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3장 4편 부여夫餘 (2) #9

유화柳花와 금와金蛙 (4/4)

by 잡동산이

앞서 금와가 어-사가 돕던 추鄒가 알린 바를 듣고 우발-수 곧 하-백이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곳에서 유화를 만나고 또한 데려갔다고 적은 자료를 통해 보, 부여에서 갈라져 해모수의 아버지를 따르던 무리와는 달리, 부여는 평양-성 가까운 곳을 지나 흘승-골-성에 이르는 길을 그 우두머리 하-백과 이미 손잡아 쉽게 오고갈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해부루가 비우고 옮긴 뒤 해모수가 와서 다스리려 하던 흘승-골-성에도 게 이를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해모수가 흘승-골-성에서 나와 동남쪽 길을 통해 부여에 영향를 주려 하는 것을 알게 된 부여-왕 금와가 한 일은 흘승-골-성 서쪽에 있던 졸본과 손잡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이어 살펴보지요.




삼국사기 백제본기 주석이 인용한 어떤 기록은 이 때 졸본에 연타발이라는 사람과 그 딸인 소서노, 곧 비류-왕의 어머니가 있었다[G-3-(1):①-③]고 적었습니다. 이어 처음[始][G-3-(1):④]이라고 적어 그 뒤의 내용이 앞에 본래 있던 내용 - 앞서 살핀 구절들[G-2:①]이 적고 있는 비류-왕의 일들 - 보다 앞서 일어난 일들임을 알리고서는, 바로 이어 소서노가 우태와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G-3-(1):⑤-⑩]고 적었습니다.


G-3-(1) 삼국사기 백제본기 주석 인용 어떤 기록: <① (비류-왕의) 어머니가 ② 소서노召西奴였다. ● (소서노는) ③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陁勃의 딸이었다. ④ 처음 ● (소서노는) ⑤ 우태에게 돌아가서[歸](= 우태와 혼인하여) ⑥ (우태의) 아들들 2명[人]을 낳았는데 ⑦ (아들들 가운데) 맏이[長]를(= 맏아들을) ● 말하기를 ⑧ 비류沸流라고 하였으며, ⑨ 다음[次](= 둘째아들)을 ● 말하기를 ⑩ 온조溫祚라고 하였다. ⑪ 우태優台가 죽으니 ● (소서노는) ⑫ 홀몸이 되어[寡] 졸본卒本에 머물렀다.> <(一云)①母②召西奴●③卒本人延陁勃之女④始●⑤歸于優台⑥生子二人⑦長●曰⑧沸流⑨次●曰⑩溫祚⑩優台⑪死⑫寡居于卒本>


여기서 우태는 위의 구절들을 담은 어떤 기록의 앞선 구절들이 해부루의 남다를 것 없는 손자 우태[G-1:①]고 적은 사람이니 바로 금와의 아들입니다. 곧 부여는 하-백이 다스리던 길, 곧 평양-성 가까이 지나는 길을 통해, 그 반대편에 있던 흘승-골-성 가까운 곳들에 이를 수 있었으니 금와는 그 가운데 흘승-골-성 서쪽에 있던 졸본의 우두머리 연타발과 손잡기로 하였습니다.


그 동쪽에 있던 흘승-골-성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하기 시작한 해모수에게 금와와 연타발의 이러한 움직임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 뒤로 해모수라는 이름과 흘승-골-성에서 일어난 일들은 해모수의 아들 동명이 부여에서 달아나서 흘승-골-성에 이르기까지 다시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금와의 움직임에 바로 대응하여 움직임을 보이는 대신 해모수는 환나로 돌아가서 상황의 변화를 살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우태의 이름과 졸본 사람 연타발과 금와 사이에 일어난 들을 삼국사기 백제본기가 또한 적었습니다. 다만, 부여 사람들의 시선으로 적은 어떤 기록과 조금 달리 적었습니다.


앞서 구절들에 이어 어떤 기록은 주몽이 부여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리하였기에 건소 02년 03월에 남쪽으로 가서 달아나게 되었다[G-3-(2):①-⑤]고 적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주몽이 달아났다[F-1-(1):①-②]고 같은 일을 적었으니, 이 구절들은 앞서 북-부여에 대해 앞서 살피며 제시한 바 있습니다.


