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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4편 부여夫餘 (2) #10

금와金蛙와 동명東明 (1/4)

by 잡동산이

이제, 앞서 이야기한 일들 - 동명이 태어나고서 금와가 졸본과 손잡기까지의 일들 - 을 동명이 태어나던 시점에서부터 금와와 동명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지요. 그리하여 동명이 고구려를 일으키기까지 금와가 다스리던 부여에 일어난 일들 가운데 남은 것들을 모두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금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이제까지 금와가 해부루에게 받아들여지고, 다시 해부루에 이어 왕이 되고, 유화를 만나고, 유화가 해모수와의 일로 가진 동명을 죽이려 하고, 해모수의 일들에 대해 졸본과 손잡고자 아들 우태를 졸본 사람들의 우두머리 연타발의 딸 소서노와 혼인하도록 보낸 일들을 차례로 살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우태와 함께 보내었던 부여 사람들 곧 연타발과 손잡았던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금와는 누구를 그리로 보냈을까요? 앞서 동명을 죽이려던 금와의 뜻을 뒤에 마-가, 우-가, 구-가, 저-가라는 기르던 짐승들의 이름을 가지로 이르던 대사들이 그리 하였을 것임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가 돌려 적은 돼지, 개, 소, 말이라는 단어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단어들을 적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구절들에는 금와의 뜻을 거스른 또 하나의 무리로 이어지는 새[鳥][A-8-(4):⑧]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뒤에 위魏가 보낸 사신이 부여에 이르러 보고 들은 바를 적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편은 왕이 6가지 기르는 짐승들의 이름을 가지고 벼슬 이름들로 삼았다고 하는데, 우-가처럼 새를 이르는 글자에 가加를 붙인 이름은 적지 않았습니다.


점을 통해, 우태를 따라 보냈던 사람들이 우태가 죽자 우태를 따라 돌아오지 못한 사실을 바라보면 이 사람들은 본래 새를 이르는 글자에 가加를 더한 무리, 새의 이름을 벼슬 이름들로 삼던 무리 - 뒤에 부여에 있었으나 뒤에 보이지 않게 된 무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곧 금와는 앞서 동명을 죽이는 데에 련된 무리들 가운데 보인 이 무리 가운데 그 뜻을 반대하지 않는 람들이 우태 따라 졸본에 가 졸본과 손잡 것을 돕도록 하였습니다.


그런 무리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금와가 보낸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우태優台에서 이어지는 그 자취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태가 죽은 뒤 이 무리는 연타발을 따랐으며, 그를 왕 노릇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졸본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여길 만큼 그를 도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뒤의 기록들이 결국 그들을 졸본-부여라고 적은 것이 보여주듯, 그들은 졸본에 깊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을 이르는 말, 부여와 떨어져 졸본이 자리하였던 곳에서 그 말을 적는 글자를 가지고 달리 적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웅어수-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현재의 압록-강과 더하여진 뒤에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현재의 장자-강이 압록-수라고 하였습니다. 졸본은 그런 압록-수라는 물줄기 가까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장자-강에 더하여지기에 앞서의 현재의 압록-강에 해당하는 곳의 북쪽 건너편 곧 현재의 집안 가까이 환-도-성에 고구려의 도읍이 있던 기에, 도읍을 떠나 오래 지냈기에 그 이름을 달리 2가지로 적 사람을 자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직 왕의 자리에 오르지 않은 시기의 고구려 미-천-왕 그 사람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주석이 인용한 어떤 기록은, 러한 시기 미-천-왕의 이름 을불乙弗을, 우불憂弗이라고 하였다[Q-1:①]고 적었으니 憂라는 글자로 적던 옛 소리를 또한 乙로 적었던 것입니다. 환도는 본래 부여의 무리였던 해모수의 아버지와 부여와 갈라져 머물던 곳이며, 압록은 그 가까운 물가에 졸본이 있었으니, 같은 옛 소리를 환도와 졸본 가운데 한 곳에서는 을乙로 적고 다른 곳에서는 憂로 적은 것입니다.


