-원과 여자들이) 와서 따랐다. (應神天皇三十九年春二月)百濟直支王遣其妹新齊都媛以令仕爰新齊都媛率七婦女而來歸焉
삼국사기 백제본기: (전지왕) 14년 여름 (왕이) 왜-국[倭-國]에 사신을 보내니 (사신이) 백-면-십필[白-綿-十匹]을 보내주었다. (腆支王)十四年夏遣使倭國送白綿十匹


일본서기는 전지-왕이 여자 아우 신-제도-원을 보냈다고 적었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백-면-십필을 보냈다고 하였다. 세간에서는 백-면을 글자 그대로 하얀색[白] 솜[綿]이라고 해석하는데, 백제본기가 綿이라는 글자를 쓴 것은 오직 이 기사 뿐이니 다른 의미일 가능성을 고려해도 좋을 것이다.


백白을 열도의 소리로 읽으면 시라이しらい, 면綿을 열도의 뜻으로 읽으면 메め가 되니 이어 읽으며 白綿은 곧 시라이메가 된다. 열도의 방식으로 적은 신-제도-원[新-齊都-媛] 가운데 이름인 제도齊都를 뒤로 돌려 쓰면 신원-제도[新援-齊都]가 되는데 이 가운데 신원新援을 열도의 소리로 읽으면 시라히메가 되어 시라이메와 가깝다. 제도齊都를 읽으면 시이츠, 십필十匹을 읽으면 소이츠가 되어 또한 가까우니, 백-면-십필은 사람이며 열도에서 그 이름을 소리와 뜻을 섞어 읽고 달리 적은 것이 신-제도-원이다.


이러한 단어의 대응관계는 일본서기 응신천황 39년 02월 기사가 적은 일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전지왕 14년 여름의 일이라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해되어야 할 분이 남아있다. 바로 달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01월에서 03월을 봄, 04월에서 07월을 름이라고 하였는데, 일본서기는 응신천황 39년 기사의 달을 봄 02월이라고 하였다. 02월은 여름이 아니고, 두 기록의 달에 차이가 있음이 분명하다.


이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일단 앞서의 시간간격을 유지하면서 나아가보자.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전지-왕은 16년 03월에 죽었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그의 뒤를 이은 구이신-왕이 08년 12월에 죽었다고 하였다. 구이신왕 01년이 곧 전지왕 16년이고 응신천황 31년이니 구이신왕 08년은 7년을 보탠 응신천황 38년이고, 응신천황 39년은 구이신-왕의 뒤를 이은 왕 곧 비유-왕의 02년이 된다. 과연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유왕 02년 02월 기사는 왜-국에서 사신이 온 일을 적 있으니, 응신천황 39년 02월 기사는 본래 이 일 - 백제에 사신을 보낸 일을 적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구이신왕) 08년 겨울 12월 왕이 죽었다[薨]. (久尔辛王)八年冬十二月王薨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유왕 02년 봄 02월) 왜-국[倭-國]이 사신을 보내니 (사신이) 이르렀는데 (사신을) 따르는 (왜-국[倭-國]) 사람들이 50명[人]이었다. (毗有王二年春二月)倭國使至從者五十人


그런데 어째서 일본서기 응신천황 39년 기사는 본래의 내용 대신 응신천황 29년 기사의 내용을 적게 되었을까? 아마도 29년 기사의 시점이 이미 39년으로 잘못 옮겨졌고 그 뒤 여름 부분은 사라져 있었으며, 반면 남겨진 또다른 39년 기사에는 시점을 알려주는 봄 02월이라는 구절 만이 남고 내용이 대부분 누락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모자란 둘이 본래 하나의 기사다고 판단하여 잘못 더하니, 현재의 응신천황 39년 02월의 기사가 된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