G-3-(2) 삼국사기 백제본기 주석 인용 어떤 기록: <① 뒤에 ② 주몽이 ③ 부여扶餘(= 부여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그러함이) ④ 전한前漢 건소建昭 02년 봄 02월 (주몽이) ⑤ 남쪽으로 가서 달아나도록 하였다.> <(一云)①後②朱蒙③不容於扶餘●④以前漢建昭二年春二月⑤南奔>


그리고 이어 어떤 기록은, 주몽이 이른 졸본에 있던 부여 사람들, 그 왕 노릇을 하던 사람에게 아들이 없고 딸들 3명이 있었다[F-1-(2):③-④]고 적었습니다. 또한 이어 어떤 기록은, 주몽이 보통 사람이 아니었기에 왕의 둘째 딸을 아내삼도록 하였다[F-1-(2):⑤-⑧]고 적었습니다.


F-1-(2) 삼국사기 백제본기: (주몽이) 어렵게 ① 졸본卒本의 부여扶餘에(= 부여 사람들에게) 이르렀다. ② 부여의(= 부여 사람들에게) 왕 노릇을 하는 사람[王]에게 ③ 아들[子]이 없고 ● 다만 ④ 3(명) 딸들[女子]이 있었는데 ● (왕 노릇을 하는 사람은) ⑤ 주몽을 보고 ⑥ (주몽이) 보통 사람[常人]이 아님을 알아 ⑦ 둘째 딸이 ⑧ 그에게[之](= 주몽에게) 아내가 되도록[妻] 하였다. 難①至卒本扶餘②扶餘王③無子●只④有三女子●⑤見朱蒙●⑥知非常人⑦以弟二女⑧妻之


앞서 자료들과 견주어보면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주몽이 이른 곳에 대해 卒本-扶餘, 扶餘-王이라는 단어를 적고 있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이것들을 해석하며, 졸본-부여 대신 졸본의 부여 사람들, 부여-왕 신 부여 사람들에게 왕 노릇을 하던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어떤 기록이 졸본-부여 대신 졸본이라고만 적었고 왕 노릇을 하는 사람에 해당하는 연타발도 왕이 아니라 졸본 사람이라고만 적 있기 때문입입니다.


이러한 이는 어떤 기록은 우태라는 이름 전해 적은 것이 보여주듯 부여 사람들의 관점을 따른 것인 반면,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우태의 이름을 전하지 않고 연타발을 왕이라고 한 것이 보여주듯 졸본 사람들의 관점을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졸본에는 부여 사람들이 있었으며, 연타발은 졸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 사람들에게 또한 왕 노릇을 했지만, 졸본에 있던 부여 사람들은 연타발을 그 왕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 졸본의 우두머리를 왕으로 여기지 않던 이런 부여 사람들은 왜 졸본에 남아있었던 것일까요? 졸본은 뒤에 동명을 따랐는데, 그 동명이 일으킨 고구려의 여러 일들을 뒤에 듣고 적어놓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편에 그 답이 있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편은 고구려 사람들은 혼인하기로 이야기가 되면, 여자의 가문 뒤에 집을 만들어서 사위의 집이라고 하였다[O-1:①-⑦]고 하였다고 적었습니다. 곧 고구려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가문들 사이에 먼저 혼인하기로 이야기가 오가고 그리하여 혼인하기로 하면 남자는 여자의 가문 가까운 곳에 사위의 집을 만들었습니다.


O-1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편: ① 그(= 고구려) 사람들[俗]은 ② 혼인하자는 말,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야기를 나누었다). ● 이윽고 (이야기가) ③ 바로잡히면 ④ 여자의 가문이 ⑤ 작은 집을 큰 집 뒤에 만들고 ⑥ (작은 집을) 이름하여 ● (말하기를) ⑦ 사위의 집[壻-屋]이라고 하였다. ⑧ 사위가 ⑨ 저녁에 ⑩ 여자 가문의 집(= 큰 집) 바깥에 이르러 ● 스스로 ⑪ 이름하고[名] ⑫ 무릎꿇고 절하며 ● 구하기를, ⑬ 여자가 자는 곳(= 작은 집)에 나아갈 수 있었으면, 하였다. ⑭ 이 일이 2(번), 3(번)이 되면 ⑮ 여자의 아버지, 어머니가 ● 이어 ⑯ 들어주어 (사위에게) 시키면 ● (사위가) 작은 집 가운데로 나아가 ⑱ 자고 ⑲ (작은 집) 곁에는 ⑳ 돈, 비단을 쌓아두었다. ㉑ (여자가) 낳은 아이가 마침내 자라 커지기에 이르면 ● 이어 ㉒ 아내를 거느리고 ㉓ (남자의) 가문에 돌아갔다. ①其俗②作婚姻言語●已③定④女家⑤作小屋於大屋後⑥名●⑦壻屋⑧壻⑨暮⑩至女家戶外●自⑪名⑫跪拜●乞⑬得就女宿⑭如是者再三⑮女父母●乃⑯聽使●⑰就小屋中⑱宿⑲傍⑳頓錢帛㉑至生子已長大●乃㉒將婦㉓歸家