Q-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주석 인용 어떤 기록: <① 우불憂弗이라고 하였다.> (乙弗)<或云①憂弗>


이러한 관계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02년 03월 기사 가운데 을음이라는 사람을 족부 곧 피붙이 어른[F-4:②]이라고 적은 구절들을 통해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온조는 우태와 소서노의 아들이었으니, 그가 을음을 피붙이 어른이라고 한 것은, 을음이 우태 또는 소서노의 피붙이들 가운데 같거나 앞선 세대에 해당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F-4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02년 봄) 03월 ① 왕이 ② 족부族父(= 피붙이 어른) 을음乙音에게 슬기로움[智]과 앎[識], 놀라지 않음[膽]과 힘[力]이 있음이(= 있음을 가지고) ③ (을음에게) 벼슬을 주도록 하니 ● (을음이) ④ 우보가 되었다. (溫祚王二年春)三月①王②以族父乙音有智識膽力③拜●④爲右輔


그런데, 소서노의 아버지 연타발은 일찍 죽었는데, 한참 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32년 기사가 적은 연비延丕라는 사람 이름[A-9:②]을 통해 보면, 연타발은 연延이라는 무리 이름을 성姓으로 삼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기에, 을음이 온조의 피붙이 어른이라는 관계는 이미 죽은 연타발과 마찬가지로 연-씨[延-氏]였던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온조의 아버지 우태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A-9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31년) ① (엄)우尤가 ②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꾀어 ③ 그[之]를 베었다. (琉璃明王三十一年)①尤②誘我將延丕③斬之


그리하서 앞서 우憂와 을乙이 같은 옛 소리를 부여와 졸본에서 달리 적던 글자들이었다는 점을 통해 보면, 을음의 을乙은 우憂의 소리를 그 소리로 하는 우優 다 뒤에 리 적은 것입니다. 졸본에 머물던 부여 사람들의 우두머리, 금와가 우태와 함께 졸본으로 보낸 사람 곧 우태와 같은 세대만 멀거나 또는 가까던 피붙이 우음優音이었데, 우태가 죽 타발을 따른 그 이름을 졸본에서 쓰는 글자로 적 그것이 을음乙音었습니다.


설문해자는 을乙이 봄의 풀, 나무가 구부러지고 뒤틀리며 나오는 모습을 본땄다[R-1:①-②]고 적고 새와 관련된 뜻 따로 적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만 이체자 자전은 乙이라는 글자, 丿+乙이라는 글자 모두 제비를 뜻하는 鳦의 다른 모양 글자라고 하였고 설문해자는 그러한 을[丿+乙]은 검은색 새[玄鳥]다[[R-2:①-②]라고 적었습니다.


R-1 설문해자: ① 을乙은 ② 봄春의 풀, 나무가 구부러지고[冤] 뒤틀리며[曲] 나오는 것을 본땄다[象]. ③ 차가운[陰] 기운이 ● 여전히 ④ 강하기에 ⑤ 그것들이(= 풀, 나무가) ⑥ 구부러지고 구부러진 곳[乙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 (을은) ⑦ 곤丨과 더불어 ⑧ 뜻[意]을 같이한다. ⑨ 을은 ● (또한) ⑩ 갑甲을 잇는데[承] ⑪ 사람의 목[頸]을 본땄다. ①乙②象春艸木冤曲而出③陰气●尙④彊⑤其⑥出乙乙也●⑦與丨⑧同意⑨乙⑩承甲⑪象人頸


鳦의 다른 모양 글자 乙과 丿+乙. 출처: 대만 이체자 자전 (주소: https://dict.variants.moe.edu.tw/dictView.jsp?ID=76953&q=1 )
R-2 설문해자: ① 을[丿+乙]은 ② 검은색 새다. ①丿+乙②玄鳥


그러니 말하자면, 검은 새라는 뜻을 가진 丿+乙라는 글자를 졸본에서는 다른 모양 글자 乙를 써서 달리 적었는데, 부여에서는 그 소리를 적는 다른 글자인 우優라는 글자를 써서 달리 적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乙도 검은 새라는 뜻을 적게 되었는데 이것이 현재 을의 뜻 가운데 '새'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다른 시기, 다른 곳에서는 을乙을 써서 적던 옛 소리를 달리 적던 글자 우優의 소리가 나온 우憂를 써서 또한 적 되었습니다.




사실 을/우에 대해서는 다시 그 옛 소리를 적던 또다른 글자를 찾을 수 있지만, 그것은 해당하는 시기의 유리-명왕 때의 일들을 살펴 이야기하기로 하고, 일단 1가지 이야기만 더 하고서 우/을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도록 하지요. 앞서 우태를 금와의 아들이라고 하였던 바, 금와의 성이기도 하였던 을/우-씨[乙/優-氏] 이야기입니다.


앞서 살펴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해부루가 금와를 얻었던 곳의 이름을 곤-연[鯤-淵]이라고 적었는데 동명왕편 석이 인용한 본기도 똑같이 적었습니다. 두 자료들은 모두 곤-연에 이르러 왕이 타던 말이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2장 4편 #17 Q-10:③-⑦ = N-17:③-⑥]고 적고 돌 아래에 아이가 있었다[2장 4편 #17 Q-10:⑫ = N-17:⑪]고 적었습니다.


2장 4편 #17 Q-10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부루가) ① 산山, 강[川]에 제사지내고 ② 자리이을 아이[嗣]을 구하였다. ③ 그(= 부루가) 타던 바였던 말이 ④ 곤-연[鯤-淵]에 이르러 ⑤ 큰 돌을 보았는데, ● (말과 돌이) ⑥ 서로 ⑦ 마주하여 눈물을 흘렸다. ⑧ 왕王이(= 부루가) ⑨ 이 일[之]을 이상하게 여기고[怪] ⑩ 다른 사람[人]에게 시키니 ● (그 사람이) ⑪ 그 돌을 돌렸는데, ● (그 돌에) ⑫ 나이어린 아이[小兒]가 있었고 ● (아이는) ⑬ 금색 개구리[蛙] 모양이었다. ⑭ 왕이 ⑮ 기뻐하고 ● 말하기를 "⑯ 이 아이[此]는 ● 이어 ⑰ 천天이 ⑱ 나에게 주는 ⑲ 자리이을 아이[令胤]다."라고 하였다. ● (왕이) 이어 ⑳ 거두어 그 아이[之]를 돌보았다[養]. ㉑ 이름하여 ● (말하기를) ㉒ 금와金蛙라고 하였다. ● 이윽고 ㉓ 그 아이[其](= 금와)가 ㉔ 자랐고, ㉕ 서서 (왕)태자太子가 되었다. ①祭山川②求嗣③其所御馬④至鯤淵⑤見大石●⑥相⑦對流淚⑧王⑨怪之⑩使人●⑪轉其石​●⑫有小兒●⑬金色蛙形⑭王⑮喜●曰⑯此●乃⑰天⑱賚我⑲令胤乎●乃⑳收而養之㉑名●曰㉒金蛙●及㉓其㉔長㉕立爲太子
B-17 동명왕편 주석 인용 본기: <(부루가) ① 산山, 강[川]에 제사지내고 ② 자리이을 아이[嗣]을 구하였다. ● (부루가) ③ 타던 바 말이 ④ 곤-연[鯤-淵]에 이르러 ⑤ 큰 돌을 보았는데, ● (말과 돌이) ⑥ 눈물을 흘렸다. ⑦ 왕王이(= 부루가) ⑧ 이 일[之]을 이상하게 여기고[怪] ⑨ 다른 사람[人]에게 시키니 ● (그 사람이) ⑩ 그 돌을 돌렸는데, ● (그 돌에) ⑪ 나이어린 아이[小兒]가 있었고 ● (아이는) ⑫ 금색 개구리[蛙] 모양이었다. ⑬ 왕이 ● 말하기를 "⑭ 이 아이[此]는 ⑮ 천天이 ⑯ 나에게 주는 ⑰ 자리이을 아이[令胤]다."라고 하였다. ● (왕이) 이어 ⑱ 거두어 그 아이[之]를 돌보았다[養]. ⑲ 이름하여 ● (말하기를) ⑳ 금와金蛙라고 하였다. ⑳ 서서 ㉑ (왕)태자太子가 되었다.> <(本記云)①祭山川②求嗣●③所御馬④至鯤淵⑤見大石●流淚⑦王⑧怪之⑨使人●⑩轉其石●⑪有小兒●⑫金色蛙形⑬王●曰⑭此⑮天⑯錫我⑰令胤乎●乃⑱收養之⑲名●曰⑳金蛙⑳立㉑爲太子>