이어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편은, 그 뒤로는 남자가 여자의 가문에 가서 허락을 구하고 작은 집 - 여자의 가문 가까이 여자가 머무는 곳, 사위의 집에 와서 - 여자와 자고서는 작은 집 곁에 돈, 비단을 쌓아두었다[O-1:⑧-⑳]고 적었습니다. 곧 여자는 남자가 여자의 가문 곁에 지어놓은 작은 집에 머물면서 때로 허락을 받아 온 남자와 함께 자고 남자가 쌓아둔 물건들을 써서 살았습니다.


이렇게 혼인하는 풍속에 따라, 금와의 아들 우태 또한 졸본에 이르러 연타발의 가문 곁에 지은 작은 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서 소서노는 그 집에 머물렀으니, 앞서 삼국사기 백제본기 주석이 인용한 어떤 기록이 소서노가 우태와 혼인한 일을 달리, 소서노가 우태에게 돌아갔다/따랐다[歸][G-3-(1):⑤]고 적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서 우태는 연타발의 가문에 허락을 받아서는 그의 작은 집 안에 가서 머물고 있던 소서노와 자고 물건들을 쌓아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우태가 남긴 물건들을 쌓고 맡아서는 소서노가 쓰도록 도와줄 사람들이 필요하게 되었으니, 그 사람들이 우태와 함께 졸본에 와서 머물던 부여 사람들 곧 앞서 삼국사기가 백제본기가 적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어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편은, 여자가 낳은 아이가 자라 커지면 남자가 데리고 남자의 집으로 돌아간다[O-1:㉑-㉓]고 적었습니다. 곧 여자는 남자의 아이를 가져서 낳고 다시 그 아이가 커서야 비로소 남자의 가문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서노는 우태의 아이들인 비류와 온조를 낳았지만 여로는 가지 못하였으니, 문에 앞서 삼국사기 백제본기 주석이 인용한 어떤 기록은 우태가 죽으니 소서노는 홀몸이 되어서는 졸본에 머물렀다[G-3-(1):⑪-⑫]고 적었습니다. 곧 우태는 소서노가 아이들을 낳은 뒤에 그러나 그 아이들이 자라 커지기에 앞서 죽었, 리하여 부여 사람들도 부여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서는 소서노의 아버지 연타발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연타발을 도와 연타발이 졸본 사람들에게 왕 노릇을 하도록 하였고, 때문에 졸본 사람들은 그들을 졸본-부여라고 하며 연타발을 그 왕 곧 부여-왕으로 여니, 이것을 삼국사기 백제본기가 앞서와 같이 적었습니다. 만 부여 사람들은 금와 아닌 연타발 따르기는 해도 왕 아니라 졸본 사람이라고만 , 이것을 삼국사기 백제본기 주석이 인용한 옛 기록이 앞서 같이 적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소서노에게서 태어났 비류와 온조는 모두 우태의 아들들이지 주몽 - 동명 - 의 아들들이 아니었니다. 하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백제 시조였던 온조-왕의 아버지가 추모였다[F-3:①-④]고 적었, 한 바로 뒤이어 삼국사기 백제본기가 인용한 어떤 기록은 추모를 주몽이라고 하였다[P:①]고 적었으니, 온조를 동명의 아들이라고 여긴 것니다. 어째서?