말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니, 부여 사람들의 무리들 가운데 마-가를 떠올려보면, 앞서 동명을 금와가 죽이려 할 때에 그러하였듯이 이 때 말이 눈물을 흘렸다고 적은 일은 사실 그 말을 기르던 마-가 사람이 말을 통해 한 일이었습니다. 곧 아이 금와를 해부루가 찾도록 알리지 않고 이끈 것은데, 금와는 어째서 곤-연에 있었던 것일까요?


앞서 우태를 통해 금와의 성이 또한 우/을[優/乙]로 적던 뜻이라는 점을 이야기하였고, 그 본래의 뜻은 을이 본래 적던 글자 丿+ 乙의 뜻인 검은 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글자를 달리 적은 을乙에 대한 설문해자는 또한 그 뜻이 곤丨과 같다[R-1:⑦]고 적고 있으니, 이것을 통해 보면 뜻을 가지고 을乙을 달리 적은 것이 곤丨이고, 곤의 소리를 가지고 달리 적은 다른 것이 곤鯤입니다.


다시 말해, 곤-연[鯤-淵]이란 곤-연[丨-淵]을 달리 적은 것이며 또한 본래 을-연[乙-淵]을 을의 새가 아닌 다른 뜻을 가지고서 리 적은 것인데, 래는 그 뜻이 아닌 새라는 뜻을 가지고서 을乙로 달리 적은 을[丿+乙]의 무리인 을-가 곧 새를 벼슬 이름으로 삼던 무리가 있는 곳 가까이의 못을 말하는 것입니다. 금와는 바로 이 무리였습니다.


이 무리는 어떻게 여기에 있게 되었을까요? 어디서 나타났을까요? 참 앞서 을-가와 같이 새 이름을 가지고 벼슬 이름으로 삼은 사람 있으니, 앞서 살폈던 소-호, 달리 금-천-씨가 그 사람인 바, 그 후손들이 옛 조선의 도읍 아사달을 통해서 옛 조선에 들어왔고, 뒤에 이 사람들이 다시 압록-수 가까이로 옮겨 머물러서는 진[眞/辰]이라고 하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곳이 한漢이 진-번-군을 두게 되는 곳임을 아주 자세히 살핀 바 있습니다.


1장 3편 #31 AM-2 춘추좌전: (소공 17년 가을) ① 소-자[昭-子]가 ② 물었으며 ● 말하기를 "③ 소-호-씨[少-皞-氏]의(= 소호-씨에게 있던) 새 이름의 벼슬[官]은 ④ 어찌 그리하였는가[何故也]?"라고 하였다. ⑤ 담-자[郯-子]가 ● 말하기를 "(소-호-씨는) ⑥ 나의 조상[祖]이니 ⑦ 내가 ⑧ 그것[之]을(= 어찌 그리하였는지[何故]를) 안다. ... ⑨ 나의 높은 조상 소-호[少-皞] 지摯의(= 지가) 섰던 일[立]에(= 섰을 때) ⑩ 봉鳳, 황鳥이 ⑪ 때마침 ⑫ 이르렀다. ● 그리하여 ⑬ 새[鳥]에 적어[紀](=더하여) ⑭ (어떤) 새 군대[師]와 어떤 새 이름[名](= 새 이름의 벼슬)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昭公十七年秋)①昭子②問焉●曰③少皞氏鳥名官④何故也⑤郯子●曰⑥吾祖也⑦我⑧知之...⑨我高祖少皞摯之立也⑩鳳鳥⑪適⑫至●故⑬紀於鳥⑭爲鳥師而鳥名