F-3 삼국사기 백제본기: ① 백제百濟 시조는 ② 온조-왕[溫祚-王]이었다. ③ 그(= 온조-왕의) 아버지는 ④ 추모鄒牟였다. ① 百濟始祖②溫祚王③其父④鄒牟
P 삼국사기 백제본기 인용 어떤 기록: ① (추모鄒牟를) 주몽朱蒙이라고 하였다. (鄒牟)或云①朱蒙


삼국지 동이전 위서 고구려편은 고구려의 여러 일들은 부여의 여러 일들과 같았다[O-2:①-③]고 적었습니다. 그리하여 살펴보면 삼국지 동이전 위서 부여편은 형이 죽고 그 아우가 형의 아내를 아내로 맞이하였다[N-3:①-③]고 적고 있으니, 여기에 앞서 질문의 답이 있습니다.


O-2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편: ① (고구려가) 말하고 이야기하는 여러 일들은 ● 많이 ② 부여夫餘와(= 부여의 여러 일들과) 더불어 ③ 같았는데 ④ 그(= 고구려의) 사람됨[性氣], 옷들[衣服]에는 ⑤ (부여의 사람됨, 옷들과 더불어) 다른 것들이 있었다. ①言語諸事●多②與夫餘③同④其性氣衣服⑤有異
N-3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편: ① 형兄이 ② 죽으니[死] ● (아우가) ③ 형의 아내[嫂]를 아내로 맞았다[妻]. ● (이것은) ④ 흉노匈奴(= 흉노의 풍속과) ⑤ 같은[同] 풍속[俗]이었다. ①兄②死●③妻嫂●④與匈奴⑤同俗


곧 졸본 사람들은 우태와 같은 부여에서 나온 주몽을 우태의 아우로 여겼고, 때문에 연타발이 죽은 우태의 아내인 그 딸 소서노를 주몽이 아내로 맞이하도록 하니, 졸본 사람들은 우태의 아들들 또한 주몽의 아들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본 바를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어떤 기록의 일을 제외하고서 뒤섞어 적었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연타발이 죽고 주몽이 그 자리를 이었다[F-1-(3):①-⑤]고 적었습니다. 그리고서는 이어 일어난 일, 어떤 기록이 주몽이 고구려를 세워 도읍하고서 소서노를 다시 왕비로 맞이하였다[G-3-(3):①-⑤]고 적은 일을 앞서 소서노를 주몽이 아내로 맞은 일과 같은 것을 거듭 적은 것이라고 여기고서는 다시 적지 않고 바로 이어 소서노가 2명 아들들을 낳아 비류와 온조라고 하였다[F-1-(3):⑥-⑩]고 적었습니다.


F-1-(3) 삼국사기 백제본기: ① 오래지 않아[未幾] ② 부여의(= 부여 사람들에게) 왕 노릇을 하던 사람이 ③ 죽고 ④ 주몽은 ⑤ (왕의) 자리를 이었다[嗣]. ● (주몽과 혼인한 둘째 딸은) ⑥ 2(명) 아들들을 낳았는데 ⑦ (아들들 가운데) 맏이[長]를 말하기를 ⑧ 비류沸流라고 하였으며 ⑨ 다음[次](= 둘째 아들)을 말하기를 ⑩ 온조溫祚라고 하였다. ①未幾②扶餘王③薨④朱蒙⑤嗣位●⑥生二子⑦長●曰⑧沸流⑨次●日⑩溫祚
G-3-(3) 삼국사기 백제본기 주석 인용 어떤 기록: <● (주몽이) ① (국의) 호號를 ● (말하기를) ② 고구려高勾麗라고 하고는 ③ 도읍[都]을 세우고서 ④ 소서노를 아내로 맞으니 ● (소서노가) ⑤ (왕)비妃가 되었다.> ●①號●②高勾麗③立都④娶召西奴●⑤爲妃>


기에 이 구절들은 사실 주몽과 소서노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주몽 - 동명 - 이 아들처럼 여기기는 했지만, 어머니가 소서노, 아버지가 우태라는 점이 분명던 소서노의 두 아들들에 대해 적은 것일 뿐입니다. 이 점은 비류와 온조의 성씨姓氏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라고 하는 질문의 답에 이르는 데에 중요합니다.




앞서의 기록들에 보이는 금와와 동명의 관계는 - 동명이 부여 바깥에서 우태와 같은 금와의 아들이라 여겨지고 있었다는 점은 - 이어지는 이야기, 명이 뒤에 자라나던 시기의 일들을 적은 구절들 가운데에서 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금와는 태도는 바뀌었고 동명은 부여를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는, 당시의 상황 변화를 담은 자료들을 이제 다음 글에서부터 살펴 당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글에서 계속)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3장 4편 부여夫餘 (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