곧 그 땅을 떠난 진辰 사람들의 후손 가운데 1명이 금와였으니, 그리하여 고리高離라고 전한 그의 이름 앞에 금색[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진 사람들이 우두머리가 되어 다스렸던 무리들 가운데 그들이 떠날 때에 따라가지 않고 남았던 무리는 흘승-골-성에 도읍한 부루를 따랐고, 새 우두머리 부루에게 자리이을 아이가 없자 말을 몰래 부려 옛 우두머리의 피붙이를 넌지시 보인 일이 바로 부루가 금와를 찾으며 겪은 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곤-연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금와가 보내 졸본에 와서 머물던 무리는 연타발을 따른 뒤에 다시 우-씨가 아니라 을-씨라고 하였는데, 그들은 그 뒤 고구려 유리-명왕 때, 대무-신왕 때, 고국천-왕 때에 여러 차례 다른 구절들 안에서 거듭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한 것들 가운데 을파소를 서쪽 압록(-수)의 골짜기의 좌물-촌 사람[A-10:①]이라고 적고 있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천왕 13년 04월 기사의 구절들입니다. 다른 왕들의 시기를 살핀 뒤에야 분명해지겠지만, 이곳이 해부루를 따라 동쪽으로 떠나기에 앞서부터 을-씨가 머물렀던 곳이며, 우태를 따라 돌아온 뒤에 다시 을-가가 자리잡았던 곳곤-연 곧 을-가의 못 또한 바로 좌물-촌이 있던 골짜기에 있었습니다.


A-10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천왕 13년 여름 04월) (안류가 말하기를 ")① 서쪽 압록-곡[鴨淥-谷]의(= 서쪽 압록-수가 흐르는 골짜기에 있는) 좌물-촌[左勿-村]의 을파소乙巴素라는 이는 ② 유리-왕[琉璃-王]의 대신大臣 을소乙素의 후손[孫]이다.("라고 하였다.) (故國川王十三年夏四月)(曰)①西鴨淥谷左勿村乙巴素者②琉璃王大臣乙素之孫也


자세한 것은 뒤에 더 이야기하고, 여기서는 간단히 살펴보지요. 이 시기 압록-수는 앞서 살핀 바, 현재 웅어수-산 가까운 곳에서 나와서 서북쪽으로 흐른 장자-강이, 압록-강과 더하여져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기까지를 이르니, 그 흐름이 뚜렷이 꺾인 곳을 기준삼아 그 서쪽의 흐름을 따로 서쪽의 압록이라고 적은 것입니다. 그 가까이 골짜기에는 앞서 살핀 졸본이 있었고 그 동쪽 흘승-골-성과의 사이에는 좌물-촌이 그리고 곤-연이 있었습니다.


이 무리의 이야기는 다시, 을파소의 이야기 가운데 유리-명왕 때에 모습을 보인 그의 큰 신하, 그러나 유리-명왕 시기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기사들에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을소의 이야기에서 다시 우/을을 또한 달리 적은 글자와 함께 살피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일단은 금와의 일로 돌아가서 정리하고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로 합시다.




요컨대, 우태를 통해서 그 아버지 금와의 성 또한 졸본에서 달리 을乙로 적던 우優라는 것을 살폈고, 나아가 그들이 그리 가게 된 것은 금와가 새[鳥]를 벼슬 이름으로 삼는 사람들을 우태와 함께 졸본에 가도록 하였기 때문임을 살폈습니다. 나아가서, 본래 부루가 금와을 얻은 곤-연 곧 을-연이라는 곳을 통해 그들은 보다 앞서 졸본 가까이 있었던 무리였고 금와 또한 그 무리였음을 살폈습니다.


금와 스스로가 해당하는 이 무리, 우/을-가[優/乙-加]의 무리 가운데에서 앞서 동명의 일에 대해 금와의 뜻을 따르지 않던 사람들을 제외하고서 졸본으로 보내 우태를 돕도록 하였는데, 일로 말미암아 금와 스스로를 따르던 사람들은 잠시나마 줄어들었습니다. 리고 이런 상황은 4개 가들에 해당하는 사람들 가운데 앞서 동명의 일에 대해서부터 그의 뜻을 따르지 않던 사람들에게는 금와 부여에서 벗어날 기회가 어주었습니다.


자, 그리하여 이 사람들은 무엇을 하였을까요?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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